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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선을 알리는 깃발처럼 붉게 물든 단풍
만선을 알리는 깃발처럼 붉게 물든 단풍 ⓒ 김동식

숲 속에는 인기척이 없다. 오랫동안 사람이 지나간 흔적조차 지워져 있었다. 바람도 멈춰 섰다. 구름이 잔뜩 낀 흐린 날인데도 날씨가 후텁지근하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훔쳐보지만 더위를 쫓기에는 아무래도 역부족이다.

가을의 미련을 붙잡기로 한 것일까. 마지막 나뭇가지에는 시선을 사로잡는 단풍잎이 만선의 깃발처럼 매달려 있다. 10월의 가을도 여유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닌가 보다.

수줍게 때로는 정열적으로 다가온 청미래덩굴의 열매
수줍게 때로는 정열적으로 다가온 청미래덩굴의 열매 ⓒ 김동식

수줍게, 때로는 정열적으로 살아가는 청미래덩굴

잠시 더위와 씨름하는 동안 유년의 기억 속에 남겨두었던 열매가 눈앞에 나타났다. 청미래덩굴이다. 발그레한 모습으로 도시의 벽 속에 갇혀 허겁지겁 살아온 한 인간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다. 왜 이제야 왔냐고, 인생의 꿈은 이루었냐고 눈빛을 반짝인다.

반갑다, 반가워. 그 어린 시절 청미래덩굴에 매달려 있던 추억을 이렇게 쉽게 만나게 될 줄이야. 빨갛게 익어가는 모습이 새색시 앵두입술을 닮았다. 수줍게 고개를 숙이다가도 정열적으로 그리움을 재촉하는 표정이 밝다.

새색시의 앵두입술도 이랬을까?
새색시의 앵두입술도 이랬을까? ⓒ 김동식

청미래덩굴은 우리와 아주 친숙한 덩굴나무이다. 숲이 발달한 곳이면 어김없이 자생하는 근성을 갖고 있다. 언제부터인지 다국적 식물들이 우리 산과 들에 주인노릇을 하고 있지만 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 노력이 기특하다.

덩굴잎은 둥글납작하고 표면에는 윤기가 자르르하다. 기다란 잎자루의 가운데나 잎겨드랑이에서 나온 한 쌍의 덩굴손은 끝이 도르르 감겨 있다. 이웃의 나무나 들풀이나 닥치는 대로 붙잡는 근성은 이 녀석의 주특기다. 갈고리 같은 작은 가시를 여기 저기 내밀어 의심 살만한 사람이나 동물을 경계하는 방어본능은 치열함이 돋보인다.

옷가지를 붙잡는 가시가 만만치 않아 일본사람들은 아예 '원숭이 잡는 고약한 덩굴'이라고 나무라기도 했다. 제주도 설화 속에는 토박이 농경여신 '자청비'가 그의 운명을 사사건건 방해하는 하인 '정수남'을 씩씩하게 물리친 비장의 무기로 청미래덩굴의 가시가 등장한다. 흥미로운 대목이다.

이 청미래덩굴은 경기도 지방에서 정착된 것이지만 지방에 따라 이름복도 많다. 전라도나 경상도, 강원도 지방에서는 망개나무, 명감나무, 참열매덩굴, 종가시덩굴 등으로 부르고 있다. 제주도에서는 '멩개낭'이다. 꽃가게에서는 멍개나무 또는 망개나무로 통한다.

그리움을 재촉하는 가을날의 유혹
그리움을 재촉하는 가을날의 유혹 ⓒ 김동식

인간세상과 산짐승들에게 베푼 은혜

중국에서는 '산귀래(山歸來)'라 부른다. 옛날 중국의 어떤 사람이 부인 몰래 바람을 피우다가 매독에 걸려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아내는 남편이 미워서 산에다 버리고 돌아왔다. 남편은 허기가 져서 산을 헤매다 청미래덩굴을 발견하고 그 덩이뿌리를 부지런히 캐 먹었으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매독이 다 나아 버렸다. 그는 건강한 몸이 되어 마을로 내려왔고 다시는 아내 몰래 못된 짓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사람을 산에서 되돌아오게 했다'고 해서 이 나무에다 산귀래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사연이 그럴듯하다.

100가지 독을 푼다는 약용식물
100가지 독을 푼다는 약용식물 ⓒ 김동식

옛날에 나라가 망하자 산으로 도망친 선비들이 먹을 것을 찾아 헤매다가 이 나무를 찾아 뿌리를 캐어 먹었는데 요깃거리로 넉넉하다 하여 우여량(禹餘糧)이라 하였고, 산에 있는 기이한 양식이라 하여 산기량(山奇糧), 신선이 남겨준 양식이란 뜻으로 선유량(仙遺糧)이라 부르기도 했다. 허기진 배를 채우는 구황식물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한방에서는 이 덩이뿌리를 토복령(土茯笭)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지금도 매독치료제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가을철이나 이른 봄에는 뿌리를 캐다가 잘게 썰어 그늘에 말려 약으로 쓰기도 했는데, 수은과 같은 중금속 독을 푸는데 명약으로 여겼다. 잎을 달여 차로 마시면 100가지 독을 제거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청미래덩굴의 열매는 늦가을이 되면 붉게 물든다. 40대 이후 세대라면 이 열매를 따먹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새빨간 유혹의 자태 때문에 그냥 지나갈 수 없다. 맛이 있든 없든 그냥 걸려든다. 입 속에 넣어 깨물 때마다 늘 조금만 더 맛있고 씹히는 부분이 더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으로 끝나지만.

덩굴나무에는 아직도 추억이 영글고 있네.
덩굴나무에는 아직도 추억이 영글고 있네. ⓒ 김동식

한겨울 폭설이라도 내리면 먹이를 구하지 못한 숲 속의 새들에게 이 열매는 훌륭한 먹이가 된다. 온갖 종류의 텃새들이 청미래덩굴이 있는 곳에 모여들어 그 빨간 열매를 입에 물고 있는 모습이 겨울 산속에선 쉽게 발견된다. 이 새들이 숲 속을 날아다니다 여기저기 나뭇가지에서 배설을 하게 되면 청미래덩굴의 새 생명은 다시 시작된다. 언젠가 사람들의 바지춤을 붙잡고 유혹할 날을 기다리면서.

1억 년 전 화석식물로 발견된 고마운 '종족'

이 청미래덩굴은 백합과에 속하는 덩굴식물이지만 좀 유별난 구석이 있다. 보통 백합과식물처럼 풀(草本)도 아니고 그렇다고 크고 화려한 꽃을 자랑하지도 못한다. 그 대신 이 녀석은 봄에 연녹색과 노란색이 섞인 작은꽃을 우산처럼 둥글게 펼쳤다가 가을에는 낙엽이 지는 나무로 계절나기를 한다. 독특하고 신기하다.

백합과식물들 쪽에서 보면 그래도 생뚱맞은 동료이다. 좀 모자란 듯 미움 받던 청미래덩굴이 1억년 전으로 추정되는 화석식물로 발견되면서 백합과 식물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것이다. 화석이 될 수 없었던 백합과식물들로서는 여간 고마운 종족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의 산야를 지켜온 야생식물
한국의 산야를 지켜온 야생식물 ⓒ 김동식

산과 들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나무이지만 세상과의 교감은 시도해 봐야 할 것 같다. 화석자원으로서, 약용과 구황식물로서, 한국의 산하를 지키는 야생식물로서 대접이 필요한 존재이다.

가끔씩 아파트의 베란다나 어느 옷가게에 가서 도시의 생명들과 함께 뒹군다고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청미래덩굴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왠지 쓸쓸함이 묻어나는 가을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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