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들깨 말가웃을 털었다. 고향 향기가 온 몸에 스며들었다.
들깨 말가웃을 털었다. 고향 향기가 온 몸에 스며들었다. ⓒ 김규환
남들이 심으니까 덩달아 심은 들깨를 털었다. 수확이 제법 쏠쏠하다. 나도 이제 들깨 농사는 손에 익었다 싶을 정도로 빠삭해졌으니 들깨가루와 들깨기름, 들깻잎 걱정은 덜었다.

밭 옆에 사시는 할머니께 씨앗을 얻어 모를 흠뻑 부어 놓으니 풀 반, 들깨 반이었다. 우리 들깨는 이웃집보다 사나흘은 늦다. 며칠 지나자 옆 밭에 자란 걸 금방 따라간다.

가평군 설악면 유명산 일대는 들깨 하나는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들깨 농사를 잘 짓는 곳이다. 뿐만 아니라 웬만한 밭곡식은 거들떠 보지도 않으면서 유난히 이 작물은 많이 심는 지역이다.

일단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초여름 날을 잡아 들깨 모종을 뽑아 갈아둔 밭이든, 빈 땅이든 호미 하나 달랑 메고 나선다. 같은 날 동일한 조건에서 자란 싹이지만 키는 제각각이다. 큰 것은 팔뚝 길이로 길고 자잘한 것은 한 뼘도 채 되지 않는다.

심는 기술도 특별하다. 반대라고 보면 맞다. 대개 뿌리에 초점을 맞춰 정열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여기는 전혀 그렇지 않다. 땅을 득득 파고 줄기 위쪽을 기준으로 나란히 길이를 맞춘다.

깨 모를 반 되 가량 부으니 넉넉했다.
깨 모를 반 되 가량 부으니 넉넉했다. ⓒ 김규환
세 개를 한 포기로 하여 뿌리는 상관없이 옆으로 뉘이고 대충 파헤쳐진 흙을 덮는다. 상식을 뒤엎는 방식으로 심다 보니 심은 뒤에 타 지역 사람들이 보면 키가 똑같은 걸 심어 놓은 듯한 착각을 하기 쉽다. 위에서 보면 일정한 길이지만 땅에 묻힌 길이는 모두 다르다.

여기에 첫 번째 비밀이 숨어 있다. 긴 것은 마디마디마다 뿌리가 돋는다. 새로 돋은 하얀 뿌리가 물과 거름을 듬뿍 빨아들여 일취월장 자란다. 여기에 세 개를 한 포기로 했기 때문에 자기 영역에서 경쟁을 치열하게 하기 위해 뒤처진 모종도 금방 뒤따라 온다.

결정적인 건 꼭대기 길이가 거의 같기 때문에 얼마만 지나면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자라는 속도가 엇비슷해진다. 심는 폭도 두 자 가까이 된다. 거리가 넓어 초기엔 세 개가 콩나물처럼 위로만 뽀르르 올라가지 않고 옆으로 가지를 맘껏 펼쳐서 자란다.

잎 길이를 맞춘다. 뿌리 길이는 달라도 상관없다. 이렇게 심으면 서로 거들면서 커간다.
잎 길이를 맞춘다. 뿌리 길이는 달라도 상관없다. 이렇게 심으면 서로 거들면서 커간다. ⓒ 김규환
한 포기에 심어진 세 그루는 서로 경쟁을 하다가도 행여 넘어질세라 붙잡아 준다. 마파람이나 태풍에도 끄덕하지 않고 어른 키만큼 크고 한 포기에 낫으로 베면 한 깎지가 되니 탐스럽기 그지없다.

들깻잎깨나 뜯어다 먹었던 여름은 갔다

깻잎은 무엇인가? 깨라 하면 참깨도 있고 흰깨도 있다. 색깔이 까만 흑임자, 검은깨도 있다. 그런데 그 잎을 먹을 수는 있는 걸까? 답은 "아니다" 올시다. 참깨 무리의 깨소금 만드는 깨는 잎을 먹지 않는다.

보통 깻잎이라면 들깨의 잎을 말하는데 요즘 주부들은 도회지에서 자란 탓에 들깨가 들깻잎 즉, 깻잎을 만들어낸다는 걸 모르고 "들깻잎 사오라"고 시키면 어리둥절 무얼 사와야 할지 막막해하는지라 잠깐 짚고 넘어가는 이 사람의 친절함을 탓하지 말라.

하여튼 여름 내내 깻잎을 따먹었다. 직접 기른 밭일을 마치는 해질 무렵 한 장 한 장 정성스레 따서 100장 단위로 풀을 뜯어 묶어 이웃과 나눠 먹는 재미가 값싼 농작물로 인심 놓치지 않는 비결 하나는 가르쳐 줬다.

시장에서 산 것은 뒤쪽에 붉은 반점이 없이 말끔한 까닭을 농사를 한 번이라도 지어본 사람들은 안다. 우리 것도 마찬가지였지만 농약을 치지 않으면 으레 그렇다며 걱정 붙들어 매고 먹으라니 감사히 먹겠다고들 했다.

향기 진해져 사람 손길을 기다리는 가을 들깨

실컷 깻잎을 따먹어도 이렇게 튼실하게 꽃이 피었다. 자못 수확철이 기대가 되었는데...
실컷 깻잎을 따먹어도 이렇게 튼실하게 꽃이 피었다. 자못 수확철이 기대가 되었는데... ⓒ 김규환
계절의 변화는 속일 수 없는지 땡볕이 물러가고 선선한 가을 바람이 불어오자 줄기와 마디가 굵어지고 들깻잎이 석양 길고 붉은 빛을 받으면 반쯤은 투명해진다. 아쉽지만 이제 바쁘게 살아온 들깨도 일생을 마치고 다음을 위해 꽃을 피울 준비를 한다. 하얗고 조그만 꽃이 다닥다닥 핀다.

잎이 작아지면서 품고 있던 양분을 꽃으로 열매로 나르기 바쁘다. 이즈음 밭에 들어가 보면 코를 찌르는 향긋한 냄새가 풍긴다. 이젠 만지지도 말고 향기만 맡으라는 건가. 며칠을 기다려 파랗던 잎에 노란 단풍이 들기 시작하면 때를 놓칠라 조급해지는 게 사람 마음이다. 콩잎이나 들깻잎 쇤 것을 바구니에 듬뿍 따서 장아찌에 박아야 하니 말이다.

온통 들깨 몸뚱아리와 가지, 잎은 노랗다. 긴 자루엔 자잘한 씨앗 주머니끼리 부딪혀 사각사각 하늬바람 소리보다 더 건조하다. 향이 어찌나 진하던지 벌레가 뜯어먹을 마음도 포기했는가. '마지막 잎새'를 매달고 황금물결 남실거릴 때 사람 손길을 기다린다.

비도 띄엄띄엄 오는지라 낫을 갈아 밭으로 간다. '과연 얼마나 날까?' 일단 무성히 자란 줄기가 몇 깎지가 되느냐에 따라 쏟아져 나오는 양도 많은 법, 한 줌 두 줌 한 알갱이도 빠지지 않게 조심조심 성질 다칠라 애지중지 다룬다.

잎이 누렇게 되면 깻잎을 따서 장아찌에 넣고 며칠 기다렸다가 베어서 땅 위에 말린다.
잎이 누렇게 되면 깻잎을 따서 장아찌에 넣고 며칠 기다렸다가 베어서 땅 위에 말린다. ⓒ 김규환
들깨 향은 징그럽게 진해졌다. 차곡차곡 쌓아두고 이삼일 "비만 오지 마라" 빌어 주면 까슬까슬 마르지. 광목이 없으면 이불보, 커튼이라도 걷어갈까? 에라, 모르겠다. 텐트 덮개를 실어 밭에 나가 보니 벌써 이웃 밭엔 어제부터 털었는지 아침엔 키로 검불을 까불고 있었다.

차를 멈춰 차창을 열고 "어떻습니까? 많이 났어요?" 물으니 예상만큼은 아닌 듯 "별로예요"라고 한다. 300평이 넘으면 쏠쏠히 났을 건데 겸손하게 대답한 것이라 생각하고 밭으로 갔다.

밭 앞에 사시는 할머니는 어제 다 일을 마친 듯 물에 씻고 일어서 햇볕에 말리고 있었다. 보자기를 챙길 필요도 없이 어제 작업 현장에 있는 포장을 빌려 쓰마고 부탁을 드렸더니 흔쾌히 빌려 주신다.

들깨 말가웃 털어 즐겁게 먹을 상상을 하며

막대기로 조심히 때리다가 나중엔 마구 후려치자 내 땀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막대기로 조심히 때리다가 나중엔 마구 후려치자 내 땀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 김규환
아래에서 윗밭으로 옮겼다. 아직 이슬이 깨지 않아 떨어지지는 않아 다행이다. 한 숨 마르라고 배추밭을 둘러보고 갓을 솎는 데 한 시간여를 허비했다. 옆에 있던 막대기를 주워 한 깎지 들고 살살 내리쳤다.

"후두둑." 내가 흘렸던 여름날 땀방울이 쏟아지듯, 양철 차양에 우박이 쏟아진 듯 요란하다. 서너 번 치고 나서는 사정없이 후들겼다(후들기다: 마구 흔들어 주다의 전라도 사투리 및 북한 표준말). 뒤집어서도 위 아래로 번갈아가며 털어냈다.

생각 같이 많은 양이 쏟아지지는 않았다. 덜 마른 걸까. 한 쪽으로 치워 두고 다음 일을 서두른다. 일이든 놀이든 간에 혼자서는 재미가 없다. 십여 분이나 지났을까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몇 되나 나올까 실망이 먼저였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하면 할수록 무겁고 더디기만 했다.

줄기와 씨앗을 싸고 있는 부분이 덜 말라 기다렸다가 한 번 더 털고 나니 힘이 쭉 빠졌다.
줄기와 씨앗을 싸고 있는 부분이 덜 말라 기다렸다가 한 번 더 털고 나니 힘이 쭉 빠졌다. ⓒ 김규환
전날 집에 온 손님께 집에 있던 걸 마구 퍼준 게 후회스러웠지만 물 건너 간 것, 하던 일을 계속했다. 시간이 흐르고 배도 고파 도시락을 꺼내 먹고 오후를 꼬박 보냈다. 바싹 마르지 않아 다시 털고 나니 서쪽 앞산에 가려 해가 나올 줄을 모르고 이내 어두워졌다.

서울 집으로 돌아올 생각을 하면 착잡하다. 검불을 걷어 내고 담아 보니 한 말이나 되었다. 예상보다 많은 수확이었다. 구경 나온 이웃 밭주인들도 밭떼기는 얼마 되지 않지만 꽤나 많이 나왔단다. 더구나 열매가 실해서 탱글탱글 하다고 한다. 내가 봐도 옹골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들기름을 짤 분량은 아니라 들깨강정이나 만들고 한 두 되는 빻아서 찌개와 나물 무칠 때 넣을 생각을 하니 올 한 해 농사가 한가지로 많은 양은 아니지만 빠지지 않고 거뒀으니 뿌듯하다. 이제 잘 말려 내년까지 두고두고 먹으리라. 지금 우리 집엔 들국화와 들깨 향기가 방안 가득 빼곡히 차 있다.

한 말 정도만 더 나왔더라면 들기름을 짜서 묵나물에 무쳐 먹으련만. 강정이나 푸짐하게 해서 먹어야겠다. 사진처럼 나물에 들깨가루를 빻아 뿌리면 맛이 상쾌해진다.
한 말 정도만 더 나왔더라면 들기름을 짜서 묵나물에 무쳐 먹으련만. 강정이나 푸짐하게 해서 먹어야겠다. 사진처럼 나물에 들깨가루를 빻아 뿌리면 맛이 상쾌해진다. ⓒ 김규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이 기자의 최신기사역시, 가을엔 추어탕이지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