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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다. 금방금방 넘어간다. 이 소설을 읽으며 드는 느낌은 그랬다. 소설의 첫 요소는 당연히 '재미' 라고 생각하는 나이기에 이 소설은 그런 의미에서 보면 까다로운 독자인 나의 첫 시험 관문은 통과한 셈이다.

글쓰기를 즐겨서 그런지 소설을 읽으면서도 순수하게 내용에만 빠지지는 못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필자의 처지에 서서 그의 생각을 분석하려 드는 것이었다. 최대한 내용을 음미하며 읽었고, 다 읽고 나서야 필자가 어떠한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일단 '김영하'라는 인물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내가 보기에는 필자야말로 가장 흡혈귀처럼 느껴졌다. 책 밖에서 속임수를 써서 독자들을 혼란시키는, 관찰자 처지에 서 있는 듯하지만 사실 할 얘기는 다 하는 '필자' 가 그 어떤 등장인물보다도 중심소재와 가까운 이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네이버 지식 in에서 작가 신상을 찾으려다 곧 그만 두었다. 이 책을 읽고 내가 느낀 점만을 독자로서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의 세계관이 어떤 형태이든 간에 나는 이 책을 읽은 독자이자 학생으로서, 내가 바라본 책 속 그의 가치관에 대해 논하고 싶었으니까.

일단, 이 소설은 소설이 아닌듯한 소설이다. 무슨 말이냐고? 예를 들어보자. 잘 만든 드라마는 시청자에게 TV 속 세상이 실재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그 내용에 있어 환상적 요소가 다분하든, 지극히 현실적 인물들이 등장하든 간에 이를 보는 사람에게 있어서 그 세상 사람들이 실존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는 얘기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필자는 처음부터 이 소설이 소설이 아닌, 필자가 직접 겪은 얘기인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 '지난 해 펴낸 장편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때문에 이상한 전화나 편지를 받을 때가 있었다. 독자들 중에는 작가인 소설 속의 자살 안내인을 같은 사람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 '이 부분에서는 불필요한 부분이 있어서/다소 장황하게 서술하고 있어서 일부 생략했다 - 필자'


등의 표현은, 김영하가 소설 속의 '필자' 로 독자들에게 어떠한 속임수를 사용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김영하는 실제로 위와 같은 제목의 장편소설을 펴 낸 경력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필자' 라는 이름으로 편지 내용을 생략했다는 부분은, 실제로 그 편지가 왔던 것처럼 독자가 생각하게 하여 이 소설을 환상이 아닌 실화로 여기게 한다.

여자의 편지를 읽다보면, 이 여자가 철없는 여자 즉 세속적인 눈만을 가진 인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고 만다. 여자는 '그렇고 그런' 남자를 만나 데이트를 하다가, 능력없는 바람둥이 남자에게 정을 주고, 결국은 나이차이 많이 나는 글 쓰는 남자와 결혼을 한다. 하지만, 그녀가 택한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신뢰하기보다는,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분석하면서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얽맨다.

신뢰가 없는 결혼생활에서, 그는 그녀에게 계속 '흡혈귀' 같은 존재로 느껴질 뿐이다. 아이를 낳고, 남편과 함께 팝콘을 먹으며 할리우드 영화를 보고 주말이면 놀이동산에 가는 삶. 그런 삶을 원하는 여자에게 '희한한' 존재인 남편은, 꼭 피를 빨지 않아도, 드라큘라 복장을 하지 않아도 흡혈귀처럼 생각될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편지를 보낸, '김희연'이라는 여자가 굉장히 평범하게 인생을 살아왔으며, 타인을 대할 때 자신의 잣대로 그 사람을 평가하는 관대하지 못한 여자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런 여자에게, 김치를 먹지 않고, 스킨십을 해주지 않고, 머리카락을 한 올도 흘리지 않는 남편은 사랑과 이해의 대상이기보다는 물음표와 의심의 표적이 되는 것이다. 물론, 남편의행동도 일반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들의 선에서 이해하기에는 다소 어려운 점이 많다.

어두운 서재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여자와의 신혼 첫날밤을 무미건조하게 보내고,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내뱉는 남편은 어쩌면 인생의 쾌락과 고통을 지독하게도 겪었기에, 인생만사 허무하기 이를 데 없다고 느끼는 '허무주의자' 가 아닐까?

하지만 허무주의자가 결벽증 환자이고, 많은 지식을 섭렵하고 있다는 것이 왠지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남편에게 있어 삶이란 "달궈진 철판 위에서 추어야 하는 영원의 춤" 이며, "바다 속에 가라앉은 호리병. 그 속에서 천년, 만년을 기다려야 하는 요괴의 신세"일 뿐이라고 해설되어 있는 문단을 읽으며, 이렇게 인생사를 허무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자기 주변을 깔끔히 정돈하고, 습작을 하는 행위 자체가 모순이라 여길 수밖에 없었다.

소설의 뒷부분에서 필자는(김영하와 더불어, 책 속에서 이야기하는 화자) 결국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만다. "세상의 모든 흡혈귀들은 거세당했다. 세상은 빛으로 가득하다. 어디에도 숨을 곳은 없다. 우리는 흡혈의 자유와 반역의 재능을 헌납당했고 대신 생존의 굴욕만을 넘겨받았다…" 라는 표현을 읽어보면, '글쟁이' 인 남편, 흡혈귀라 오인받는 남편의 뒤에 필자가 숨어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거세당한 흡혈귀' 란 결국, 세속적인 시대에 마음껏 순수 문학 활동을 하지 못하고, 시대의 대세에 따라야만 하는 문인들을 말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 문인에는 남편도, 필자도, 그리고 소설 밖의 작가 = 김영하 자신도 포함되는 것일 것이다.

정리해보면, 이 소설의 저자인 김영하는, 자신의 경험담인 양 - 지명과 인명까지 세세히 언급하며 - 이야기를 시작했다. 소설의 처음 부분에서는 '창문이 흔들릴 정도로 강한 천둥번개가 치고,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이 꼭 공포영화 분위기였다' 며 독자에게 '흡혈귀' 가 등장할 법한 배경을 제시하지만, 그리고 독자에게 공감을 얻을만한 여자의 이야기를 통해 '흡혈귀' 라는 존재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지만, 결국 그가 하고 싶었던 '진짜' 이야기는, 남편이 남긴 짧은 메모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전부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소설의 맨 마지막 장을 덮을 만한 시기에 이야기한다.

'내 생각엔 아무래도 그녀가 흡혈귀인 것만 같기 때문이다. 이건 그저 내 짐작일 뿐이다. 짐작.'

이 표현에서 나는 작가의 또 한 가지 숨은 '주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김희연이라는 그녀, 평범한 생활을 하며 평범한 시선을 한 그녀가 어쩌면, 순수한 목적으로 문학활동을 하는 문인들을 '흡혈귀' 로 만들어 버리는 세속적 사회의 '진짜' 흡혈귀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을 덮으며 생각했다.

'독자들을 혼란시키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들지만, 결국에는 소설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독자들의 머릿속에 뿌리깊이 각인시키는 이 책의 저자인 김영하 자신이 흡혈귀일지도 모른다'고.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 2판

김영하 지음, 문학동네(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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