메뉴 건너뛰기

close

ⓒ 이승열
시월 해미읍성 하늘은 유난히 파랗고 학교를 파한 아이들은 성벽 위를 달리고 바삐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시월 해미읍성 하늘은 유난히 파랗고 학교를 파한 아이들은 성벽 위를 달리고 바삐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 이승열
K가 홍성에 있는 양조장에 들러 결성막걸리를 받아 오는 동안 들른 해미읍성 성문 밖에는 작년처럼 고무래 자국 선명한 나락이 가을볕에 익고 있었다. 어린 시절 나락이 잘 마르도록 맨발로 골을 내곤 했었다. 맨발에 닿던 나락의 까실까실한 감촉을, 발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던 간질거림이 고스란히 화석이 되어 있었나 보다. 갑자기 발가락 사이가 간질거리며 나락이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비산비야의 충청도 땅엔 벌써 가을이 깊게 내려와 있었다. 딱 눈높이로 보이는 산과 들에 투명한 억새가 막 꽃을 피우기 시작했고, 키 작은 코스모스가 아직도 무리를 지어 피어 있다. 아뿔싸 또 찍혀 버렸다. 가짜 속도 측정기가 없어졌다고 너무 방심했나보다. 파라솔 속에서 속도 측정기를 든 경찰이 손사위로 속도위반이었음을 친절히 알려준다.

초짜 낚시꾼도 그저 드리우기만 하면 망둥어를 낚을 수 있다.
초짜 낚시꾼도 그저 드리우기만 하면 망둥어를 낚을 수 있다. ⓒ 이승열
간월도하면 어리굴젓이다. 조선시대 왕에게 진상되었던 간월도의 어리굴젓은 물길이 열렸을때 확인할 수 있다.
간월도하면 어리굴젓이다. 조선시대 왕에게 진상되었던 간월도의 어리굴젓은 물길이 열렸을때 확인할 수 있다. ⓒ 이승열
바닷물이 빠진 간월도는 바닥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자갈과 진흙의 갯벌 바닥에 바지락 캐는 아낙들이 가득하다. 천수만이 거대한 육지로 변하고, 수 만 마리의 철새들이 군무를 추는 동안 섬의 기능을 모두 거세당한 간월도건만, 갯벌은 여전히 생명을 잉태하고 토해내고 있었다.

갯벌을 파헤치며 바지락을 캐는 젊은 아낙의 손놀림이 신기에 가깝다. 난 아무리 들여다봐도 돌멩이인지 바지락인지 구별조차 되지 않건만. 이마에 주름이 선명한 구릿빛 얼굴을 한 노인은 젊은 아낙의 빠른 손놀림을 부러워했다. 난 연신 바지락을 주워 담는 노인을 부러워하고.

2004년 10월 15일, 서해 간월도
2004년 10월 15일, 서해 간월도 ⓒ 이승열
2005년 10월13일 간월도에 물이 들어오고 있다.
2005년 10월13일 간월도에 물이 들어오고 있다. ⓒ 이승열
섬 속의 섬, 간월암 가는 길이 열려 있었다. 하루에 두 번씩 밀물 때만 섬이 되는 곳, 조선 건국에 참여한 무학대사가 천수만에서 돋는 달을 보고 깨우쳤다 하여 간월암(看月庵)이 되었다. 춤추는 학[舞鶴]을 더 이상 배움이 필요 없는 무학(無學)으로 바꾼 곳. 간월암 너머로 해가 지고 있다. 서해 먼 바다 속으로 침몰한 가을 해가 온 바다를 핏빛으로 만들고, 간월암은 저 혼자서 훨훨 타고 있다.

수덕호에는 아침에 건져 올린 대하가 긴 수염을 자랑하고 화덕에는 전어 굽는 냄새가 지글거리고 있었다. 몇 해 전 홍성으로 귀농했다는 K의 친구는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을 알고 있었다.

자연산 대하. 우유빛에 수염이 길고 턱이 좀 뾰족하다. 양식도 색깔이 비슷한 놈이 있다고 한다.
자연산 대하. 우유빛에 수염이 길고 턱이 좀 뾰족하다. 양식도 색깔이 비슷한 놈이 있다고 한다. ⓒ 이승열
대하 소금구이. 머리부분의 날카로운 껍질만 벗기고 모두 다 먹어야 한다.
대하 소금구이. 머리부분의 날카로운 껍질만 벗기고 모두 다 먹어야 한다. ⓒ 이승열
대명포구 출신에게 전수받은 대하의 변신 '취하' 막걸리에 잠깐 담가 두면 육질이 부드럽고 비린내가 없어진다.
대명포구 출신에게 전수받은 대하의 변신 '취하' 막걸리에 잠깐 담가 두면 육질이 부드럽고 비린내가 없어진다. ⓒ 이승열
서울에서 두 시간이나 달려온 곳에서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반갑고, 또 쓸쓸한 일이다. 세상의 인연에서 살짝 비껴나 새로운 세상, 새로운 사람들과 조우하고 싶은 아쉬움과 결국 내가 친한 인간들이 한 꺼풀 벗겨보면 결국 또 다른 나라는 안도감이 늘 공존한다.

나는 얽힌 인연을 신기해 하며 내가 존경하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처음 수덕호에서 만난, 귀농한 그니에게 전화를 바꿔주고, 그들은 '형님, 오랜만입니다'라고 말하고 오랜 시간 통화를 하며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서해바다도 사람들의 얼굴도 모두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서해바다도 사람들의 얼굴도 모두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 이승열
어찌 막걸리에 취하는 것이 인간뿐이랴. 양조장까지 달려가 말째 받아온 결성 막걸리에서는 진한 누룩 냄새가 났다. 어린 시절 양은 막걸리 주둥이에 대고 조금씩 음미했던 그 맛과 똑같았다. 혀에 감기는 맛과 목울대를 통과하는 진한 맛이 시종여일하다. 과연 전국 막걸리 품평회에서 2등을 차지했다는 명성 그대로이다.

생으로도 먹고, 소금구이도 해 먹고, 어떻게 먹어도 대하의 몸 속에서 갯벌 냄새가 났다. 대하를 먹는 동안 초보농부와 동료 K는 해가 지는 방파제에서 망둥어를 잡아왔다. 서해 먼 바다로 저녁 해가 '꼴깍'하고 떨어졌다.

간월도에서 만난 대하

자연산과 양식 대하의 구별법은 양식이 자연산에 비해 수염이 약간 길고, 턱이 뾰족하다는 것을 빼놓고는 없다고 합니다. 양식이 팔딱거리며 살아 있는 것에 반해, 자연산 대하는 성질이 급해 금방 죽기 때문에 자연산은 우리가 먹을 즈음이면 거의가 죽어 있습니다. 양식에 비해 자연산의 크기가 큰 이유는, 양식은 출하시기에 맞추느라 더 이상 키울 새가 없기 때문이랍니다.

맛과 영양은 거의 차이가 없으며 올해는 대풍이라 가격이 다른 해에 비해 싸다고 합니다. 전 미리 수덕호(한선덕)에 전화를 해 부탁해 놓아 자연산을 1kg에 3만5000원에 먹었는데, 수덕호 안주인의 배려인지, 적정 가격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전어구이와 괴불과 쭈구미탕을 먹었는데 모두에게 하는 서비스인지, 초보농부 덕인지 그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맛있게 먹은 대하는 어부인 한선덕씨 바깥양반이 아침 그물에서 건져 올린 것이라 하여 안심하고 생으로도 먹었습니다. 간월도에서는 대개 갯벌 위에 배에 앉아 구워 먹거나 생으로 먹는데 막걸리에 취한 취하도 색다른 맛입니다. 막걸리의 알코올이 대하 살 사이로 스며들며 부드럽고 비린내가 없는데, 역시 인간이나 생물이나 약간의 알코올은 삶을 편안하게 함을 다시 느낍니다.

서해안 고속도로가 개통되며 어느 곳과 마찬가지로 간월도도 좀 망가지긴 했지만, 그래도 간월암이 있어, 흔들리는 뱃전에서 대하와 겨울 새조개를 맛볼 수 있어 여전히 좋은 곳입니다. 전국에서 유행 중인 축제가 없어 다른 곳에 손님을 빼앗겨 문을 닫은 배도 있었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