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장애인을 차별하는 말과 글에 대한 글을 쓴다고 하자 누군가 대뜸 이렇게 말했다.

"또 말꼬리 잡고 늘어지겠군."

어찌 생각하면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장애인을 차별하겠다고 작정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좋은 뜻으로 한 말인데 단어 하나 잘못 썼다고 시비를 걸면 말꼬리 잡는다는 생각도 들 것이다.

하지만 말과 글은 한 개인이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오랜 역사와 문화 속에서 사회 구성원들의 암묵적인 합의를 통해 만들어진다. 따라서 말과 글은 그것으로 의사소통하는 사람들의 내면에 숨어 있는 어떤 사상을 반영한다.

따라서 내가 누군가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진다면 그것은 그 단어를 쓰는 개인의 옳고 그름을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내면을 진지하게 들여다보자는 의도일 뿐이다.

솔직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벗지 못했다. 내가 써 온 여러 가지 말과 글을 짚어보면서 내 안에 숨은 많은 차별과 편견의 찌꺼기들을 걸러 내려고 애쓸 뿐이다.

처음 '장애인'이라는 단어가 선명하게 다가온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1988년 서울장애인올림픽을 지켜보면서 막연하게 '아, 이런 사람들을 장애인이라 하는구나'하고 생각했다. 그 전에는 병신, 불구, 귀머거리, 벙어리, 앉은뱅이, 소경, 봉사 따위의 말을 더 자주 들었다.

▲ 우진학교 풍경1
ⓒ 인권위 김윤섭
신체적인 특징을 분명히 드러내지만 이 단어들은 누군가를 무시하고 조롱하는 데 더 자주 쓰였다. 하지만 '장애'라는 단어는 몸이 남과 다르기 때문에 차별받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몇 년 전까지도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장애자'와 '장애인'이라는 단어를 섞어 썼다. 그러던 것이 요즘은 대부분 '장애인'이라고 한다. '장애우'라고 쓰는 사람들도 많다. '놈 자(者)', '사람 인(人)', '벗 우(友)', 겨우 한 글자 다를 뿐이지만 그 뜻의 차이는 참 크다.

대학을 다닐 때 영어로 써있는 전공서적을 보았는데 원서에 쓰인 단어를 보면서 그 차이를 실감했다. 1970년대에 출판된 책에서는 'handicapped person'을 주로 썼다. 그러던 것이 1980년대 이후에는 'person with handicap'으로 바뀐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같은 단어지만 뒤에 세워져 있던 '사람'이 맨 앞으로 나선다.

그 차이는 무척 크게 느껴졌다. 내가 앞으로 만나야 할 아이들은 '장애가 있는 어린이 handicapped children'가 아니라 '장애가 있는 어린이 children with handicap'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금도 학교에서 학생들을 만날 때, '장애'보다는 한 사람의 '인간됨'을 먼저 보려고 애를 쓴다.

요즘은 사람들이 '장애우'라는 단어를 많이 쓰는데 공식적으로 쓰는 말이라기보다는 상징적인 단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처음 이 단어를 쓴 단체의 의도는 아마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와 별 상관없이 다른 집단에 있는 '장애인'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시대를 살아가는 친구로 생각하고 장애인 문제를 우리가 모두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로 바라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우진학교 풍경 2
ⓒ 인권위 김윤섭
하지만 이 말을 신문이나 방송에서 아무 때나 쓰면서 일부에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친구라 부르는 것이 적절한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런 문제 제기가 단순히 어떤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옳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병신, 바보, 불구로 부르던 사람들을 장애자로, 다시 장애인 또는 장애우로 부르고 있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그들을 비장애인과 동등한 인격체로 보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을 것이다.

공공기관에 있는 장애인 화장실은 여전히 남녀 공용이다. 또 사람들은 모든 장애인들은 나이가 많고 적고를 떠나 무조건 일방적인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성별, 나이, 종교, 기호 따위를 싹 무시하고 오로지 '장애'만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에서 '장애' 다음에 붙는 '사람'과 '벗'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초라하고 볼품없다.

'장애'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차별과 편견은 그 말에 맞서는 단어를 보면 더 분명해진다. '장애인'이라는 단어를 일상적으로 쓰기 시작한 뒤에도 오랫동안 '장애인'과 맞서는 말은 '정상인'이었다. 장애인은 정상이 아닌 사람, 뭔가 잘못 되서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상품으로 치자면 '불량품'에 해당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예전에 쓰던 병신, 불구 따위의 말과 그 뜻이 별로 다르지 않다.

'일반인'도 많이 썼는데 '일반'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일부에 한정되지 않고 전체에 두루 걸치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일부'는 특별히 잘나거나 못난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장애인'은 사람을 잘난 순으로 죽 늘어놓았을 때 가장 뒷줄을 차지하는 어떤 무리, 보통 사람인 나보다 못난 사람들이 된다. 그런데 한 사람을 총체적으로 바라본다면, 절대적으로 나보다 못난 사람은 없다. 네살짜리 딸아이도 나보다 나을 때가 있는데 어떻게 어떤 사람들보다 내가 모든 면에서 더 낫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요즘은 '비장애인'이라는 말을 쓴다. 어색한 한문투 단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그래도 장애인과 맞서는 단어를 꼭 써야 할 때는 하는 수 없이 이 단어를 쓴다. 말 그대로 하는 수 없이 쓴다.

▲ 우진학교 풍경3
ⓒ 인권위 김윤섭
바라기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굳이 따로 나누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둘 사이의 경계를 자꾸 확인하려고 한다. 우리는 모두 예비 장애인이고 따지고 보면 장애가 없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나는 아니라고, 장애인 문제는 내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 보니 '팔 없는 천사 태훈이'가 나온다.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 희야'라는 책도 있다. 지하철 역무원이 전동차에 뛰어드는 장애인을 구했다는 기사도 보인다.

어차피 말꼬리 잡기로 작정하고 쓰기 시작한 글이니 말꼬리 좀 잡겠다. 태훈이가 팔이 없어서 천사가 된 것은 아닐 텐데, 그 기사를 보고 나서 내 머릿속에 남는 건 그냥 '팔 없는 태훈이'다. 마찬가지로 '네 손가락 희야'만 기억에 남는다. 우리가 태훈이와 희야 이야기에 감동하는 까닭은, 두 사람이 장애가 아니라 주어진 조건을 이겨 내고 밝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인격 그 자체다. 그런데 왜 자꾸 두 사람의 장애를 강조할까. 장애가 있으면 천사도 될 수 없고, 피아니스트도 될 수 없다고 미리 단정하는 속내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아 참 씁쓸하다.

지하철 역무원이 전동차에 뛰어드는 사람을 구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칭찬할 만한데 왜 굳이 역무원이 구한 사람이 장애인이라고 강조하는가. 장애인은 늘 장애가 없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기만 한다는 편견을 드러낸 건 아닐까.

얼마 전 단소를 배웠는데 학생들이 팔에 잔뜩 힘을 주고 단소를 쥐고 있으니까 담당 강사가 농담을 했다.
"왜 그렇게 힘을 줘요? 꼭 중증장애인 같잖아요."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웃었지만 나는 웃지 못했다. '장애'라는 단어가 그저 한 사람의 개성을 뜻하게 된다면 그때는 나도 웃어넘기겠지만, 아직은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하는 월간 <인권>에 실려 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행하는 <월간 인권>의 주요기사를 오마이뉴스에 게재하고, 우리 사회 주요 인권현안에 대한 인권위의 의견 등을 네티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꾸벅...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