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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절터에 남아 있는 선사의 꿈

빈 절터에 우거진 풀이여
차라리 빈 절터에 꿈이 있다


고은 시인의 <합장>이라는 시 중 위 싯구는 진전사와 선림원에 딱 맞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각각 양양 둔전리와 갈천리에 빈 절터만 남아 있는 이 두 사찰은 1200여 년 전의 꿈을 간직한 채 이제는 우거진 풀에 잠겨 있다. 오로지 석탑만이 남아 있어 사찰임을 알 수 있을 뿐이지만, 그 옛날 그들이 꾸었던 꿈은 양양지방의 정신으로 승화되어 남아 있다.

둔전리에 남아 있는 진전사는 도의선사가 개창한 사찰이다. 도의선사는 784년 당으로 건너가 37여 년간 선종을 공부하고 귀국하여 당시 경주중심의 교종이 절대적이었던 신라에서 선법을 펼치려 하였으나, 마귀의 언어라고 비난받으면서 배척당하였다. 이에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음을 깨달은 도의선사는 현재의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에 소재한 진전사에 머무르면서 선법을 펼쳤다.

이 때 염거선사에게 선법을 전했고, 염거선사는 다시 설악 억성사에서 보조선사 체징에게 법을 전했다. 보조선사 체징은 장흥 가지산 보림사를 개창하여 도의선사의 선풍을 계승하게 되었는데, 이에 구산선문의 하나인 가지산문이 개창되었다. 보조선사 체징의 비문에는 "우리 나라 선문의 제1조는 도의, 제2조는 염거, 제3조는 체징이라고 한다"라고 적혀 있다. 따라서 도의선사가 개창한 진전사는 '도를 사모하여 산을 메웠다'할 정도로 매우 번성했으며, 구산선문의 선승들에게는 중요한 성지로 인식되고 있다.

도의선사가 소개한 선종은 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과 自心卽佛(타고난 마음이 곧 부처)로 대표되는 남종선이었다. 자기 자신에게 내재된 불성을 깨달으면 누구나 부처라고 얘기한 선종에 의해 개인의 다양성과 자존감이 발견되게 된다. 이러한 자각은 골품이라는 신분제에 대한 도전이 되었으며, 신분에 의해서가 아니라 개인 능력이 중시되는 사회로 변화하게 되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교종은 왕실과 귀족층의 후원을 통해서만 유지되던 비대한 사원경제였던 반면에 선종은 승려의 노동을 중시하는 자급자족적인 방식으로 사원을 운영하였고, 교종이 경주중심이었던 비해 선종은 지방에 사원을 개창함으로써 지방호족들의 지지를 받게 된 것이었다.

진전사와 함께 양양군 서면 미천골에 있었던 선림원 또한 불교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선종의 사찰이었다. 선림원은 802년 해인사를 세웠던 순응(順應)법사가 804년에 창건한 것으로 보이는데, 화엄종 계열의 절이었다. 현재 선림원터에 남아 있는 부도비에서 알 수 있듯이 홍각선사가 9세기 중엽 대대적인 중수를 하면서 선종사찰로 전향한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교종 승려들이 대거 선종으로 이적한 역사적 사실을 증명해주는 그 최초의 사찰이다.

현재는 절터였다는 것만 알 수 있는 부도비와 석탑 등이 남아 있을 뿐인 진전사와 선림원은 고려를 건국하게 된 지방호족들의 사상적 배경이었던 선종의 시원지로서 변혁을 꿈꾸었던 사람들이 모이던 곳이었다. 그로부터 500년 후 개혁을 꿈꾸는 사람들이 다시 양양으로 모여들었으니, 이제는 선종이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화엄종(교종)이 개혁의 주체가 되었다.

낙산사에 깃든 개혁의 꿈

고려 공민왕 중반기 때 공민왕의 사부였던 개혁정치가 신돈은 기존의 정치세력과 불교계를 대대적으로 개편하고 개혁정치를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코자 했다. 그 불교계의 개편을 중점적으로 논의한 장소가 신돈의 원찰로 불리우던 양양 낙산사였다.

신돈은 낙산사를 중심으로 관음신앙을 강조하면서 민심의 안정을 꾀하기 위해 몇 차례 공민왕과 동행하여 낙산사를 찾았다. 공민왕 15년 9월에 낙산사에 행차한 공민왕과 신돈은 중국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천희를 만나 불교계의 개혁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공민왕 16년 5월에 천희가 진각국사로 추대되어 공민왕 15년 사퇴한 왕사 보우의 뒤를 잇게 된다. 이후 화엄종 계열이었던 신돈과 천희는 보우를 중심으로 하는 선종 위주의 정책에서 화엄종 중심으로 불교정책을 개혁하게 된다.

이러한 불교계의 중심이동은 당시 정치세력의 개편과도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는데, 고려 건국의 사상적 배경이었던 선종이 고려 말기에는 권문세가 및 원나라와 연결된 체제유지적인 성격의 불교로서 공민왕의 개혁에 저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민왕과 신돈은 선종의 중심적 지위를 박탈함으로써 권문세가와 친원나라 세력을 제거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공민왕 20년, 신돈의 개혁은 실패로 돌아가 신돈은 처형되고 천희는 진각국사 자리에서 물러나자 다시 보우가 국사로 책봉되어 권문세가와 선종이 권세를 잡게 된다.

신라 시대의 골품제도에 저항하고 중앙집권제에 도전하여 고려를 건국하게 될 지방호족들의 지지를 받은 선종은 도의선사가 귀국하여 개창한 양양 진전사에서부터 꽃을 피웠다. 또한 고려 말기의 개혁정치가 신돈의 원찰 또한 양양 낙산사였으니, 당대의 개혁과 변혁을 꿈꾸었던 사상이 신라와 고려의 변방이었던 양양에서 꽃피웠던 것이다.

부패하고, 불평등한 사회상을 바로잡고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진취적으로 개척하려는 천 년 전통의 개혁과 변혁의 정신은 이후 양양 지방에서 현대에까지 면면히 흐르고 있으니 그 대표적인 운동들이 기미독립만세시위운동과 양양농민조합운동, 양양청년연맹운동, 신간회운동, 사회주의 운동이다.

'양양사람들은 동지섣달에 발가벗겨놔도 30리를 뛴다'

'양양사람들은 동지섣달에 발가벗겨놔도 30리를 뛴다'는 말은 일제 강점기 기미독립만세시위운동 이후 일제 군경이 양양 사람들의 격렬한 저항정신을 빗대 만든 말이었다. 그래서 당시 양양군 사람들이 관청에 취직하려고 이력서를 내면 '양양놈'이라고 하여 퇴짜를 당하기가 일쑤였다고 한다. 이런 핍박을 받을 정도로, 당시 양양지방에서 전개되었던 독립만세시위운동은 전국적으로 손꼽힐 정도로 격렬하면서도 대규모로 전개된 운동 중 하나였다.

규모로 보자면 일제가 남긴 기록상으로는 7개면 132동리 중 6개면 82동리에서 4600여명이 참여했다고 하나, 역사학자 조동일 선생은 연인원 2만1천명이 참가하였다고 한다. 초기에는 유림들과 감리교 세력이 준비하였지만, 각 리의 구장들이 조직책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하여 모내기철을 앞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농민들이 대거 참가하였다.

중반부터는 예수교도, 천주교도와 양양보통학교 학생들도 참가하여 범군민적인 운동의 양태를 띠게 되었다. 또한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비폭력 운동으로 시작하였으나, 4월 4일 첫날부터 전날 연행된 22명의 청년들의 교섭을 둘러싸고 적극적인 폭력 시위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이튿날부터는 각 면사무소의 습격, 점거, 파손 등이 이어져 대포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배를 타고 바다로 도망하기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일제의 총칼에 맨손으로 맞서 싸우니 희생자가 끊이지 않았다. 운동의 마지막날로 기록되는 4월 9일에는 1000여명의 군중이 기사문리에 모여 주재소를 습격하기 위해 하조대로 가는 고개를 넘다가 일제 군경의 발포로 9명이 피살되고 20여명이 부상당했다. 이 고개는 현재도 '만세고개'로 불리며, 7번 국도를 따라 강릉방면에서 하조대로 오다보면 넘게 된다.

이러한 7일간의 격렬한 만세운동으로 3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이후 일제는 주동자를 검거하였는데 그 수가 수백 명을 헤아렸다. 그로 인해 양양지방의 민족해방운동과 근대화운동은 일시나마 쇠퇴하게 되었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개성, 일본, 만주, 소련 등지로 망명 또는 유학의 길로 떠나게 되었다.

운동이 남긴 가장 중요한 점은 농민들이 자발적, 능동적 주체세력으로서 사회 전면에 등장하게 됐다는 것이다. 독립만세운동을 통해 농민들은 단결과 조직의 중요성, 미약하나마 계급적 각성을 통한 의식의 고양을 체험한다. 이는 그 후 1923년 양양노농동맹의 결성과 1932년 농민조합사건으로 발전한다.

양양의 잊혀진 역사 - 사회주의 운동

일제 강점기에 농민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곳은 함경도와 전라도, 경상도 등이다. 이들 지역에 비해 산이 많고 농지가 적은 강원도는 강릉, 고성, 양양, 삼척 등에서 농민조합이 결성되기는 하지만 농민운동이 활발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는 양양 농민운동이 잘 알려지지 않고 이목을 집중시킬 만한 소작투쟁 등이 없어서 그런 것이지 실제 내용면에서는 매우 활발했다.

이와 관련 당시 신문은 1932년 발생한 양양농민조합사건은 함경도 단천 농민조합사건 다음으로 규모가 큰 대사건이라고 보도했다. 일제는 양양농민조합원의 검거를 위해 당시 강원도내 21개 경찰서에서 무장경관대를 차출하여 대규모의 검거 작전을 펼쳤다. 연행자만 무려 367명에 달했고, 이 중 36명이 구속되어 2~4년형을 받았다하니 그 규모의 거대함을 알 수 있다.

양양 농민운동의 역사는 기미독립만세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오룡영, 김대봉, 김동환, 최욱 등에 의해 1923년 물치 노농동맹이 조직되면서 시작된다. 1925년 12월에 조산농민조합이 결성되고, 1927년 12월에 물치, 조산, 용천, 정선, 소야, 서림 등 6개 지역운동조직이 연합하여 양양농민조합 창립대회를 개최하게 된다. 이 대회에서 의장에 김병환, 부의장 오일영을 선출하고 군농조의 활동방침을 정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1928년 4월 26일에는 낙산사에서 양양농민조합 제2회 정기대회가 개최되었는데, 회원 320여 명, 방청객 1000여 명이 참가한 대규모 행사였다.

양양농민조합은 야학을 통해 문맹타파, 교양교육을 펼쳤으며, 소작쟁의, 일제의 농업정책반대투쟁, 화전민 문제, 미신타파, 조혼제 폐지문제 등의 활동을 벌였나갔다. 특히 마르크스주의를 지도정신으로 하여 농민 의식화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이는 각 지부별 교양훈련 내용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또한, 양양지역의 운동가들은 강원도 및 전국중앙조직과의 활발한 연대활동을 전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핵심 활동가들은 전국조직 중앙간부로 활동하였다. 김병환은 1926년 조선농민총동맹의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김대봉은 1925년 조선 노동총동맹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특히 김대봉은 1925년 10월에 조선공산당에 입당하고 1926년 9월 모스크바공산대학으로 유학을 떠났고 28년 9월 귀국하여 경성을 무대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했다. 김대봉은 조산리 최욱과의 연락을 통해 양양지역 운동에 영향을 미쳤는데, 최욱은 만세운동 이후 공산주의를 양양에 도입한 인물이었다. 농조 집행위원장이었던 최욱으로 인해 조산리 최씨 문중이 양양지역 농민운동과 민족해방운동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1932년 공판에 회부된 36명 중 조산리에서만 무려 8명이 회부되었는데 전부 조산 최씨였다. 이러한 활동 때문에 조산리(현재 낙산해수욕장)는 '양양의 모스크바'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사회주의자가 많았다.

사회주의자들의 적극적인 농민조합운동으로 인해 일찍부터 일제의 감시를 받은 양양농민조합운동은 1932년 대규모 연행과 검거로 인해 이후 침체상태에 빠져들게 되고 이후 해방이 되기까지는 별다른 활동을 전개하지 못했다.

하지만, 격렬한 독립만세운동과 양양농민운동은 천년 전부터의 개혁과 변혁의 사상을 꽃피웠던 도의선사와 신돈의 정신이 현대에까지 끊임없이 양양 사람들의 피 속에 흐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후 양양에 그어진 38선으로 인한 분단과 6・25전쟁, 수복지구라는 이유로 실시된 3년간의 3차 미군정, 급격한 월남민의 유입에 따른 속초의 분리 등으로 인해 이러한 정신은 사라지고 말았다.

 

덧붙이는 글 | 설악산 밑동네 양양군 서면 장승리에서 태어나 양양에서 25년을 살면서, 구석구석 놀러다녔던 기억과 양양에 관한 각종 자료를 참고로 해서 쓰고 있습니다. 

이 글을 여행기라 하지 않고 향도기(嚮導記)라 한 이유는 양양의 가볼 만한 곳을 안내하면서 유래, 전설, 풍경의 배치, 구성, 인심 등을 서술하여 양양을 여행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뜻에서 쓰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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