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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재판을 받았던 갈릴레오 갈릴레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우리는 중세 기독교의 왜곡된 사고 방식에 비웃음을 보낸다. 재판관 앞에서는 사실상의 사상 전향 의사를 밝히며 다소 비겁한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법정을 나오며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한 갈릴레이의 말은 언제 들어도 그렇게 멋질 수가 없다.

매우 비합리적인 종교적인 가치로 학자로서의 양심적인 학문의 영역을 재단하려고 한 중세교회의 경직성은 수백 년간 이성적인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했다.

이때만 하더라도 종교적 논리는 집권의 논리, 통치의 논리와 일치했다. 사람들은 종교적 교리라는 명목으로 통치 당했고, 종교 재판은 집권자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에게 '마녀'라는 딱지를 붙여 처단하는 가장 손쉬운 도구였다.

종교적 맹목적 믿음이 강요되는 시대는 벌써 수백 년 전에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2005년 대한민국은 중세의 종교 재판과 별로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반공이라는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하고 있는 2005년 대한민국의 모습이 그러하다. 반공의 믿음은 지난 50여 년간 대한민국의 가장 강력한 통치를 위한 도구였다. 중세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이성적인 판단은 철저하게 금지됐으며, 반공 메시지가 주는 맹목적 믿음만을 수용해야 했다. 그것을 조금이라도 어기는 사람에게는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여 처단하는 매우 손쉬운 통치 도구였다.

우리는 교과서에 나오는 갈릴레이의 모습을 보면서 중세의 종교적 권위에 대해서 조소를 보낸다. 하지만 2005년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비합리적인 종교재판관과 같은 논리로 접근한다.

강정구 교수의 발언이 학문적으로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의 발언에 대해서 사법적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중세시대의 종교재판과 전혀 다를 바 없다.

통치 질서를 위한 맹목적 반공 논리와 조금 다르다고 해서 독창적인 연구 업적을 쌓은 학자를 마녀와 같이 취급하는 우리 사회는 결코 정상적이지 않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성경에도 나오지 않는 천동설을 부정했다는 이유만으로 화형을 당할 뻔했다. 2005년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대한민국에서 맹목적인 통치 이데올로기를 부정한다면 그는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죽음을 선고한 통치자는 전 세계로부터 인류가 지속되는 동안 조롱의 대상이 될 것이다.

강정구 교수를 비롯한 국가보안법과 관련된 일련의 논쟁을 보면서 찹찹한 마음을 금할길이 없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맹목적인 반공의 믿음에 대한 맹신이 팽배해 있음을 느낀다.

사상의 자유와 학문의 자유의 관점이 아니더라도, 국가보안법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반공의 맹목적 믿음을 주입 시키지 않더라도 남한의 시스템과 자유민주주의는 북쪽의 그것보다 우월한 것은 명백하게 입증됐다. 그런 사람이 있지도 않겠지만, 혹시라도 남한의 체제를 위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시스템은 결코 쉽게 무너지거나 위협받지 않는다. 누구라도 우리의 시스템이 우월함이 수십년간 검증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인 맹목적 믿음을 강요하는 국가보안법이 2005년 대한민국에 필요할까? 갈렐레오 갈릴레이에게 물어볼 일이다.

덧붙이는 글 | 뉴스앤조이에도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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