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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아름다운 성당 레온 대성당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아름다운 성당 레온 대성당 ⓒ 김남희

28년 걸은 '평화의 순례자' 이야기

산티아고를 향하는 이 순례의 길이 자신들의 삶에서 특별한 경험이 될 것을 예감하는 그들에게 '평화의 순례자' 이야기를 들려준다.

"평화의 순례자라고 들어봤어?"
"아니, 못 들어봤는데. 얘기해 줘."

"미국 여성인데, 28년 동안 걸었던 사람이야. 청색 바지와 청색 셔츠를 입고, 테니스화를 신고서. 셔츠의 앞면엔 '평화의 순례자'라고 씌어 있고, 뒷면의 글은 '이 해안에서 저 해안까지 평화를 위해 걷는다'에서 '세계의 무장해제를 위해 1만6천km를 걷는다.', 다시 '평화를 위해서 4만km를 걷는다' 이런 식으로 변해갔대. 자신에게 생활과 사유의 소박함이 가능하다면 모두에게도 가능하리라 확신하고 살았던 드문 사람이지.

한국전쟁, 냉전, 군비 경쟁, 전쟁에 대해 반론을 펼친 그녀의 시대는 매카시 상원의원이 반공주의를 외치며 마녀사냥을 펼치던 살벌한 시대였어. 평화를 말하는 것조차 영웅적인 용기가 필요한 때였대. 대단한 건 그녀가 걷기 시작한 날부터 평생 동안 한 푼도 지니지 않았고 한 푼도 쓰지 않았다는 거야.

그녀는 이렇게 말하곤 했대.

'나는 얼마나 자유로운가! 여행하고 싶으면 일어서서 걷기만 하면 된다. 나를 구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쉴 곳이 생길 때까지 걷고 먹을 것이 생길 때까지 굶는다. 나는 달라고 말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아도 주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선하지 않은가!

나는 보통 하루 평균 40km를 걷는다. 걷는 중에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에 따라 달라지긴 하지만 말이다. 하루에 80km를 계속 걸은 적도 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거나 마땅히 쉴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주 추운날 밤에는 밤새도록 걸으면서 체온을 유지한다. 나는 철새처럼 여름에는 북쪽으로, 겨울에는 남쪽으로 이동한다.'

그녀는 나중에는 유명한 대중 연사가 되었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녀는 자동차 추돌 사고로 죽어."

"와! 너무나 멋진 사람이네. 진정한 순례자였네."
"정말 멋진 삶이었지? 세상에 대해 책임지려던 삶이었으니까."


이 세상이 아름다운 건 가끔씩 그런 사람들이 우리 곁에 와서 머물다 사라지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이 남긴 흔적이 삭막하고 건조한 삶에 반짝이는 물기를 더해주기에, 삶은 살아갈 만하다.

레온 대성당의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오늘은 도시를 걷는 기분이다. 계속 이어지는 도로와 멀리 보이는 레온(Leon)의 모습 때문에 눈이 피로하다. 레온으로 들어서는 길에는 미학적 가치가 없는 빌딩들이 길게 늘어서있다. 시내로 들어서서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로 향한다. 알베르게 앞에는 벌써 길게 줄이 늘어서 있다.

침대를 받고, 몸을 씻기 위해 샤워장에 들어서니 찬 물만 나온다. 얼음처럼 찬 물로 인해 여기저기서 질러대는 비명소리가 샤워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나 역시 비명을 질러가며 허겁지겁 겨우 물만 축이며 샤워를 마친다. 부엌도 없고, 문도 밤 9시 반에 닫는 이곳 알베르게의 유일한 장점은 엄격한 남녀 분리라는 것 정도이다.

짐을 정리한 후 닐스크리스티안과 시내로 나갔다. 성당이 정면으로 보이는 광장의 카페에서 우리는 점심부터 먹는다. 우선 배를 채우고 나야 아름다움도 눈에 들어올 것 같아서이다.

레온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레온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 김남희
레온 대성당에 들어서니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가 눈을 끈다. 지금껏 내가 만난 성당 중에 가장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를 가졌다. 스테인드글라스가 화려한 대신 제단에는 그림만 걸려있을 뿐 장식이 없어 보기에 좋다.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하는 이가 혼자 부르는 노래,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가사가 자꾸 뒷덜미를 잡아챈다.

돌이켜보면 유럽은 도시 전체가 나를 매료시킨 적은 많지만 하나의 압도적인 건축물이 나를 흔들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압도적인 건축물 한두 개를 빼고는 아무런 미적 가치가 없는 다른 대륙의 수많은 도시들에 비하면, 유럽의 도시들은 그 자체로 얼마나 아름다운가.

가우디가 설계한 집과 늙은 성당들을 둘러보고 돌아와 중국식당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매일 반복되는 비슷한 식사에 물려있던 터라 시내에 중식당이 있다는 말에 다들 환호한다. 그 이름도 정겨운 '장성반점'에서 토마토 계란국, 볶음국수, 새우 죽순 표고볶음을 먹었다. 오랜만에 먹는 동양 음식이 서양음식에 물린 혀를 아쉬운 대로 달래준다.

숙소로 돌아와 수녀님 주재로 미사를 했다. 스페인어로 진행되는 미사 내내 졸았다.

레온을 지나 빌라데자자레프로 가는 길. 지겹도록 단조롭던 메세타를 벗어나는 길이라 드문드문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레온을 지나 빌라데자자레프로 가는 길. 지겹도록 단조롭던 메세타를 벗어나는 길이라 드문드문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 김남희

2005년 7월 18일 월요일
오늘 쓴 돈 : 아침 4.2 + 비누, 물, 우유 등 3.03 + 숙박 3 = 10.23유로
오늘 걸은 길 : 레온(Leon)-빌라 데 마자리페(Villar de Mazarife) 21km


여자들만 쓰는 방이니 코 고는 사람 없이 푹 잘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얼마나 헛된 거였는지! 우리 방에는 정말 '내 인생 최악의 코골이' 여자가 세 명이나 있었다. 완벽한 불협화음을 이루며 밤새 이어지던 그들의 격렬한 행위예술로 인해 온 방의 여자들이 잠을 설쳤다. 코를 곤다는 것만으로 누군가에게 이토록 심한 적의를 품을 수 있다니! 아, 정말 한숨도 못 잔, 악몽 같던 밤이었다.



젊은 신부 토마스와 이야기를 나누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씻고 나오니 대문이 오전 6시에 열린단다. 배낭을 내려놓고, 문 열리기를 기다리는 데 슬금슬금 비까지 내리기 시작한다. 부슬부슬 비 내리는 길, 오늘은 독일인 신부 토마스와 이야기하며 걷는다.

그는 젊은 만큼 진보적인 신부이다. 그는 젊은이들이 원치 않는 임신을 피하기 위해 콘돔을 사용해도 된다고 믿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중절은 반대한다. 강간으로 인한 임신의 경우에도 낳아서 고아원에 보내는 게 낫다고 믿는 사람이다.

교회가 젊은이들에게 좀더 열린 모습으로 다가가야 한다고 믿는 그는, 교회가 늘 보수적이고 완고한 태도로 젊은이들을 대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그에게 물었다.

"토마스, 넌 선교 사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네가 생각하는 선교의 정의는 뭐니?"

"이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기독교로 변화시키는 게 선교의 목적이 될 수는 없어. 우리가 할 수 있는 선교란 불교도가 더 나은 불교도가 되게끔 돕고, 이슬람교도가 더 나은 이슬람교도가 되게끔, 힌두교도가 더 나은 힌두교도가 되도록 돕는 거지."


여행을 다니며 수많은 선교사들(특히 한국의 개신교에서 파견된)을 만나는 동안 선교사란 직업에 의심 의 눈초리를 떼지 못하고 있던 나에게 토마스의 정의는 갈증 끝에 만난 샘물 같다.

독일인 신부 토마스와 안드레아가 아스토르가가 한 눈에 들어오는 언덕 위에서 쉬고 있다.
독일인 신부 토마스와 안드레아가 아스토르가가 한 눈에 들어오는 언덕 위에서 쉬고 있다. ⓒ 김남희
"작년에 내가 읽은 책 중에 '예수는 없다'라는 제목의 책이 있어. 그 책을 읽으며 모든 목사와 신부, 신자들이 이런 믿음을 갖고 산다면 얼마나 평화로운 사회가 될까 생각했었어.

그 신학자는 성경이 진리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문자적으로 진리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믿고, 성공적인 교회라면 교인이 계속 자라나 목사나 교회의 도움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의 독립적인 사고와 믿음을 갖도록 해주는 곳이어야 한다고 말해.

지구와 인간이 겪고 있는 아픔에 '전지구적으로 반응'하고 이를 촉구하는 사람들이 바로 참된 의미의 종교인, 진정한 그리스도인이고, 이런 일을 위해 모인 사람의 무리가 곧 '교회'여야 한다고 말해. 그리고 신이 반드시 아버지일 필요는 없다고 말하기도 해."

"그럼. 맞는 말이지. 하느님이 반드시 아버지일 필요는 없는 거야. 우리는 신에 대해 정의를 내릴 수 없어."


이 길을 성지순례 목적으로만 걸어야 해?

"토마스, 넌 유럽의 교회들이 입장료를 받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해. 성당은 믿는 사람들에게 집이나 마찬가지인데, 집에 들어가는 데 돈을 내라고 하는 셈이잖아. 절도나 물질적 손상이 두려워 문을 걸어 잠근 교회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파. 성당을 유지하는 데 돈이 많이 든다면 신자들에게 기부를 요청해야지 입장료를 징수하는 식으로 해결해서는 안 된다고 봐. 교회는 '기부에 의존한 모금'이라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은 거야. 대신 입장료를 징수하는 쉽고 안전한 방식을 택하는 거지.

하지만 우리가 예수의 삶을 돌아보면 그분의 삶 자체가 위험과 모험으로 가득한 삶이었어. 그분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택했고, 어려운 길이라고 돌아가는 일도 없었어. 오늘날의 교회는 예수의 삶과는 멀어진 모습을 보이고 있어. 산티아고를 걷는 동안 만나는 스페인 신부들이 미사에서 보여주는 관습적인 모습은 또 어때?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어떠한 접촉도 없는, 그저 형식적인 미사잖아."


신을 믿는다는 건 내가 살고 있는 이 삶에 대해 책임지는 일이고, 지구 위에 벌어지는 아픔을 나누는 일이고, 내 손을 필요로 하는 이에게 기꺼운 마음으로 손 내미는 일이고,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모험조차 신에 대한 믿음 하나로 기꺼이 감수하는 게 아닐까? 교회의 성벽에 틀어박혀 내세에 대한 보증보험을 들어두는 게 아니라!

토마스는 이 길에 비종교적인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몰리는 걸 경계한다.

"카미노를 걷는 일을 스포츠로 즐기는 사람들 때문에 종교적 이유로 걷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다면 그건 부당하지 않아? 이 길은 원래 성지순례의 목적으로 이어져 온 길이잖아."

"하지만 이 길이 성지순례라는 종교적인 목적으로 걷는 사람만을 받아들이는 건 아니잖아? 일단 문을 열었다면, 약간의 손해도 감수할 각오를 하는 게 성숙한 태도가 아닐까? 종교적 이유만으로 걷는 사람들만 가득한 것보다는 서로 다른 이유로 걷는 사람들이 있는 게 더 재미있잖아. 나와는 다르게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어서 삶이 재미있는 것처럼!"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보니 시간은 금세 흐른다. 오늘 걷는 길은 도로를 따라 가는 짧은 길을 버리고 택한, 조금 돌아가는 길. 차가 다니지 않는, 사람의 발길도 뜸해 고즈넉한 길. 이제 메세타를 벗어나기에 초록 나무들이 드문드문 보여 눈과 마음을 행복하게 하는 길이다.

언제부터인가 걷는다는 행위는 내게 있어 명상이자 존재의 확인 방식이 되어버렸다. 나는 내가 걷고 있을 때 살아있음을 느낀다. 두 발로 걸어서 세상을 열어갈 때, 그 길 위에서 만나는 것들은 전혀 다른 의미와 몸짓으로 내게 다가온다. 걷고 있을 때, 그 때서야 겨우 열리고, 깊어지고, 넓어지는 나. 그게 나의 한계라 해도, 어쩌랴, 내 영혼의 그릇 크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을!

정오가 못 되어 빌라 데 마자리페에 들어섰다. 이 작은 마을에도 알베르게가 세 개, 슈퍼가 두 개나 있다. 내가 온 곳은 두 번째 알베르게. 작은 방마다 4명씩 자고, 인터넷 무료(일하는 청년에게 부탁해 한글까지 깔았다!)에, 작은 정원과 부엌도 있다.

이 곳에서 멕시코인 알렉스를 만났다. 부르고스 성당 앞에 세워둔 배낭을 도난당했던 그 알렉스이다. 바르셀로나에서 여권 신청하고 배낭과 장비를 구입해 부르고스에서부터 다시 걷기 시작했단다. 그런 상황에서 다시 돌아와 걷고 있는 그를 보니 존경심이 절로 인다.

독일인 마릴리, 안드레아, 뉴질랜드인 트리나, 크리스티나, 닐스크리스티안, 토마스와 저녁을 먹었다. 마릴리, 안드레아와 트리나가 요리하고, 크리스티나와 나는 식탁을 차리고, 설거지는 토마스와 닐스크리스티안. 저녁을 먹고 난 후 정원에 둘러앉아 토마스의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며 놀았다.

아스토르가 성당의 입구
아스토르가 성당의 입구 ⓒ 김남희

오늘 내 홈피에 누군가 이런 글을 올렸다.

Work like you don't need the money,
Love like you've never been hurt,
Dance like nobody's watching,
Song like nobody's listening,
Live like it's Heaven on Earth.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춤추라,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살아가라, 여기가 천국인 것처럼.)


오늘, 천국이 이 작은 마을에 내려앉았다.


2005년 7월 19일 화요일 맑음
오늘 쓴 돈 : 빵 1 + 쥬스, 빵 1.7 + 숙박 3 + 장 본 비용 10.1 + 엽서 0.8 + 빵 0.8 + 쵸콜릿 2.8 = 20.2유로
오늘 걸은 길 : 빌라데마자리페(Villar de Mazarife) - 아스토르가(Astorga) 32km


오전 6시에 숙소를 나선다. 오늘은 옥수수밭 사이 도로를 따라 걷는다. 한 시간 남짓 걸으니 한갓진 길로 들어선다. 오전 9시. 오스텔 데 오르테가(Hostel de Ortega) 도착. 이 작은 마을에도 알베르게가 세 개나 있다.

마을 끝에서 아스토르가로 가는 길이 갈라졌다. 나는 1km를 더 가야 하지만 찻길을 따라가지 않는 길로 들어선다. 나무와 숲이 보여 한결 눈이 편하다. 두 번째 마을 바에서 주스와 크로아상으로 아침을 먹었다. 이제 10km 정도 남은 것 같다.

언덕을 넘어 아스토르가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에서 잠시 휴식. 이제 길은 도로를 따라간다. 아스토르가의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오후 1시. 장을 봐서 파스타를 만들어 안드레아, 닐스크리스티안, 트리나, 캐시와 나눠 먹었다.

미국인 아줌마 캐시의 작은 수첩에는 사소한 것들까지 자세하게 적혀있다. 이 여행을 준비할 때 고등학생인 둘째 아들이 엄마에게 그 수첩을 선물했다고 한다. 2년 후에 이 길을 걸을 아들을 위해 정보를 남기는 엄마. 따뜻하고 정겨운 모자간이다.

한숨 자고 일어나니 저녁 7시. 이미 박물관 문은 다 닫았다. 시내를 돌아보고 들어와 샐러드와 빵, 와인으로 다시 다섯 명이서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는 동안 옆 자리에 앉은 커플과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햇볕에 탄 검은 피부와 유난히 초라한 행색이 궁금했는데, 집의 현관문을 나서면서부터 걷기 시작해 지금 95일째 걷고 있다고 한다. 코웬과 케이트 커플, 그들의 집은 영국, 런던 남서쪽이라고 한다. 정해진 길이나 안내서도 없어 무작정 지도를 보며 길을 창조하며 걸어왔다는 그들.

증명서에 도장을 받을 마땅한 곳도 없어 심지어 맥도널드나 마을의 작은 술집, 식당에서도 사인과 도장을 받았다며 증명서를 보여준다. 언젠가 영국을 걸어서 여행하고 싶다고 하니 자신들이 가진 수많은 정보를 열심히 나눠주고, 영국에 오면 만나자며 집 주소와 연락처를 적어주는 코웬과 케이트.

서로가 서로에게 지팡이가 되고, 따뜻한 음식이 되고, 시원한 물이 되어 먼 길을 걸어가는 두 사람의 사랑이 오래 오래 가기를.

스페인이 낳은 천재 건축가 가우디가 지은 건축물 팔라시오 에피스코팔. 아스트로가
스페인이 낳은 천재 건축가 가우디가 지은 건축물 팔라시오 에피스코팔. 아스트로가 ⓒ 김남희

2005년 7월 20일 수요일 맑음
오늘 쓴 돈 : 숙박 5 + 점심 5.1 + 인터넷 0.5 = 10.6유로
오늘 걸은 길 : 아스토르가(Astorga) - 라바날 델 카미노(Rabanal Del Camino) 21km


5시에 일어나 오믈렛과 빵으로 다 같이 아침을 먹고 길 위에 오른다. 첫 마을까지는 도로를 따라 가는 길. 오전 7시. 첫 마을 도착.

길은 이제 초록덤불이 듬성한 황무지가 이어진다. 아침 햇살이 세상을 부드럽게 비추고 있다. 오전 8시. 두 번째 마을 도착. 돌집이 늘어선 예쁜 마을이다. 연달아 나오는 알베르게들도 예쁘다.

이 길에선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해

오늘 길 위에는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을까. 적어도 50명은 내 앞을 스쳐간 것 같다. 스페인 사람들의 활기와 수다가 이른 아침에는 부담스럽다.

오전 11시가 못 되어 오늘의 목적지 라바날 델 카미노에 도착했다.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가 두 시에 문을 연다기에 기다리기 싫어 사설 알베르게에 짐을 풀었다. 빨래하고, 짐 정리하고 난 후 바에서 간단한 점심을 시켜 먹었다.

저녁 7시. 성당의 미사에 참석했다. 베네딕토 수도회의 전통은 '그레고리안 첸트'로만 미사를 진행하는 거라고 했다. 세 명의 수사님들이 부르는 그레고리안 첸트는 어떤 신부님의 설교보다 마음을 흔들었다. 맑고, 투명한 목소리들이 작고 낡은 교회의 지붕 위로 울려 퍼지는 밤, 신도 그 노래를 듣기 위해 몸을 낮추고 내려올 것만 같다.

미사가 끝난 후 수도원 소속의 '순례자를 위한 휴식의 집'에서 일하는 크리스틴을 만났다. 그녀는 내게 몸과 마음의 휴식이 필요하면 이 곳에서 머물다 가라며 집을 안내했다. 그곳의 독서실과 명상방, 물소리가 차오르는 작은 정원을 본 순간, 그곳에 머물기로 결심했다.

지금 이토록 복잡한 내 머릿속이 이틀간의 명상과 휴식으로 깨끗해질 리 없겠지만, 나에게는 지금 무엇보다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하기에. 나에게 산티아고 걷기의 최대 적은 혼자일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적다는 것이다. 사람들 속에서 혼자 있는 법을 배우지 못한 나. 소음 속에서 정적을 찾는 법을 배우지 못한 나. 그런 나에게 이렇게라도 휴식의 시간을 주고 싶다.

이른 새벽 미명이 걷히기도 전에 길을 나서는 순례자들. 라바날 가는 길.
이른 새벽 미명이 걷히기도 전에 길을 나서는 순례자들. 라바날 가는 길. ⓒ 김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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