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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특별법에 의해 일본인 지주 덕전미칠로 부터 소유권 이전등기를 완료한 마을회관 문서
1994년 특별법에 의해 일본인 지주 덕전미칠로 부터 소유권 이전등기를 완료한 마을회관 문서 ⓒ 김준

우측 하단에 전 소유주 일본인 '덕전미칠'을 확인할 수 있다.
우측 하단에 전 소유주 일본인 '덕전미칠'을 확인할 수 있다. ⓒ 김준
무상환원에서 유상환원까지

하의도도 토지문제는 미군정이 종료되고 난 이후, ‘하의3도 토지투쟁위원회’가 전남도청과 국회에 진정운동을 벌리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당시 토지투쟁위원회는 위원장 이홍규, 부위원장 홍완태, 간사에 제갈윤씨가 활동하였다. 제헌의회가 구성되고 난 이후 1949년 8월 농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국회 산업분과위원회 농림분과위원인 유홍렬, 황두연, 황숙현 의원과 농지국 지정과장 윤택중 등 조사단이 하의도에 현지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1950년 2월 제헌의회에서 하의도 농지 무상환원을 가결하고, 같은 해 5월 농림부 토지행정청 귀속농지관리국에서 하의도에 직원을 파견하여 개인별 경지 및 환원대상자를 조사하였지만 한국전쟁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당시 현지조사 이후 1949년 8월 14일자 호남신문에 실린 황두연과 유홍렬 의원의 소감을 옮겨본다.

하의도 귀속토지 1500정보는 도민들의 선조 때부터 그들 선조들이 피땀으로 개척한 것이며 이조나 왜정 40년에 걸쳐 몇 사람의 일인 및 몇 사람의 사기꾼들의 손에 농락되어 토지반환 투쟁의 역사를 가졌으며 법적근거를 따져도 도민들은 선조 때부터 가진 토지를 정식으로 토지대금을 받고 매매한 사실이 전혀 없다. 당연 도민들에게 무상반환해야 될 것이다.(황두연 의원)

하의도에는 술집이 하나도 없고 술 한잔 마시지 않고 기아와 꾸준히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도민들의 토지반환요구는 몇몇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하는 것도 아니고 공동의 이익과 다같이 행복을 위하여 주장하는 것을 잘 보았다. 나 개인으로서는 귀속토지 1500정보를 무상반환해 줄 자신이 있다.(유홍렬 의원)

이후 1954년 3월 하의도민들이 면민대회를 열고 국회에 탄원하였지만 무상환원되지 않고, 1956년 ‘나주궁산면, 무안 하의도 귀속농지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통과되면서 하의도 1,500정보의 농경지를 무상환원이 아닌 평당 200원의 가격으로 적산을 불하받는 형식으로 농민들에게 환원되었다. 그렇지만 소유권 이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누락된 토지까지 있다가 1993년 신안군의회가 600필지를 등기이전작업을 추진하였으며 아직도 100여 필지가 등기상으로는 국가나 덕전이 소유로 되어 있다.

ⓒ 김준

ⓒ 김준

ⓒ 김준
기념관보다 시급한 ‘폭도’의 사면복권

조선왕조, 일제강점기 지주, 미군정기과 국가에 400여 년을 투쟁한 하의도 주민들의 지나한 싸움의 기록은 대하소설 그 자체였다. 최근 대리 마을 초등학교부지에 ‘하의3도농민운동기념관’을 짓고 개관을 준비하고 있다.

진입로 공사를 비롯해 미진한 부분이 있어 개관하지는 않았지만 전시관과 영상관 그리고 기념탑 등은 모두 완공되어 있고, 당시 토지탈환을 위해 변론을 맡아 힘써 준 일본인 변호사의 공덕비를 비롯한 관련 비들도 옮겨왔다.

어디나 그렇지만 기념물들은 역사적 상징이며 기억이 공간이지만 현재에 구성물이다. 따라서 어디에 기념비를 세울 것인가, 어디에 기념관을 지을 것인가는 늘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 사건이 누가 봐도 수긍할만한 상징적 공간이 존재한다면 논란은 쉽게 마무리되지만 마을, 문중, 지자체 간의 경쟁으로 이어질 경우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으며 심한 경우에는 지역 간의 갈등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하의도의 기념관도 지난 농민운동의 핵심적인 마을인 ‘대리’와 ‘오림리’ 간의 갈등이 나타났었다. 오림리의 주장에 의하면 하의도 농민운동과 관련된 모든 내용이 대리(사람들) 중심으로 되어 있고, 오림리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농민운동이 이렇게 알려지고, 해결될 수 있었던 것은 오림리의 ‘7․7농민항쟁’의 결과라는 것이다. 반면에 대리에서는 오림리 사람들이 나서기 오래 전에 대리사람들이 하의도 토지를 되찾기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을 했으며, 7․7농민항쟁에서도 대리의 부녀자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이 참여했다는 것이다. 단지 충돌이 오림리에서 일어났을 뿐이라는 것이다.

부지선정문제가 제기되자 오림리에서는 마을주민은 물론 출향인사들이 돈을 모아 마을 앞 망매산 중턱에 터를 마련하였다. 오림리 주민들은 이곳은 칠산바다가 내려다보이고 서해 낙조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어 많은 사람이 찾을 수 있어 적격이라고 했다. 반면에 현재의 대리의 초등학교 자리는 폐교가 되어 넓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농민운동의 역사로 보더라도 적격이라고 맞섰다.

부지결정은 정치적인 힘에 의해 교육청에 협조를 얻어 현재의 자리로 결정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두 마을의 주장은 모두 맞다. 해방이전까지 하의도의 농민운동은 대리 사람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해방이후 오림리에서 발생한 ‘7․7농민항쟁’이 계기가 되어 오림리 사람들이 농민운동의 또 다른 축을 형성했던 것이다. 특히 미군정과 무관하지 않았던 당시에 사정과 이후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면서 ‘폭도=좌익’으로 이어지면서 오림리 사람들의 피해는 최근까지 이어져 왔다.

이런 측면에서 하의도 농민항쟁은 ‘전시관’의 건립보다 시급한 것이 당시 ‘폭도’로 처벌된 사람들에 대한 사면과 복권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하의도 소재지 웅곡리에서 작은 약방을 운영하고 있는 제갈윤씨는 이를 더욱 강조한다. 지금까지 하의도 농민운동의 기록은 해방전까지밖에 없다고 이후에는 농민들에게 유상으로 분배된 것으로 약술되어 있다고 했다. 해방공간에서 하의도 토지문제는 이데올로기와 결합되어 건국준비위원회, 한국전쟁기 등 쟁점화되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먼저 하의도농민운동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제갈윤씨가 주장하는 것처럼 독립운동과 같은 맥락에서 위상정립이 되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당시 독립운동의 주도세력이었던 사회주의와 어떤 관련성을 갖고 있는가 분석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기념관도 지역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생태환경을 고려한 작은 마을역사박물관이 되어야 한다. 작은 마을에 기념관에서 대한민국의 역사, ‘국사’ 책에 나오는 독립운동을 찾고자 하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마을의 역사와 문화 즉 생활사를 읽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주민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고 때로는 결혼식장이 되고, 회갑잔치의 무대가 되고, 명절에는 노래장도 펼칠 수 있는 진정한 복합문화센터가 되어야 한다. 대리석으로 치장하고 높은 사람들이 테이프를 자르는 사진이 걸려 있는 그런 곳이 아니라 역대 마을이장 사진, 마을에 가장 나이가 많은 어르신의 결혼사진, 새마을 사업 이전의 마을과 생활모습 사진이나 자료 등이 있으면 더욱 좋다.

덧붙이는 글 | 하의3도 농지탈환운동을 마지막 편입니다. 
이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현지조사와 신안군과 목포대 임해지역개발연구소에서 펴낸 [하의 3도 농지탈환운동 자료집]을 참고 했음을 밝힘니다. 자료집에는 '하의3도 농지탈환운동의 전개과정'(손형섭, 박찬승), '일본인 지주의 하의도 토지수탈과 토지회수운동'(이규수), '서남해 도서지역의 농지분쟁 및 소작쟁의에 관한연구'(김종선) 등 3편의 논문과 <비변사등록>, <신문기사>, <재판기록> 등 관련자료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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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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