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삼척 의료원 전경
삼척 의료원 전경 ⓒ 최삼경

죽서루 입구 모습
죽서루 입구 모습 ⓒ 최삼경
그것이 영화를 소재로 한 소설이라도 무슨 상관이랴, 작가 김형경은 사랑이라 불러도 좋을 사람들 내면의 지문들을 차분하면서도 명료하게 찍어놓는다. 아주 작은 미세한 느낌들조차 커다란 반향으로 울림을 주고받는 그 특별한 관계의 불안하고도 가슴졸이는 소통의 양식.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겪고 지나간 격류였을 것이며, 또 얼마를 몰아칠 물결일 것인가.

사랑에 관한 금언들은 많지만 <은밀한 생>의 작가 파스칼 키냐르는 “사랑에 빠진 사람들, 연인들, 부부들이란 동일한 인간들을 지칭하지 않는다. 태고의 어둠 이래 사랑에 빠진 자는 오래 전부터 그의 가족, 친척들, 그리고 집단이 그에게 마련해준 교환에서 빠져나온 여자 혹은 남자를 가리킨다”고 정의했다.

사랑을 하는 동안은 그만큼 각성된 느낌에 맴돌게 마련인가 보다. 작품 속에서 인수와 서영은 각자의 배우자를 돌보면서도 빨주노초파남보, 도레미파솔라시, 희로애락애오욕 등 빠른 템포의 느낌들로 순간 행복하고 순간 상처받는 희비쌍곡선을 스타카토 리듬으로 변주한다. 또 거기에는 차가움, 뜨거움, 간지러움, 부드러움, 아픔, 전율, 압박감 등의 감정들이 범상한 일상들을 밑동부터 뒤집어 놓는다.

영화와 소설의 주 무대가 되었던 삼척의료원과 죽서루는 왠지 지독한 사랑을 하고 이제는 짐짓 시치미를 떼는 느낌을 준다. 영화 촬영지라는 비상(非常) 속에 있다가 이제 또다시 그렇고 그런 소도시의 일상으로 돌아간 모습이지만, 이웃한 일본은 물론이고 멀리서는 터키에서까지 온다는 관광객들의 발걸음으로 조금은 활기를 띠는 듯했다.

까페, 자전거 도둑
까페, 자전거 도둑 ⓒ 최삼경

인수와 서영이 묵었던 호텔 모습
인수와 서영이 묵었던 호텔 모습 ⓒ 최삼경
소설에는 환선굴 이야기도 나온다. 덕항산의 우람한 산세 아래로 남한에서는 최대규모란 말이 허언이 아닌 듯이 굴은 들어가는 입구부터가 널찍하였다. 미로 같은 동굴에는 종유석, 석주, 석순들이 각양의 모습으로 자라고 있었고, 또 각종 조명으로 빛의 성채를 연상케 한다. 인수가 서영에게 조명 때문에 달라지는 인상이나 심리에 대해 말하는 대목도 있지만, 사람들은 순간순간의 빛 같은 느낌으로 사랑을 하고 가정을 유지하게 되는 것일까?

그러고 보면 우리는 지금 허약한 가정의 틀을 지켜내느냐 고군분투 중이다. 이러저러한 문제로 곳곳에서 위태로운 지경으로 내몰린다. 시간은 흐르고 기존의 가치관은 힘을 잃고 새로운 가치는 아직 혼란스럽다. 그렇지만 물이 끊임없이 부딪치며 골을 내듯이 그러한 갈등은 늘 새로운 미래와 패러다임을 제시해왔다. 다만, 사람들은 지금까지 갈등을 나쁜 것으로만 여겨 드러내길 두려워한 것은 아니었을까?

사랑도 그렇다. 사랑은 성욕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성욕은 식욕과 함께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충동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그것의 존재를 내놓고 인정하지 않는' 이중성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다. 그래서 성은 색다른 가면을 쓰고 사사건건의 인간사를 배후조종 한다. 따지고 보면 ‘결혼’은 현대로 오면 올수록 근본적으로 생생해야 할 성과 사랑을 지리멸렬한 일상으로 묶어놓는다는 비난에서 자유로워 보이지 않는다.

누가 대책 없는 끌림이라는 감정에 충실한 존재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 것인가. 사랑은 어차피 이단적이고, 금기를 깨는 것인 만큼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 주기도 한다. 그래서 작중 서영은 인수와 하룻밤을 보낸 후 ‘그들도 우리처럼 사랑했을까’ 하는 이해와 수긍의 바닷가를 걸었는지 모른다. 새로이 개통된 삼척의 해안도로는 때마침 부는 바람 때문인지 파도가 산처럼 일어난다.

삼척 바닷가 전경
삼척 바닷가 전경 ⓒ 최삼경
삼척은 7번국도의 절경 중에도 유명하여 특히, 울진과 이어지는 코스는 백미라 할 수 있다. 깎아지른 절벽이 있는가 하면, 완만한 모래사장이 이어지기도 하는 길옆으로 파도는 학익진을 펴고 달려든다. 어쩌면 바다는 모든 격정의 유랑을 지낸 물들이 마모되고 상처받은 가슴을 풀어놓는 고향 같은 것일지 모른다. 남편을 잃은 서영이, 부인과 이혼을 결심한 인수가, 겨울 날 내리는 눈을 보며 마지막처럼 외출을 준비하듯이, 바다는 해발 0의 높이에서 모든 떠난 자들을 말없이 끌어안는 것이었으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