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목포 북항에서 바라본 압해도
목포 북항에서 바라본 압해도 ⓒ 김준

능창의 해상세력이 장악했다는 압해도 바다(송공리)
능창의 해상세력이 장악했다는 압해도 바다(송공리) ⓒ 김준
세기의 영웅들 압해바다에 모이다

서남해에 위치한 무안, 영암, 해남, 강진, 장흥은 조선이나 고려시대보다 통일신라나 그 이전인 마한 혹은 삼국시대에 훨씬 비중이 컸다고 한다. 그 이유는 해상교역로(해로) 때문이었다. 섬과 섬, 섬과 육지 사이를 지나는 해로는 고대 문화의 이동로였다. 서남해는 중국과 일본 그리고 우리 나라의 문화가 교류되는 장소였다. 통일신라시대 당나라로, 고려시대 송나라로 건너가 학문을 익혔던 유학생(이들 중 책사가 된 이들이 많다)들과 일본의 학승, 선종 사찰이나 청자문화도 이 바닷길이 있어 가능했다. 이는 신안 해저 유물을 비롯해 고대선박의 발굴에서 확인되었다.

항해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탓에 육지에 연해 뱃길이 마련되었다. 서남해의 뱃길이 중요한 것은 일본열도, 남해와 제주에서 오는 물산이 모두 이곳을 통과해야 하고, 심지어는 동해의 것들도 경강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이곳을 통과해야 했다. 그런 탓인지 영산강 일대에서는 다량의 지석묘, 독자적 세력의 거점으로 추정되는 옹관묘와 고분 등이 발견되고 있다.

영산강 하구와 서해가 만나는 압해도의 바다를 장악하는 것은 나주를 비롯한 목포와 무안, 해남까지를 아우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호남을 장악할 수 있는 거점이 되는 셈이다. 영산강 방조제가 만들어지기 전 최근까지도 이곳은 목포, 영암, 무안, 함평, 나주의 영산포에 이르는 육로와 해로를 연결하는 중요한 수로였다.

이렇게 서남해의 해로가 중요한 탓에 신라말 고려초(‘나말여초’라 칭함)에는 왕건과 견훤세력이 일전을 벌이고, 몽고의 삼별초나 일본정벌의 전초기자 역할을 했던 곳도 이곳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 종영된 <불멸의 이순신>의 역사적 배경이 된 곳도 바로 이곳이다. TV드라마 <왕건>을 통해 대중들에게 알려진 ‘능창’, 그의 별명은 수달이다. 물길을 잘 알고 수전에 능했다는 그에 대한 이야기는 <고려사>에 이렇게 적고 있다.

(왕건은) 드디어 광주 서남계(西南界) 반남현(반남현) 포구에 이르러 첩자를 적의 경계에 놓았더니 압해현의 적수 능창이 해도 출신으로 수전을 잘하여 수달이라 하였는데 도망친 자들을 불러 모으고 갈초도의 소적들과 결탁하여 태조(왕건)가 이르기를 기다려 그를 맞아 해치고 하였다. 태조가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능창이 이미 내가 올 것을 알고서 반드시 도적과 함께 변란을 꾀할 것이니 적도(적도)가 비록 소수라고 하더라도 마약에 힘을 아우르고 세력을 합하여 앞을 막고 뒤를 끊으면 승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이다. 헤엄을 잘 치는 자 10여 인으로 하여금 갑옷을 입고 창을 가지고 작은 배로 밤중에 갈초도 나룻가에 나아가 왕래하며 일을 꾸미는 자를 사로잡아서 그 꾀하는 일을 막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니 제장이 다 이 말을 따랐다. 과연 조그마한 배에 탄자가 있어 잡아보니 바로 능창이었다. 궁예에게 잡아 보내었더니 궁예가 크게 기뻐하여 능창의 얼굴에 침을 뱉고 말하기를 “해적(해적)들은 모두 너를 추대하여 괴수라고 하였으나 이제 포로가 되었으니 어찌 나의 신묘한 계책이 아니겠느냐” 하며 여러 사람 앞에서 목 베였다.


압해도의 연륙공사가 완료되면 목포시에 위치해 있는 신안군청이 압해도로 이전한다. 역사적으로 압해도가 신안의 중심지가 된 적이 있었다. <삼국사기> 지리지(地理地) 3 부분에는, ‘압해군은 본시 백제의 아차산현(阿次山縣)으로, 경덕왕이 개명하여 지금도(고려) 그대로 하고 있다. 영현은 셋이다’라고 적고 있다. 압해군에 속한 현은 셋으로 육창현, 임치현, 장산현을 거느리고 있었다. 육창현은 지금의 ‘영광 남면 남창리’나 ‘고이도’, 임치현은 ‘지도(임자도)’로 추정하며, 장산현은 지금의 ‘장산도’를 말한다.

즉, 지금의 무안과 영광 일대의 해안의 행정의 중심이었던 셈이다. 이후 여말선초에는 나주, 영광에 예속 편입되었다. 거대한 행정체계에 예속된 이유 중 필자의 관심을 끄는 것은 왕건이 반도의 서남부를 세력에 넣기 위해서 최후의 거점인 ‘나주’를 아울러야 하는데, 이때 먼저 장악해야 할 배후 세력 ‘해도’ 즉 해상세력이었다는 점이다.

당시 나주는 왕건의 두 번째 부인 장화왕후의 아버지 오다련 세력의 근거지였다. 잘 알려진 것처럼 왕건이 서남해를 장악한 것은 일찍 해상세력에 기반으로 힘을 키운 점과 결혼을 통해 지역 토호들을 포섭한 전략 때문이었다. 드라마 <태조왕건>에서도 그려졌듯이 견훤이 그렇게 장악하려 했던 서남해 지역은 왕건의 ‘혼인’ 전략으로 나주를 거점으로 여러 군현을 복속시켰다.

<고려사>에는 오다련의 딸이 포구의 용이 자신의 뱃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고, 왕건은 영산강 하구에서 오색이 감도는 천상에서 빨래하는 오씨녀를 발견하여 동침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낳은 왕이 고려의 혜종이다. 현 나주시청 앞 완사천에는 왕건과 오씨녀가 만난 우물과 바가지로 물을 주며 띄워주었다는 버드나무가 심어져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그곳에 왕건과 오씨녀가 만나는 조형물을 완사천 주위에 세우기도 했다.

왕건과 오씨녀가 만났다는 완사천(나주 시청 앞)
왕건과 오씨녀가 만났다는 완사천(나주 시청 앞) ⓒ 김준

왕건과 오씨녀의 만남을 상징하는 조형물(완사천 옆)
왕건과 오씨녀의 만남을 상징하는 조형물(완사천 옆) ⓒ 김준

압해도에서 시작된 뱃길은 완산천 아래 영산포에 까지 이어진다. 당시에 이곳에 '목포'라는 포구가 있었다고 전한다.
압해도에서 시작된 뱃길은 완산천 아래 영산포에 까지 이어진다. 당시에 이곳에 '목포'라는 포구가 있었다고 전한다. ⓒ 김준
‘반 육지’ ‘온 육지’되면?

그렇다고 바다와 섬의 세력들이 모두 고려에 복속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압해도를 비롯한 인근 고이도 등에 크고 작은 해도세력들은 틈틈이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수달을 비롯해 나주 즉 영산강 하류의 해상세력을 장악한 왕건은 즉시(940) 도서지역의 군과 현들을 자신이 믿을 수 있는 나주관할로 예속시켰던 것이다. 행정구역 개편 및 행정기관의 이전을 통한 관리와 통제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 같다. 도청이 광주에서 무안으로 옮겨가고, 신안군청이 목포에서 더부살이를 하다 연륙이 되면 압해도의 새 집으로 이사를 한다.

왜 당시 영웅들은 서남해 특히 영산강 하류의 압해도 일대의 바다와 섬을 장악하려 했을까. 육로가 ‘통’ 하지 않았던 시절에 바닷길은 물산은 물론 학문과 문화가 소통하는 고속도로였다. 특히 서남해의 물산의 중심지이자 내륙교통로였던 영산강 주변에 살던 고대인들이 대외교류를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했던 곳, 우리 나라는 물론 일본이 학자와 고승들이 중국을 가기 위해서도 반드시 압해도의 해로를 거쳐야 했다.

바다를 딛고(압해, 壓海) 서남해 해상세력을 장악한 능창(일명 ‘수달’)의 기반이 되었던 곳도 압해도였다. 물길에 능하고, 수전에서 패하지 않아 ‘수달’이라고 했다는데 당시 왕건과 견훤 그리고 압해도의 능창이 서남해 해상을 아우르려고 했던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압해도 인근에 구전되는 설화 속에서도 송장군, 왕장군, 나송대 등이 설화 속에 중앙정부에 저항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이중 송장군과 관련된 설화가 많이 등장하는데 송장군이 매화도에서 말을 타고 달려가다 꽂은 지팡이가 도창리의 입석으로 ‘장사주렁’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 뿐만 아니다 송장군이 태어난 마을이라는 송공리의 뒤 송공산의 바위굴에서 바위를 밀치고 송장군이 태어나면서 바위에 큼지막한 손자국과 발자국이 있었다고 한다. 송장군은 조운선의 곡식을 털어 주민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고 전한다.

ⓒ 김준
그 지팡이는 압해도 동서리 도창마을에서 조찬마을로 넘어가는 길 중간 구릉에 하늘로 치솟아 있다. 높이 4.8m. 길이 2.96m, 두께가 0.5m에 이르는 이 선돌을 주민들은 ‘송장수 지팡이’로 기억하고 있다. 또 다른 전언에 따르면 ‘송장수가 무술을 연마하던 중 휘하에 있는 병사 한 명이 죽은 일이 있었다. 송장수는 석곽에 그의 시신과 무기를 넣고 매장한 뒤 그 위치를 표시하기 위해 선돌을 세웠다’고 전하고 있다도 한다. 그리고 인근 고이도에는 고려의 건국에 저항한 태조의 친척 왕장군 산성을 쌓고 자리를 잡았고, 유달산에서 나주를 근거지로 한 나송대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관군에 잡혀 죽었다는 이야기들도 전한다.

이 뱃길을 경계로 윗섬과 아래섬이 나뉜다. 윗섬은 압해도, 증도, 임자도를 말하며, 아랫섬은 암태, 자은, 비금, 도초, 하의, 장산 등이다. 이들 간에는 통혼권도 구분되며, 일상생활도 차이를 보이고 있다. 윗섬 사람들은 육지와 가까기 때문에 육지문화에 많이 동화되었으며, 이런 탓에 ‘아랫섬’을 하대하는 경향도 보인다.

ⓒ 김준

ⓒ 김준
목포 산정동에서 압해도를 연결하는 ‘압해대교’가 애초의 계획보다 2년 늦춰 2007년 완공을 목표로 공사가 진행 중이다. 그리고 압해와 지도를 연결하는 ‘운남대교’가 착공되었다. 이렇게 연결된 도로는 서해고속도로에서 곧장 압해도를 돌아 무안국제공항과 연결될 것이란다.

이러한 개발계획에 대해서 주민들은 ‘기대 반 우려 반’이다. 지금도 1천원(차량 3500원)만 내면 철부선 4척이 무시로 연달아 운항 중이기 때문에 교통이 크게 불편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선이 끊기고 나서 급한 일(병원)이 생겼을 때는 덕을 보겠지만, 육지 사람들이 와서 쓰레기 말고 뭘 두고 가겠느냐는 것이다.

반면에 신안군청이 들어오고 이곳이 발전할 것이라는 기대를 거는 사람들도 있다. 연륙이 된다면 목포 북항과 차로 3분 거리도 안 될 터인데 누가 이곳에 머무르며 돈을 쓸까 의심스럽다. 갯일을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나마 남아 있는 바다와 갯벌이 훼손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연륙이 되면 ‘반 육지’가 ‘온 육지’되어 해양신도시로 부활할까? 이곳도 논밭과 집터를 제외하고 목 좋은 곳은 이미 외지인들이 자리를 잡았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곳이라면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갯벌’뿐이다. 게르마늄 갯벌로 알려진 그곳이 어민들에게 생계터전이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