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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작년 개천절에 결혼했다. 하늘 열린 날, 인생도 열리리라 기대하며 결혼준비와 함께 '신혼여행 기본계획'도 함께 세웠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 이동거리가 짧은 곳으로 택한다, 둘째 한적한 때와 곳을 고른다, 셋째 발길 닿는 대로 자유롭게 다닌다 등이었다.

위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여행지를 물색했다. 잔뜩 부푼 머리며 짙은 화장을 한 채 결혼식 끝나자마자 부랴부랴 여행용 가방 챙겨들고 미처 떼지 못한 가짜 속눈썹 휘날리게 공항으로 질주를 해야 하는 상황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러므로 해외여행은 탈락 1순위. 남편과 나는 한반도 지도를 쫙 펼쳐놓고 구시렁거리기 시작했다. 금강산? 백두산? 아차, 이곳은 해외는 아니지만 해외나 다름없는 곳이다. 휴전선 아래로 눈길을 옮겼다.

결혼 장소는 남편의 고향인 충북 제천이므로, 첫째 조건을 충족시키는 이동거리가 가장 짧은 강원도가 단연 물망에 올랐다. 제천은 행정구역상 충청도에 속하지만, 거리로 보나 정서와 생활권으로 보나 강원도에 속한 곳이다. 그래 강원도다. 강원도의 힘을 느끼러 가자.

결혼식을 마치고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미리 렌트해 놓은 차를 몰고 38번 국도를 탔다. 영월과 봉평을 지나 오대산에 도착하여 보니 6시쯤 되었다. 비수기를 맞아 값싸게 예약한 오대산호텔은 우리 부부가 통째로 전세낸 듯 고요하고 한적했다. 화려하고 드넓은 호텔 로비에 우리 부부 두 사람만이 서 있는 기분이란…. 신혼 첫날밤을 보내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오대산의 아름다운 전나무 숲길을 손을 꼭잡고...

이튿날,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오대산에 올랐다. 월정사 쪽 넓은 주차장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가득 태운 관광버스 몇 대가 서 있었다. 우리는 전나무 숲으로 향했다.

추수(秋水)처럼 맑은 것이 또 있을까? 청량한 월정사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끝없이 서 있는 아름드리 전나무 숲길을 손을 꼭 잡고 걸었다. 굽이굽이 호젓한 전나무 숲이 뿜어내는 맑디맑은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쉬었다.

▲ 월정사의 전나무 숲길
ⓒ 박현주
전나무 숲길을 따라 고요한 월정사 경내로 들어갔다. 그립던 8각9층 석탑이 눈에 들어왔다. 고등학교 수학여행에 와서 처음 보고는 홀딱 반해버린 탑이다. 우리나라 탑의 고전양식인 신라시대의 사각형 평면 탑에서 벗어나, 파격과 돌출의 멋을 자랑하던 고려시대 유산답게, 호리호리한 몸매를 아홉 층이나 올리고 여덟 개의 모서리마다 작은 청동 풍경을 달고 화려한 금동 머리장식을 얹어 한껏 멋을 부린 귀족적인 탑. 다시 보니 그리웠던 마음이 더해 더욱 아름다워 보인다.

다음 날, 우리는 너무나 아쉬워 오대산에 더 머물기로 했다. 이번엔 상원사 길이다. 월정사와는 달리 산 깊숙이 자리잡은 상원사는 6ㆍ25 때 목숨을 바쳐 절을 지킨 스님 이야기로 유명하다. 이름에서도 어쩐지 비감이 느껴진다.

상원사 가는 길은 비포장 도로다. 비포장 도로를 갈 때 좋은 점 중에 하나는 속도를 낼 수 없기에 주변 풍경을 자세히 볼 수 있다는 거다.

천지창조 시기에 하늘에서 뚝뚝 떨어졌을 것 같은 집채만한 바위가 이제는 맑은 물 쏟아지는 계곡에 너른 평상처럼 한적하게 누워 있다.

서른 가지 맛과 서른 가지 향

가벼운 등반이라도 할 작정으로 적멸보궁으로 향했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을 못보고 어찌 오대산에 왔었노라 말할 수 있겠는가. 적멸보궁으로 가는 길은 가파른 계단길이었다. 굽이굽이 산꼭대기를 향해 난 가파른 길은 이제 단풍이 내려앉기 시작하여 울긋불긋하다.

해발 1천 미터가 넘는 고지대에 있는 이 '보배로운 궁전'은 풍수지리학적으로도 명당중의 명당이란다. 꼭대기에 이르자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합장하고 아담한 적멸보궁을 한 바퀴 돌았다.

저녁으로 근처 식당에 들어가 산나물 비빔밥 정식을 주문했다. 서른 가지가 족히 넘을 나물반찬이 나왔다. 너무 많은 게 아닌가 싶어 걱정하며 먹는데, 모양도 비슷하고 조리법도 유사한 나물인데도 맛과 향이 각기 다른 것이 놀라웠다. 서른 가지 맛이 나고 서른 가지 향이 살아 있었다.

다음날, 짐을 꾸리고 어디로 갈까 의논했다. 애초에 발길 닿는 대로 갈 작정이었으니 다음 행선지가 정해진 것은 없다. 근처 자생식물원에 들려볼까, 아니면 바로 대관령을 넘어볼까 고민하다가 대관령 넘어 동해바다를 보러가기로 했다.

길가에 산나물과 버섯을 파는 곳이 몇 군데 있어 차를 세우고 구경했다. 잘 말린 영지버섯이 있어 달라고 하니 주인 할머니가 도끼 한 자루를 가져와 장작 패듯 패기 시작했다. 신혼부부라고 하니 더 많이 주신다. 요즘 다 나가는 해외로 안 가고 지역경제 살려 기특하다고 하시며…. 신혼여행 선물은 몽땅 지역특산물로 구입하기로 했다.

달리는 차창으로 잠자리가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한다. 구불구불 대관령에서 마시는 공기는 꿀맛 같이 달다.

강릉에 도착했다. 바닷가로 달려나가니 백사장에 햇살만 부서지고 있다. 눈부시다. 방을 잡아 놓고 조개구이와 함께 술 한잔 하러 바닷가로 다시 나왔다. 여기서도 '지역경제 살리는 기특한 신혼부부'로 찍혀 덤으로 얻은 조개를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밤바다 파도 소리 요란한데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밤이 깊은 줄도 몰랐다.

불우한 천재 남매 허균과 난설헌 생가를 찾다

강릉은 조선시대 유명했던 네 사람의 고향이다. 두 채의 집에서 각기 두 명씩 천재가 태어났는데, 신사임당과 이율곡의 집, 그리고 허균과 허난설헌의 집이 그것이다. 이 네 사람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가족이 아닐까 한다. 두 남성은 정치적으로, 두 여성은 문학적으로 말이다.

이들은 동시대 사람들이지만 두 가족의 운명은 판이하다. 상반된 운명은 현대인이 기리고 있는 생가의 규모에서도 드러났다. 율곡이 태어난 집 오죽헌은 거대한 광장과 기념관에 둘러싸여 있었다. 정작 작은 오두막인 오죽헌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찾기도 힘들 정도였다. 소풍나온 유치원생부터 관광버스로 올라온 할머니들에 이르기까지 왁자지껄 분주하다.

우리는 사임당이 그린 '초충도' 등 사본 몇 점을 사고 서둘러 경포호 근처에 있는 허균의 생가로 향했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들어간 주택가에 홀연히 소나무 숲이 나왔다. 생가 근처의 마을숲이다. 아직 보존되어 있는 것이 놀라울 지경이다.

▲ 허균 생가를 에둘러싼 마을 소나무숲
ⓒ 박현주
▲ 우리부부는 불우한 혁명가를 좋아한다. 허균과 난설헌의 생가앞에서.
ⓒ 박현주
숲 가장자리에 단아한 한옥집이 서 있었는데, 그곳이 비운의 혁명가 허균과 그의 누이이자 불우한 시인이었던 난설헌이 태어나 자란 집이다. 강릉시 문화유산해설사 할아버지의 자세한 설명을 들으며 집안 곳곳을 살펴보았다. 남편과 나는 출세하여 성공한 영웅보다는 불우한 혁명가를 더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허균과 난설헌이 시름겨워 거닐었을 툇마루며 마당에 오래오래 앉아 있었다.

문화유산 해설사 할아버지의 설명에 따르면, 허균은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 사면복권 되지 못한 인물이라고 한다. 역적으로 몰린 이들이 몇 세대가 흐른 후 웬만하면 복권되어 명예를 회복한 것에 비해, 허균은 조선에서 특별히 위험한 인물이었는지 왕조의 미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난설헌은 뛰어난 재주에도 불구하고 봉건시대 여성이라는 굴레를 쓰고 27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결혼생활도 무척 불행했다. 그의 남편 되는 자는 그다지 재주가 없는지라 뛰어난 부인과 자주 비교되곤 했단다. 그것이 불화를 불러온 것인가. 난설헌은 '규원가(閨怨訶)'를 지을 정도로 가정생활을 비탄했다. 시고(詩稿)가 장롱에 가득 찰 정도로 시를 많이 지었다고 하나 그녀가 죽은 뒤에 시집식구들이 모두 불태웠다고 한다. 난설헌이 유명해진 것은 허균이 보관하고 있던 일부 시문이 알려지면서부터다.

예전에는 허균의 집과 경포호가 맞닿을 만큼 가까웠다고 한다. 그러나 70년대부터 경포호를 자꾸 매립하여 호수가 줄어들어 지금은 경포호가 멀찌감치 있다.

깊은 산 속 금바위 대관령 자연휴양림

강릉에서 다시 대관령으로 향했다. 대관령 자연휴양림에서 마지막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다. 이곳을 가려면 옛도로로 가야 한다.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된 후 옛 도로는 왕래가 뜸했다.

깨끗하고 그림 같은 산장 3층에 머물면서 늘어지게 산림욕을 했다. 자연휴양림이니까 희귀한 '금송' 같은 나무를 당연히 기대했으나 휴양림 안에서 '금바위'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금바위라고 불리는 널찍한 바위들이 계곡을 따라 총총히 누워 있었는데, 이곳 대관령은 일제시대에 금을 캐던 곳이라 한다.

대관령 중턱에서 캐낸 금덩어리를 이 바위에서 찧고 갈아서 순금을 만들었다고 한다. 금가루가 날려 이 바위는 금바위, 아래 작은 폭포는 금가루가 떨어져 황금빛으로 물들어 금바위 폭포라고 불린다. 흰 옷입은 광부들이 이 험한 산에서 금을 캐어 험한 계곡의 바위에 앉아 금을 찧는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이 아프다.

오는 길에 유명한 황태도 구경할 겸해서 진부령을 넘기로 했다. 진부에 도착해서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요즘은 이곳에서 황태를 팔지 않는다고 한다. 물어물어 횡계에서 황태를 구할 수 있었다. 덤으로 맛좋은 감자술까지 얻었다. '횡계에서 돌아오는 저녁'이란 노래를 흥얼거리며 막바지 신혼여행을 즐겼다. 강원도의 힘을 느끼며, 지역주민의 응원까지 받으며 신나게 다닌 여행이었다.

다음달이면 개천절이다. 하늘이 열린 날, 인생을 함께 연 남편과 함께 다시 강원도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그때 느꼈던 설레임과 자유로움이 오롯이 살아날 것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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