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송광사로 들어가는 길목의 벛꽃나무길
송광사로 들어가는 길목의 벛꽃나무길 ⓒ 박인선
전주시내에서 동북방향으로 12km 정도 차를 몰다보면 완주군 소양면에 소재한 송광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종남산을 병풍 삼아 평지에 잔잔하게 배치된 가람은 신라 경문왕때 도의선사가 창건하여 천년의 역사를 지켜온 사찰입니다.

전남 순천의 송광사와 이름이 같은 완주송광사는 전국적으로 알려진 사찰은 아니지만 완주송광사만이 간직한 독특한 문화유산으로 방문객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합니다. 그 첫 번째를 꼽자면 소조 사천왕상을 들 수가 있습니다.

"야, 무시하게 생겼네."
"기가 팔팔 살아 있는 것 같네."
"와, 몸짱이네."
"헤라클래스보다 더 역동적인 것 같네."

완주송광사의 소조 사천왕상은 이렇게 보는 이들의 탄사를 낳게 합니다. 높이가 4m가 넘는 거대불상 앞에서 관람객들의 대화를 들으며 그들의 눈에 비친 색다른 표현에 '눈이 보배'란 말이 실감이 났습니다. 보는 각도에 따라 표현의 관점도 달라지니 어찌 보면 사천왕상은 신세대 표현대로 '얼짱 사천왕'이며 '몸짱 사천왕'으로 보입니다.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는천왕문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는천왕문 ⓒ 박인선
완주송광사의 첫 관문인 일주문을 들어서면 어느 집의 뜨락에 들어선 듯한 소박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완주송광사만의 단아함이 배인 가람 배치의 특이함 때문이라 할 것입니다. 이어 금강문을 지나면 좀더 평평한 경내가 눈에 들어오고 천왕문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소조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는 곳이 천왕문입니다. 사천왕상의 형태는 동쪽을 지키는 지국천왕이 비파를 들고 있으며, 서쪽을 지키는 광목천왕은 한 손엔 용을 다른 한 손엔 여의주를 들고 있고, 남쪽의 중장천왕은 보검을, 북쪽의 다문천왕은 탑을 들고 중생을 구제하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400년 전의 이름 모를 장인과의 만남

사천왕상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94년 5월이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송광사의 사천왕상은 어느 사찰에나 있는 사천왕상들과 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먼지 뒤집어쓰고 입을 앙다문 괴기스런 불상에 불과했지만, 어느 미술학도의 대학원 학위논문을 통해서 사천왕상에 대한 학술적 조명이 이루어지고 그 해 KBS2의 '한국의 재발견'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소개가 됩니다.

이렇게 세간의 관심을 받고 있을 때 미술을 전공했다는 이유로 완주송광사의 주지스님으로부터 사천왕불의 보수를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됩니다. 간곡한 부탁만으로 시작된 사천왕상의 보수는 그렇게 나와 인연이 되어 400년 전 어느 장인의 손에 의하여 조성된 사천왕상의 실체를 알게 해주었습니다.

보수를 위해 그린 사천왕상 그림
보수를 위해 그린 사천왕상 그림 ⓒ 박인선
보수를위해 그린 사천왕상그림
보수를위해 그린 사천왕상그림 ⓒ 박인선
소조불의 조성방법과 소재에 대한 탐구는 타임머신을 타고 가는 역사기행과도 같았습니다. 온갖 상상력으로 옛 장인의 사천왕상 조성과정을 마음 속에 그리면서 보존을 위한 준비를 하게 됩니다.

완주송광사 뒤편에는 아름드리 육송들이 자라고 있는데 아마 이곳에서 자란 육송을 잘라 잘 건조시켜 기둥을 만들고, 좀이 슬지 않고 오랜 세월을 잘 버티도록 정성을 다했을 것입니다. 보존을 위한 특별함이 숨어 있을 듯한데 수수께끼 같은 비법은 풀리지 않았습니다.

보수하기전의 사천왕상
보수하기전의 사천왕상 ⓒ 박인선
보수하기전의 사천왕상
보수하기전의 사천왕상 ⓒ 박인선
육송으로 기둥을 세우고 대나무와 마 껍질로 엮어 뼈대를 만들어 점토를 수비(물로 점토를 풀어 이 물질을 분리하여 만든 입자가 고운 순수점토)하여 마 섬유를 섞어 살을 붙여서 조성한 소조 불에는 장인의 손자국과 숨결이 배어 있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400년을 묵었으니 적지 않은 곳에서 훼손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훼손된 부분에 고운 점토로 살을 입히고 목재로 된 불치(뒷부분의 불이 타오르는 것과 같은 모양의 장식)와 보관(머리 위에 쓰는 장엄 장식이 된 관)을 나무로 깎아 보수를 하고 모시 배에 아교풀을 발라 마감을 하였습니다. 옛 장인의 정성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400년 전의 장인에 대한 경외감으로 정성을 다했습니다.

다문천왕
다문천왕 ⓒ 박인선
광목천왕
광목천왕 ⓒ 박인선
보수를 하면서 '왜, 완주송광사의 사천왕상은 소조 상으로 조성되었을까?'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나라를 위하고 왕권을 위하는 측면에서 불사를 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호국적 의미가 컸다고들 합니다. 완주송광사의 사천왕상은 대웅전의 소조불상과 더불어 나라 형편이 어려웠던 시기에 청동조, 철조, 석조, 목조보다는 조성비용과 노력이 덜 드는 소조 상으로 조성이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러한 현실적인 반영은 소조라는 좀더 쉬운 소재를 택하게 되고 큰 규모의 불상을 만들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되었는데 여기에 재주가 뛰어난 장인의 기풍이 더해져서 좀더 조형적인 세련미를 지닌 훌륭한 작품을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왼쪽- 지국천왕,  오른쪽-중장천왕
왼쪽- 지국천왕, 오른쪽-중장천왕 ⓒ 박인선
우리는 흔히 서양미술에서 보여지는 작품들에 후한 점수를 주는데, 완주송광사의 사천왕상은 그리스 로마의 헤라클래스나 라오콘 같은 조각작품과도 견줄 바가 아니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형태미뿐만 아니라 동양적 소재의 특징에 맞추어 가미한 색체적 장엄미는 동양미술의 또 다른 백미임에 틀림없습니다.

송광사 사천왕상이 맺어준 특별한 인연

사천왕상의 보수로 나는 송광사에서 그 해 여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우리 일행 중 유일한 노총각이었던 후배는 송광사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던 처녀보살과 인연이 되어 평생의 배필로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함께 일했던 다른 후배가 전화를 해 왔었습니다.

"형님, 모를 일이어. 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어."
"○○이 형, 그 처녀보살하고 눈이 맞아 살고 있데요."

"그래, 그러니까 처녀 총각은 감정의 주파수가 달라. 세상에는 볼 수 있는 눈과 볼 수 없는 눈이 있는 것이어. 사천왕님이 처녀보살에게 볼 수 있는 눈을 준 거지. 하지만 신통하다야."
"그래. 대처 그 말이 일리가 있네."
"그러니까 송광사 사천왕님의 영험이 있다는 것이지. 옛부터 청춘 남녀가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빈말은 아니어."

그 후배가 지금은 떡 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고 잘 산다고 하니 인연치고는 특별한 인연인 셈입니다.

목불장승의 미소가 정겹다.
목불장승의 미소가 정겹다. ⓒ 박인선
11년 전에 보수를 하고 가끔씩 찾지만 완주송광사의 사천왕상은 여전히 400년 전의 모습 그대로 자리를 지키면서 크고 작은 인연의 연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송광사를 방문하는 탐방객들은 천왕문에 버티고 서 있는 사천왕상의 장엄함에 한기를 느낀다고 합니다. 그러나 좀더 마음을 정돈하고 나면 위엄보다는 인자함이 묻어납니다. 그러면서 감싸안으려는 듯 너그러움으로 다가오는데 이는 사천왕상의 반가좌(의자에 걸터앉아 있는 자세)적인 자세와 강인함과 온화함이 혼재한 사천왕상만의 독특한 분위기 때문입니다.

사천왕상과의 만남은 대웅전의 대형 불상에서도 눈이 휘둥그래집니다. 이 또한 소조 불이라는 점에서 완주송광사의 특징을 잘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완주송광사에는 어느 사찰에서도 느낄 수 없는 묘한 온기가 있는 듯합니다. 한국의 멋을 가득 담은 완주송광사는 알려지지 않은 우리 한국의 문화적 자존심이 깃든 소중한 자산입니다.

덧붙이는 글 | 내고향 명소 소개 응모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고물상에서 8년, 예술작업공간을 만들고, 버려진폐기물로 작업을하는 철조각가.별것아닌것에서 별것을 찾아보려는 예술가.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