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서울 보라매병원에 차려진 선생의 빈소.
서울 보라매병원에 차려진 선생의 빈소. ⓒ 박준영
"시원한 생맥주 한 잔 먹고 싶어."

32년5개월간 옥고를 치른 고 정순택(향년 84세) 선생이 남긴 마지막 말씀이다.

권낙기(통일광장) 선생은 정순택 선생이 술 한 잔 입에 댈 줄 모르는 어른이었다고 했다.

"술 한 잔 마실 줄 모르는 양반이 갑자기 시원한 생맥주 한 잔 마시고 싶다는 거야. 그건 진짜 술이 마시고 싶어서가 아니라 통일된 조국이 보고 싶고, 고향에 가고 싶고, 가족을 만나고 싶은 마음을 에둘러 표현하신 거야. 오죽 답답하셨으면 마시지도 못하는 술에 자신의 답답한 마음을 담으셨을까."

지난 9월 30일 새벽 갑작스런 병세악화로 하루 종일 고생하시던 정순택 선생은 결국 오후 6시 50분경 그토록 바라던 통일조국, 고향산천, 가족을 만나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말았다. 정순택 선생의 시신이 안치된 서울 보라매병원은 선생의 별세를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정부당국이 북녘에 있는 선생의 가족들의 방남을 요청해, 취재진의 취재열기도 뜨거웠다.

그러나 장례식장을 찾은 조문객들은 선생의 자제분들이 남녘에 올까, 언론보도가 어떻게 나올까 하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저 32년이 넘는 오랜 세월 고문으로 망가질 대로 망가진 육체를 가지고, 비록 강제전향일지라도 전향서를 쓴 당신을 채찍질 하며 5년여 간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반미와 국가보안법 철폐를 만나는 사람들마다 붙잡고 진심으로 이야기한 선생의 겸허함과 실천력을 곱씹을 뿐이었다.

"나도 비전향장기수지만 나는 정순택 선생이 정말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해. 그 분은 정말 자기 성찰을 할 줄 아는 분이셨고 실천으로 자신의 마음을 씻었던 분이야."

권낙기 선생의 눈에 비친 정순택 선생은 포악하기 그지없는 고문과 협박에 의해 강제전향을 했지만 강제전향의 책임을 권력에 돌리기에 앞서 자기 자신을 먼저 성찰할 줄 아는 분이었다. 자기 성찰에서 겸손함이 나오고 그를 승화시켜 실천으로 부족함을 메울 줄 아는 진정한 애국자였던 것이다.

7만2천km 거리순례... 사람들과 반미·국보법철폐 대화 나눠

고 정순택 선생은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2001년부터 7만2천km의 거리를 순례, 사람들을 만나 반미와 국가보안법 철폐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고 정순택 선생은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2001년부터 7만2천km의 거리를 순례, 사람들을 만나 반미와 국가보안법 철폐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 고 정순택 선생
정순택 선생은 고문후유증으로 소리를 거의 듣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정순택 선생은 전향서로 인해 상처받은 당신의 양심을 치유하고 젊은 시절 심장에 새겼던 민족의식, 반미의식을 표출하기 위해 2001년부터 장장 7만2천㎞의 거리를 버스로 철도로 오고가며 전국 어디고 안 가본 곳이 없다.

철도를 기다리면서도 물병 하나를 가운데 놓고 당신 또래의 반공노인과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옆 자리에 앉은 젊은이들에게는 역사의 진실을 조목조목 알려줬다. 그러기를 5년, 암 진단을 받고 쓰러지기 한 달 전까지 선생은 항상 지팡이를 들고 중절모를 눌러 쓰고 '국가보안법 철폐' '반미'가 쓰인 어깨띠를 두르시고 문밖을 나서시곤 했다.

80연세의 노인이 홀홀단신으로 우리 민족에 대해, 미국에 대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전국을 누비며 버스 안에서, 기차에서 만난 한 사람 한 사람과 5년을 하루같이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말 그대로 '민중 속으로' 들어가 민중들과 진심을 나눈 정순택 선생. 선생은 그렇게 실천으로 80평생을 묵묵히 총화하고 있었으리라.

하기에 정순택 선생은 남은 이들의 기억 깊이 새겨져 있었다. 선생을 비롯한 장기수 어르신들의 2차 송환을 위해 애썼던 민가협 양심수후원회 권오헌 회장은 "자신의 열정을 다 바쳤던 조국의 통일을 보시지 못한 것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라며 정순택 선생을 회고했다.

권오헌 선생은 한마디로 "고귀한 인덕과 품성을 가진 해박한 지식인"이라고 정 선생을 칭했다. 84세의 나이에도 사고에서나, 생활에서나 합리성을 잃지 않았다는 정순택 선생은 고령의 나이에도 손에서 책을 떼지 않았고 남다른 필력으로 좋은 글들을 많이 남겼단다.

남쪽에서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고급관리를 지낸 선생은 월북 후에도 고급관리로 일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분단 원인이 미국이라는 것을 너무나 빨리 깨달았기에, 전쟁 시기 미국의 만행을 목격했기에 선생은 지식인에서 멈출 수가 없었단다. 남 먼저 깨달았기에 실천 또한 앞섰던 선생은 58년 체포 후 32년여 간의 모진 옥고를 치렀음에도 숨을 다하는 그 순간까지 자신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실천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다. 선생과 4년여를 함께 생활한 김영식(장기수) 선생은 자신보다 10년이나 많은 연세인 정순택 선생의 부지런함과 성실함에 고개를 숙이고 말았단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4시나 5시에 일어나셔서 몸을 깨끗이 씻으시고 매일 방도 쓸고 닦고 하셨어. 난 도저히 매일 그렇게는 못하겠더라고. 그런데 정 선생은 한번도 거른 적이 없으셔."

"부친의 별세 소식에 남쪽 하늘만 쳐다보며 땅을 치고 있을 가족들...

송환을 앞둔 비전향 장기수가 남한에서 자신을 돌봐주던 봉사자의 손을 잡고 오래도록 놓지 못했다.
송환을 앞둔 비전향 장기수가 남한에서 자신을 돌봐주던 봉사자의 손을 잡고 오래도록 놓지 못했다. ⓒ 신동필
반미순례를 하고 오신 날이면 피곤해서 곧바로 쓰러졌다는 정순택 선생을 보기가 너무 안타까워 "그 정도면 됐다. 이제 그만 하시라"는 말도 했단다. 그러나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으셨다는 정 선생은 며칠 쉬고 난 후면 "움직일 만 해"하시며 다시 채비를 하시곤 했다.

"내가 수학연산을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어"라며 그 방법을 담은 책자를 직접 선물하며 어린아이처럼 자랑스러워 하셨다는 정순택 선생.

선생을 사랑하고 존경했던 많이 이들이 장례식을 찾았다. 그러나 선생의 가족만은 보이지 않는다. 버젓이 살아 있음에도 선생의 아들들은 먼 북녘땅에서 부친의 별세 소식에 남쪽 하늘만 쳐다보며 땅을 치고 있으리라. 그렇게 50여 년을 멀리서 그리워만 했던 정순택 선생의 가족.

그렇게 그리웠던 가족이기에, 그렇게 가고 싶었던 고향이기에, 그렇게 보고 싶었던 하나 된 조국이기에 선생은 가족과, 고향, 조국을 향해 한발 한발 나아가는 심정으로 민중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심장 속에 반미와 애국을 심어주었으리라.

전향서라는 종이 한 장이 남긴 양심의 상처를 자기반성과 성찰, 그리고 완강한 실천으로 치유한 선생의 눈앞에는 분명 가족의 환한 웃음과 정겨운 고향 어귀가 보일 것이다. 그리고 십수 년 제대로 들을 수도 없었던 선생의 귀에는 조국통일을 맞은 기쁨의 함성이 메아리찰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자주민보에도 게재되었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주권자전국회의에서 파트로 힘을 보태고 있는 세 아이 엄마입니다. 북한산을 옆에, 도봉산을 뒤에 두고 사니 좋습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