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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겉그림
책 겉그림 ⓒ 돌베개
아메리카 원주민을 보통 ‘인디언(Indian)'이라 부른다. 이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할 당시 그곳을 인도로 착각한 나머지, 그곳 사람들을 인디언이라고 부른데서 유래한 것이다. 그 말은 곧장 유럽인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퍼져나가 굳어졌고, 지금은 아메리카 원주민들도 자신들을 인디언이라고 말할 정도가 됐다.

‘원주민’이든 ‘인디언’이든, 그것을 어떻게 부를 것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들이 살고 있는 땅과 그들이 누려야 할 주권, 그리고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말은 더없이 중요하다. 그것은 그들이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그 누구와도 차별 없는 존재인 까닭이요, 그 누구와도 똑같은 사람으로서 대우받아야 할 권리를 지닌 까닭에서다.

그런데 미국은 지난 1860년대 그랜트 행정부 때부터 1950년대 아이젠하워 행정부까지, 아니 클린턴 행정부 때 까지도 인디언들의 주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오로지 에너지 개발 명목으로 미 당국은 원주민들의 거주지를 정부 소유로 잠식해 갔으며, 그들을 개화시킨다는 미명하에 그들의 언어도 쓰지 못하게 만들었으며, 가슴에 갈고리를 꿰는 ‘선댄스’ 같은 신성한 의식도 전투적인 대항의식이라며 못하게 했고, 이를 어길 시에는 모두 감옥에 넣어 감금시켜 버렸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인디언 운동에 목숨을 걸고 뛰어들었던 한 인디언 운동가가 있다. 인디언 저항운동의 상징이 된, ‘레어드 펠티어(Leonard Peltier)’가 바로 그다.

그는 그의 고향에서는 ‘사람을 인도하는 자’로 알려져 있고, 그가 속한 부족 형제들 사이에서는 ‘해를 쫓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오늘날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1976년 서른 살에 수감되어 어느덧 30년 세월을 감옥에서 보낸, 수인번호 ‘89637-132’ 수감자로 더 알려져 있다. 감옥 속에서 30년 젊은 청춘을 다 보냈고, 지금은 환갑이 되어 손자들이 찾아오는 면회를 맞는 중늙은이가 되었으니, 그 모습이 얼마나 참담할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가 감옥 속에서 써 보낸 <나의 삶, 끝나지 않은 선댄스>(문선유 옮김·돌베개·2005)를 읽어보면 그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알 수 있고, 또 다른 많은 것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쓰는 까닭은 인디언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또 인간으로서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 더 큰 이해를 구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기괴한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며, 영화에나 나오는 판에 박은 듯한 별종 또한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당신과 같이 평범한, 그리고 당연하지만 언제나 고귀한 인간이다. 우리에게도 감정이 있고 피가 흐른다. 우리도 나고 죽는다. 우리는 토산품 가게 앞에 서있는 마네킹이 아니다.”(81쪽)

1975년 6월 26일 파인리지 지정 거주지에서 FBI 요원과 인디언 사이에 총격전이 일어났다. 그곳에서 두 명의 FBI 요원이 살해 됐다. 그런데 그 모든 살해 혐의로 정부는 레어드를 지목했고, 모든 사건과 재판은 그에게 불리하게 조작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중 연속 종신형을 선고 받게 됐고, 지금껏 30년 넘게 수감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살해하지 않았으며, 정당방위였음이 드러났다. 더욱이 그를 기소했던 검사들도 벌써 오래 전에 조작된 사건이었고, 유죄를 입증할 만한 증거도 없다고 고백했다. 그래서 전 법무부 장관과 국제사면위원회가 발 벗고 나서서 그의 감형을 탄원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미국 정부는 왜 그를 감옥에서 내 주지 않는 것일까. 왜 미국 정부는 국제사면위원회까지도 나서는 그 일을 모른 척 하고 있는 걸까. 그것은 오로지 인디언 운동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방편임을 알 수 있다. 그 길만이 인디언 운동을 잠재울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를 사면하고 인디언 세계로 보낸다면, 그는 다시금 인디언 운동의 핵으로 설 것이고, 더 많은 선댄스 의식을 통해 인디언들을 결집하여 미국 정부의 불의한 정책에 항거할 것이다. 그와 같은 일들이 들불처럼 타오른다면, 이제껏 착취해왔던 지정 거주지 제도는 자칫 흔들릴 수 있으며, 수많은 광물자원과 석유까지도 모두 되돌려 줘야 할지 모르는 위기에 처할 수 있다.

그렇기에 미국 정부가 겉으로는 참된 인권과 참된 민주주의를 소리 높여 자랑하고 있지만, 수많은 인디언들을 두고서는 더욱더 숨 막히는 야만과 검은 폭력을 암암리에 자행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미국을 어찌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라고 할 수 있겠는가. 진정으로 미국 정부가 참된 인권과 참된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면 인디언들을 인디언답게 살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인디언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단지 인디언답게 사는 것이다.”(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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