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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겋게 물이 올라 있는 수수밭 수수입니다. 온통 세상이 빨간 물결을 이룬 듯 합니다. 이 수수 앞에 나를 비추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답답한 세상을 벗어나서 잠시 가을 들녘에 나가, 수수 앞에 고개를 숙이고 뭔가 깨달음을 얻었으면 합니다.
벌겋게 물이 올라 있는 수수밭 수수입니다. 온통 세상이 빨간 물결을 이룬 듯 합니다. 이 수수 앞에 나를 비추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답답한 세상을 벗어나서 잠시 가을 들녘에 나가, 수수 앞에 고개를 숙이고 뭔가 깨달음을 얻었으면 합니다. ⓒ 권성권
월악산 자락 가는 길옆에 많은 수수가 무르익고 있었습니다. 빨갛게 물이 차오른 수수가 하늘 높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습니다. 가을 하늘에 온통 새빨간 물감을 뿌려 놓은 듯 했습니다. 땅도 뒤질 새라 빨간 하늘빛을 받아들인 탓인지 온통 빨간 물결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곳곳에 가득 솟아올라 빨갛게 익어가고 있는 수수는 온 동네를 불타오르게 할 듯 한 기세였습니다.

벌써 수수를 걷어 들인 집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집안 작은 마당에는 수수 목 뭉치가 벌겋게 드러누워 있었습니다. 도로변에는 빨간 낟알들이 나란히 몸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하얀색 비늘에도 그리고 파란색 비늘에도 온통 빨간 수수가 깔려 있었습니다.

서 있는 수수는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키 재기하는 수수도 없었습니다. 먼지를 뒤집어썼다고 더러워 하는 수수도 없었습니다. 검게 타들어간 흠이 있어도 나무라는 수수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두 겹 더 포개 있어도 무겁다고 아우성치는 수수는 없었습니다. 검은 껍질을 덕지덕지 붙이고 있어도 그것을 털어내야 한다며 괴성을 지르는 수수도 없었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다들 간직할 뿐이었습니다.

이네들은 겨우내 매서운 추위들을 이겨낼 것입니다. 껍질을 한 겹 두 겹 뒤집어쓰고 있는 수수는 그런대로 추위를 잘 이겨낼 것입니다. 살이 깎인 듯한 수수도 다른 수수에 비해 힘이 더 들지만 그런대로 추위를 힘껏 견디어 낼 것입니다. 이네들은 서로 껍질이 되고 서로 살이 되어 살을 에는 듯한 추위 속에서도 거뜬히 이겨낼 것입니다.

정월이 되면 이네들은 오곡밥에 제 몸을 던질 것입니다. 찹쌀과 조와 팥과 검은콩과 어울려 한 몸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전혀 다른 곡물들이지만 정월에 빚어내는 오곡밥에 모두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키 큰 수수가 높은 윗자리를 차지하는 법도 없을 것입니다. 검붉은 밥알 색깔을 더욱 멋지게 드러냈다며 자랑하거나 내세우는 법도 없을 것입니다. 오곡밥 별미에 제 한 몸 바친 것으로 그저 흐뭇해하며 만족할 것입니다.

낟알을 다 떨어낸 수수도 그 쓰임새가 없지 않습니다. 낟알은 낟알대로 몸통은 몸통대로 그리고 깃털은 깃털대로 쓰이기 마련입니다. 낟알이 오곡밥이 된다면 몸통은 때로 먹성 좋은 소나 돼지에게 좋은 먹을 거리가 됩니다. 깃털도 그 나름대로 쓸모가 없지 않습니다. 방안 구석구석을 쓸고 나가는 빗자루가 되기 때문입니다. 어디 하나 버릴 데 없는 것이 있다면 이 수수가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 나라에는 수수 같은 빨간색 이념을 두고서 적지 않은 문제를 만들고 있습니다. 서로 얼굴을 붉히고 헐뜯고 있습니다. 지나친 비약일 수 있겠지만 그네들이 수수가 들어간 오곡밥을 들여다본다면 어느 정도 참된 본질을 헤아릴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자연을 보고서도 얼마든지 일을 풀어나가는 순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수를 뺀 오곡밥은 우리나라에서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색깔이 독특해서가 아니라 오곡밥이 지닌 본질 때문입니다. 찹쌀과 조와 팥과 검은콩과 수수가 한데 섞일 때에만 참된 맛을 가능하게 해 줍니다. 그렇다고 수수가 그 모든 것을 독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오곡밥을 만들어 내는 데에 기꺼이 한 몸을 희생한다는 각오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에서 더 지나친다면 오만이요 독선입니다. 이에는 검찰도 결코 다르지 않고, 그 어떤 정치인도 다르지 않습니다.

수수는 빨간색입니다. 팥도 빨간색입니다. 검은콩은 검은색입니다. 찹쌀은 하얀색에 가깝습니다. 조는 녹색에 가깝습니다. 다 다른 색을 지니고 있지만, 오곡밥 안에서만큼은 검붉은색을 띠게 됩니다. 한일 월드컵 때에도 붉은색 옷이 나부꼈고 온통 세상이 붉은 물결이었습니다. 이념이라는 옹졸한 울타리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여, 아직도 색깔에 붙잡혀 있다면 가을 들녘에 나가 수수 앞에 고개를 숙였으면 합니다. 그러면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더욱이 수수가 오곡밥에 희생할 때만이 참된 맛을 낼 수 있듯이, 인생은 자기를 희생할 때만이 그 조직과 사회 그리고 그 나라에 참된 맛을 낼 수 있다는 깨달음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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