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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겉그림
책 겉그림 ⓒ 갈라파고스
한낱 신화와 전설 속에 묻혀 버린 트로이 유적을 세상 밖으로 끌어낸 사람이 있다. 하인리히 슐리만이 그다. 그는 트로이와 미케네, 그리고 티린스 유적을 직접 발굴해 냈다. 그래서 선사 고고학을 이야기할 때면 어김없이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만큼 지중해 일대의 역사를 밝히는 데 그는 지대한 기여를 했고, 그래서 지중해 역사에서 신화와 같은 존재가 됐다.

그런 그가 1864년 여름부터 1866년 봄까지 20개월 동안 튀니스, 이집트, 인도, 자바, 청나라, 그리고 일본 등을 여행했다. 어떻게 보면 세계 일주나 다름없는 것인데, 그 여행길은 1868년 트로이 유적지를 답사하기 위해 그리스로 가기 몇 년 전에 둘러 본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1865년 일본에서 샌프란시스코로 되돌아가는 50일간의 길고 외로운 항해 기간 동안 청나라에서 2개월을, 일본에서 3주간을 머물렀는데, 그 기간 동안 쓴 일기를 모아서 기행문으로 남긴 게 있다. 바로 <150년 전 청일을 가다>(이승희 옮김·갈라파고스·2005)가 그것이다.

"1865년 봄에도 여전히 슐리만과 같은 외국인이 통행증 없이, 다시 말해서 미국 공사의 초대장 없이, 그리고 다섯 명으로 구성된 일본 무사들의 보호 없이 일본을 여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때 슐리만이 보여준 태평스러운 태도는 주목할 만하다. 이런 위험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외국 공사들에 대한 일본인의 암살 시도와 습격 등- 지적 욕구와 호기심 때문에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 머리말


19세기 중반 극동에 있는 나라를 찾는 서구인들이야 고작 외교관, 선교사, 그리고 장사꾼들로 한정됐다. 그런데도 슐리만은 그런 직책을 갖고 중국과 일본을 방문한 게 아니었다. 단지 여행만을 목적으로 그들 두 나라를 방문했던 사람이다. 그 당시 청나라와 일본이 서구의 압력을 받고 있던 터라 국내외적으로 사회적인 혼란이 극심했던 상황임을 감안한다면, 그의 두 나라 여행기는 무모하리만큼 도발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이야 중국의 만리장성과 자금성은 중국에서도 제일로 손꼽히는 관광지가 됐다. 그러나 19세기만 해도 그 사정은 달랐다. 온통 거리에는 도박에 환장한 막일꾼들로 넘쳐났고, 대부분 넝마 쪼가리만 몸에 걸치고 있는 걸인들로 우글거렸다. 더욱이 그 거리마저도 제대로 닦여 있거나 반듯한 것도 아니었으며, 퇴락한 청나라를 그대로 보여주듯 모든 것이 기울어진 상태였다.

그런 모습을 보고서 그가 느낀 것은 무엇이었을까? 위대하고 창조적이었지만 허물어진 만리장성을 보고, 쇠락해 가는 자금성을 보고, 거리에 넘쳐나는 아편중독자와 거지 떼들, 그리고 허물어져 있는 집들로 가득 차 있는 베이징 거리를 보고 그는 무엇을 느꼈을까?

아무리 위대하고 휘황찬란한 역사의 자랑거리라 할지라도 그 속에 부패와 퇴폐가 만연해 있다면 결국은 얼마 못가서 퇴락하게 된다는, 그 살아있는 증거를 그의 몸으로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만리장성은 수 세기 동안 소홀하게 방치되었다. 돈대의 총안에는 수비병은 간 데 없고 평화롭게 노니는 비둘기는 둥지를 틀고 있다. 성벽은 위험하지 않은 도마뱀들로 우글거리고 노란색, 보라색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봄을 알리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만리장성은 인간의 손으로 지어진 것 중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물이다. 하지만 지금은 위대했던 과거의 묘비가 되어, 장성을 가로지르는 협곡에서 그리고 장성을 뚫고 지나가는 구름 속에서 청나라의 몰락을 가져 온 부패와 퇴폐에 대하여 침묵으로 항의하고 있다."
- 64쪽


청나라를 둘러 본 슐리만은 그렇듯 비판적이고 조금은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된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에 대해서는 그래도 우호적이고 호의적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아마도 암스테르담에 있는 무역회사에서 사환으로 있을 때부터, 그의 마음 속에 이미 일본을 동경하고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그만큼 가보고 싶었던 나라였던 만큼 일본은 그에게 인상 깊은 나라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막상 일본을 둘러 본 그에게 일본의 혼욕문화와 유곽과 공창들은 너무나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더군다나 서구 열강과 수호통상조약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외교대표부나 그들의 방문객들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에도'를 방문할 수 없도록, 문을 걸어 잠근 것은 그에게 두 얼굴의 나라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다.

"남녀가 공중목욕탕을 함께 이용하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모든 연령층을 막론하고 여인네들이 도색적인 장면을 보면서 저렇게 즐거워하는 민족의 삶에서 어떻게 그런 청결함과 성스러운 감정이 생겨날 수 있는지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 159쪽


150년 전, 독일인 슐리만에게 비춰졌던 중국과 일본의 역사와 문화. 그것은 부패와 퇴폐의 역사는 결국 쇠락해진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고, 겉과 속이 다른 두 얼굴의 나라는 결코 다른 나라, 이방인에게 호감을 줄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부패와 퇴폐의 모습 없이, 두 얼굴을 하는 모습 없이, 투명과 정직을 이끌어 가는 나라라야 그 어떤 이방인이 되었든지 간에, 그 어떤 이방나라가 되었던지 간에 사랑과 존경을 받을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렇다면 150년 후, 이방인과 이방 나라에 비춰질 우리나라의 모습은 또 어떠해야 할지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고고학자 슐리만 150년 전 청일을 가다

하인리히 슐리만 지음, 이승희 옮김, 갈라파고스(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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