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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낡은 코카콜라 파라솔 하나와 낡은 의자 한 개. 몸뻬, 얼룩덜룩한 옷가지들. 어느 것 하나 값나가 보이는 건 없습니다. 비뚤비뚤한 글씨로 쓴 한 개에 7000원이라는 가격표를 빼면 이곳이 옷을 파는 곳인지, 아니면 입던 걸 갖다 놓은 곳인지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분명 갓난 아기 손주라도 한 둘 있어 보이는 외모인데 그렇다고 할머니라고 하기엔 경망스러울, 오륙십은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의 길거리 옷가겝니다.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 뒤편에 작은 공터가 하나 있습니다. 근처에 오는 슈퍼 이용자들이 차도 세우는 일을 빼면 거의 잡초밭이지요. 도시 같으면 이렇게 땅이 놀 리가 없겠지만 이곳은 시골이니까. 제 아이가 다니는 피아노학원을 가려면 그 공터를 지나야 합니다.

아파트촌이면 젊은이들이 많을텐데 몸뻬라니. 그래서 그런지 지나면서 봐도 옷이 팔리는 건 못 본 것 같습니다. 그저 나의 노년은 저런 모습이 아니길, 내가 복이 없다고 해도 저렇게 생을 이어가는 것만 면하게 된다면 내 삶을 축복이라 생각하고 살리라, 가끔 지나면서 이런 생각은 했더랬습니다.

하지만 앞날의 삶을 장담할 수 없고 현재가 미래를 담보하지 못하는데 나의 이런 생각이 씨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입을 막아보기도 하고, 아무튼 그 아주머니의 옷가게를 지날 때마다 까닭모를 불길함이 생기는 건 제가 심약해서 그럴 겁니다.

그저께. 금세라도 비가 올 듯한 하늘. 마침 한가로워 아이의 피아노학원 가는 길을 빙자해 산책을 나섰습니다. 가을바람은 낙엽보다 더한 을씨년스러움을 뿌리고 지나 다녔습니다. 아주머니의 파라솔 퍼덕이는 소리만 아니었어도 브람스나 흥얼거리며 지났을지도 몰랐는데.

비가 흩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점차 맹렬해지는. 바람이 부는데다 서늘한 기운까지 있어서 아주머니는 두 손을 모으고 웅크리고 계시다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허겁지겁 옷을 담기 시작합니다.

저는 막 그 앞을 지나며 우산을 폈습니다. 아이의 어깨를 감싸면서 우산을 씌워주는 장면과 아주머니의 허둥대는 모습이 뮤직비디오의 슬로모션처럼 겹쳐지는 순간.

실제 영화로 찍는다면 이건 희극일까, 비극일까. 다급한 삶에 쫓기는 이와 무심한 또 다른 이의 삶이 만나는 장면. 희극일리가 없지. 짧은 순간 이런 생각이 교차하고 그 사이에도 빗방울은 낡은 파라솔 위를 굴러 아주머니의 몸뻬에 후두둑 후두둑.

아, 삶은 왜 이리 없는 이들에게 더욱 가혹한 것인지. 내가 중학교 다닐 때 우리 어머니 끌고 다니시던 호떡 팔던 리어카와 저 낡은 코카콜라 파라솔이 겹쳐져 묘한 영상으로 다가옵니다.

"해인아. 저것 좀 담아 드리자."

마음이 급한 아주머니는 옆에서 돕는 저를 볼 여유도 없고 그 아주머니를 따라 허겁지겁 박스에 담기에 바쁩니다. 방금 전까지 도도하게 걸려 있던 옷들은 제대로 각도 잡히지 못한 채 박스 속으로 쏟아져 들어갑니다.

"아주머니, 이거 내일 또 파시려면 제대로 개야 하지 않나요? 구겨지면 팔릴라나?"
"아이래요. 나이롱이라 꾸기지는 것도 읎인께."

비를 피해 박스를 파라솔 주변에 모아 놓고 나니 정작 사람이 비를 피할 데가 없습니다. 아이는 피아노학원 가방을 머리에 쓰고 뛰어서 피아노학원엘 가고 전 우산을 들고 아주머니와 함께 섰습니다.

"댁이 어디세요. 일단 급한데로 실어다 드릴께요."
"아이래요. 울 아덜이 집에 있다가 차 갖고 오고 있인께."

이 아주머니 연세면 아들도 장성했을 텐데 집에 있다니. 시골이라 일 없다는 핑계로 놀고 있는 이들이 꽤 된다더니 혹시?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그걸 묻는 일이 고문인 게지. 내 식대로 생각하고 묻는 것은 위험한 일이야.

비는 점점 굵어지고 우산은 하나고 오후 여섯 시 남짓 되었는데 벌써 어두워집니다. 아주머니한테 핸드폰도 없는데 아들이 차를 가지고 오는지는 어떻게 아신다는 걸까.

"댁이 어디세요? 제 전화로 아드님한테 전화 걸어 드릴게요."
"아이래요. 비오문 아덜이 올기래요."

이런 막연한 상황을 봤나. 아들이 낮잠이라도 들었으면 무작정 기다리실 태세로구나. 어머니가 아니고서야 어찌 이것이 가능한 요즘 세상이냐.

아주머니가 서른 되던 해에 오징어잡이 나갔던 남편이 돌아오지 않은 일과 그물 수선을 하며 일당으로 아들을 속초상고까지 졸업시킨 일과 자기 아들이 제대하는 올 겨울만 지나면 이젠 무릎 시린 옷장사를 그만둘 거라는 얘기를 하는데 한 십오분 쯤 지났나, 비상등을 깜박이며 달려온 작은 보일러수리점 트럭.

짧은 머리의 미끈한 젊은이는 내리자마자 아주머니의 극성을 나무리기 시작합니다.

"그러게 비오니까 나가지 말랬잖어유."
"아이여. 그래두 서너 장은 팔었인께."

아들이 도착하는 순간 전 집으로 향하고 아까의 장면은 빠르게 해체되기 시작합니다. 어머닌 순식간에 차에 오르고 아들은 날쌘 동작으로 박스를 뒤에 실은 뒤 포장을 덮습니다. 빨간색 낡은 파라솔도 접혀서 구석에 실립니다.

듬직한 아들을 뒀으니 저 아주머니 비록 가난해도 행복하시겠구나. 극성을 나무래주는 아들을 둔 어머니는 그래도 얼마나 복많은 사람인지. 아들을 남편처럼 의지하고 살아왔노라는, 그래서 아들이 군대 가 있는 기간이 얼마나 긴 지 모른다던 어머니와 마지막 휴가를 나와서도 어머니의 극성을 보는 아들 모습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는 겁니다.

자식을 잘 기르는 것에 잘 먹이고 공부시키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을진대 그것을 아는 어머닌 얼마나 지혜로운 어머니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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