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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의도 가는 길
하의도 가는 길 ⓒ 김준
하의도는 우리 나라 근현대사에서 두 번의 주목을 받았다. 하나는 300여 년 동안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한 농민들의 항쟁으로, 다른 하나는 노벨평화상을 받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고향이기 때문이었다.

고향이란 무엇일까. 특히 성공한 사람들에게 고향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고향을 떠나 온 사람들 중에는 적극적으로 고향을 찾고 고향을 위해 무엇을 할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반대로 '고향'이 지긋지긋해 돌아보기도 싫은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고향에 대한 애틋함이 없다. 몇 뙤기 되지 않는 소작을 붙여 입에 풀칠을 해야 했고, 가끔 농번기철이며 남의 일 해주고 입성으로 해결하기도 했던 어린 시절의 가난 때문에 그렇다. 아버지는 우리 일은 만사 제쳐놓고 그 집 일을 먼저 챙겼다.

그때는 아버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요즘 아버님은 가끔 고향에 다녀왔으면 하는 눈치를 한다. 이번 선산 벌초에도 나이가 많으신 아버지는 우리가 산에 올라가 벌초를 하는 동안 고향마을을 한 바퀴 순회하셨다. 친구들도 만나고 오랜만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신 모양이다. 돌아오는 길에 동네 어귀에서 모시고 광주로 올라왔다. 젊은 시절에 고향을 떠서 도시로 나가 자식들 가르치고 가난도 어느 정도 해결했다고 자부하시는 아버지의 고향 생각과 나의 고향 생각은 다르다.

하의도를 방문하면서 DJ에게 고향 생각은 어느 쪽일까 생각해보았다. 대한민국의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자 등 성공한 정치인의 고향 생각은 어느 쪽일까. 인간 김대중의 고향 생각이 몹시 궁금하다. 하지만 직접 DJ에게 물어 볼 수도 없는 노릇.

생가
생가 ⓒ 김준

ⓒ 김준

ⓒ 김준
DJ 생가를 복원했지만...

후광리는 큰 마을을 말하며 DJ생가는 작은 마을인 원후광에 위치해 있다. 생가 앞에는 원을 막아 마련한 논과 소금밭이 있다. 소금밭의 일부는 2003년 갯벌체험장과 염벗, 염막 등 전통소금 생산 방법인 '화염' 생산시설을 복원했다. 복원된 생가는 DJ가 1921년 이곳에서 태어나 1936년 초등학교 3학년까지 어린 시절을 지낸 초가집이다.

목포 북 초등학교로 전학하면서 집은 헐리고 집터는 마늘밭으로 변한 것을 문중과 독지가들이 중심이 되어 1999년 생가 6칸으로 안채와 창고 1동, 부속건물 등을 복원하였다. 생가를 해체할 당시 목재를 가져다 어은리에 집을 짓고 살던 주민의 집을 사들여 해체하여 다시 생가터에 복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고향에는 1999년 생가가 복원되었지만 생가에는 안내자는 물론 그 흔한 영상물과 기록들도 갖춰져 있지 않았다. 진입로는 차가 겨우 한 대 지나갈 정도로 좁고, 급하게 포장만 한 탓인지 주변과 어울리지 않게 화장한 꼴이다. 생가 앞에는 아직 개관하지 않는 옛날 불을 때서 만들던 전통소금 제조시설과 소금전시관 그리고 갯벌체험 공간 등 '해양문화체험공원'을 마련해 두었다. 하지만 2~3시간 배를 타고 그곳까지 가서 체험할 어린이들이 있을지 의문스럽다.

ⓒ 김준

ⓒ 김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다녔다(34.5.12-36.9.3)는 하의초등학교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다녔다(34.5.12-36.9.3)는 하의초등학교 ⓒ 김준
생가는 신안군에 기부채납되어 면사무소에서 관리하고 있다. 조만간 현지에 사는 관리인도 둘 예정이라고 한다. 일부에서는 현존하는 인물의 생가복원은 적절치 않다는 반응도 있었다. 그래서일까, 정작 당사자도 생가를 방문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의도 주민들의 '숙원'은 2~3시간 걸리는 뱃길을 1시간대로 줄이는 것이다. 하의도의 뱃길은 쾌속선, 일반선, 차도선 등이 있다. 지리적으로 보면 하의도의 뱃길은 서해안의 항로의 끝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늘 불안했다. 홍도나 흑산도처럼 국민관광지로 많은 사람이 찾는 경우 일찍부터 편리한 항로가 개발되어 쾌속선이 다니고 있지만 목포와 상대적으로 멀지 않는 하의도의 경우 내놓을 만한 볼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장이 좋아 수산물이 풍부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늘 뒷전이었다.

지금은 쾌속선이 3차례, 차를 싣고 이동하는 일반선이 3차례씩 운행하고 있다. 활어나 패류 등 수산물은 상인들이 직접 들어와서 사가지만 농산물은 직접 뭍으로 가지고 나가야 한다. 소금만 해도 그렇다. 차들이 쉽게(?) 오갈 수 있어야 있는 것이라도 팔아서 생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의도를 가로지르는 2번 국도는 봉도에서 신의도를 앞에 두고 멈췄다.
하의도를 가로지르는 2번 국도는 봉도에서 신의도를 앞에 두고 멈췄다. ⓒ 김준

ⓒ 김준
뱃길 1시간대 주민 숙원

좋은 어장을 가지고 있는 섬은 이래저래 어민들이 자가용인 '배'를 가지고 있어 급할 때면 직접 가지고 나가면 되지만, 대부분 '농민'인 하의도 주민들에게 육지와 연결하는 일은 정기항로를 운행하는 뱃길이 전부이다. 10여 년 전에는 목포에 나가려면 뱃길로 너댓 시간 길이었다.

지금도 2시간 30분은 족히 걸린다. 반면에 바로 앞에 있는 신의도는 1시간 30분이면 목포에 이른다. 그래서 주민들은 오래 전부터 신의와 하의 본도의 연결을 원해왔다. 인근의 다른 섬들은 더 멀리 떨어져 있고 공사비가 많이 들어도 연도가 이루어지는데 꼭 필요한 하의도가, 그것도 대통령을 배출한 섬에서 큰 욕심을 부리는 것도 아닌데 해결되지 않는 것에 주민들은 분노했다.

사실 연도 사업이 논의가 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어디나 마찬가지이지만 선거철만 그 놈의 다리는 몇 번 놓이고 부서진다. 소문에 의하면 DJ가 집권하던 시절에도 두 번이나 하의 봉도마을과 신의 하태도 연결을 건의했던 모양이다. 뿐만 아니라 얼마 전에는 한 달여 동안 측량과 예산까지 산출하며 연도를 위한 작업이 구체화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경제성 탓인지 돌연 중단되었다. 주민들 중에는 지방도였던 도로가 국도로 바뀌면서 작업이 중단되었다고 알고 있다. 국도가 되면서 전국에서 우선순위를 결정해야 하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고 이해는 가지만 주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복장 터질 일이다.

하의도 면소재 웅곡리에서 오림리를 지나 봉도로 달리던 도로는 신의 하태도를 앞에 두고 돌연 멈춘다. 더 이상 차는 바다를 건널 수 없다. 되돌아가야 한다. 과거 중선배로 고기를 잡던 시절에는 흑산도와 홍도에서 잡은 생선을 목포와 영산포로 가져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 가야 했던 곳이 이곳 봉도였다. 먼 섬 흑산도와 홍도를 육지와 연결하기 위해서 필요했던 이곳에는 자연스레 주막이 있을 것이고 돈이 있고 힘쓰는 건달들도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은 쓰러져가는 집이 두어 채 있고, 소금을 내기 위해 염전에 앉혀놓은 함수들만 지키고 있다.

ⓒ 김준
DJ의 고향 후광리에서 작은 섬 장병도까지는 물이 빠지면 고스란히 속살을 드러내는 갯벌이다. 뿐만 아니라 인근 옥도는 바다 한가운데 엄청난 게르마늄 갯벌 섬이 떠 있다. 이곳 갯벌 낙지는 목포에서 알아주는 놈으로 직접 목포에서 낙지잡이 선수들을 모아서 낙지잡이에 나서기도 한다. 그런데 이 장병도가 1990년대 초반까지 전기가 들어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최근 갯벌 중간의 작은 섬 내황도에 철탑을 세워 전기를 공급하고 있다. 이를 두고 주민들 중에는 '군의원이 대통령보다 낫다'는 비아냥거림도 나오고 있다.

하의도를 관통하는 도로는 암태, 비금, 도초, 하의, 신의, 장산을 연결해 2번국도에 해당된다. 국도가 무엇인가. 중요도시, 지정항만, 관광지 등을 상호연계하여 국토의 종합적 수송체계를 확립하고, 요즘 걸핏하면 등장하는 '균형발전'을 위하여 고속도로와 함께 국가가 관리하는 기간도로가 아니던가. 오히려 '균형발전'이 주민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인가?

몇 일전 서울의 동교동과 하의도가 자매결연을 맺었다. 전 대통령의 고향과 현 거주지가 자매결연을 해 농수산물 직거래 등 교류를 활성화하겠다고 한다. 주민들이 대통령의 생가에 별 관심이 없듯 이번 이벤트에도 별 반응이 없다. DJ정권기에 많은 사람들이 하의도를 방문했었다. 최근에도 한나라당 의원들이 대거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 특히 영남인들이 이곳을 방문하면 두 번 놀란다고 한다. 목포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교통이 불편함에 놀라고, 하의도에 들어와서는 가난한 섬과 DJ 생가로 들어가는 좁은 길 등에 놀란다고 한다.

50년 동안 '대중씨'만 보며 살았다는 80순을 앞둔 하의도의 노인. 어렵던 시절에 꾕과리(궁물)을 쳐서 돈을 모아 올려 보냈고, 군사정권 시절에는 DJ가 핍박받을 때 하의도도 똑같이 어렵고 힘들었다고 한다. 그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주민들은 무슨 혜택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DJ 당선이 확정되던 저녁 '이제 광주는 DJ로부터 자유로워야 하고, DJ도 광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지역원로들의 기자회견이 생각났다. 당선되고 나서 DJ가 하의도를 방문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그곳에는 DJ선친들의 묘소도 없다. 모두 뭍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하의도에서 필자는 '작은 전라도'를 보았다. 멀어지는 뱃길에 자꾸 '작은 전라도'라는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작은 전라도' 하의도, 이제 그들의 희망은 무엇인가.

덧붙이는 글 | 김대중 대통령의 고향 '하의도'관련 기사를 세 차례에 걸쳐서 연재합니다.

1. 하의도에서 '작은 전라도'를 보다
2. 땅, 땅거리는 권력에 똥침(?)을 놓다 - 농민항쟁 300년
3. 섬, 고기배 구경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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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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