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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김유자
산책을 떠나려고 길을 나섰습니다. 집 골목을 돌아서자마자 한 아주머니가 간짓대로 호두를 따고 있었습니다. 아주머니는 가지 몇 개밖엔 따지 않고 집안으로 금방 들어 가셨습니다. 아마 호두를 까먹으려고 따는 것보다는 심심풀이 삼아 갖고 놀려고 따신 것 같았습니다.

오랜만에 구경하는 호두 따기 광경이 참 보기에 좋았습니다.

ⓒ 김유자
동네를 벗어나려는데 이번엔 연세 지긋하신 아주머니가 혼자 고구마를 캐고 계시는 광경이 눈에 띄었습니다. 다가가서 말을 붙였습니다. 그냥 시장에서 사다 드시지 고생스럽게 고구마 농사를 지으시느냐고 했더니만 대뜸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지 혼자 목구멍만 생각험사 뭘라 이 고생을 허겄시유?"

보나마나 추석에 내려올 손자 녀석들 간식거리로 쓸 고구마를 마련해 두시려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 김유자
길을 조금 더 가자 이번엔 끝물이 다 된 고추를 따고 있는 부부를 만났습니다. 요 며칠 근처를 돌아다녀보니 고추밭마다 병충해 안 입은 곳이 없었습니다.

올 김장 때 고추값이 얼마나 뛰어 오를지 벌써부터 걱정이 드는군요.

ⓒ 김유자
아저씨, 아주머니가 모종을 옮겨 심은 배추밭에 나와 일하시고 계셨습니다. 아저씨는 배추 모종에다 열심히 방충제를 뿌리고 있는데 양산을 받쳐든 아주머니는 한가하기만 합니다.

'따로국밥'이란 말이 떡 들어맞는 경우가 아닌가 싶어 저절로 웃음이 나오더군요.

ⓒ 김유자
밤톨이 제대로 여물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저씨 두 분이 밤 터시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글쎄요, 밤을 따기엔 아직은 좀 철이 이르지 않을까요?

밤나무 가지를 상하지 않게 딸 수 있는 간짓대는 폼으로 옆에 놔두고 밤나무를 마구 후드려 패서 밤송이를 떨어뜨리고 그걸 광주리에 주워 담으시더군요.

밤나무에 가시가 왜 많은 건지 생각하게 만드는 순간이었습니다.

ⓒ 김유자
이제야 배추 모종을 옮겨 심는 부부를 보았습니다. 근처에 사신다는 이 부부는 정년퇴직 후 취미삼아 주말 농장을 하신답니다. 두 분 다 수건을 둘러쓰고 계셔서 어느 쪽이 부인인지, 남편인지 구별이 안 되지요?

왼쪽이 부인이고 오른쪽이 남편이랍니다. 요즘은 남자들의 피부 관리도 장난이 아니더라구요. 햇볕에 얼굴이 탈까봐 수건을 부인보다 더 푹 둘러썼으니 말입니다.

ⓒ 김유자
갑자기 산자락이 온통 연기로 가득합니다. 누가, 무엇을 태우는 중일까요? 가만히 다가가서 봤더니 마른 깻단을 태우시더군요. 한 아저씨가 불을 놓고 계셨고, 아주머니는 연기가 매웠던지 잰걸음으로 그 자리를 피하고 계셨습니다.

ⓒ 김유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연세가 얼마나 되셨는지 모르지만 머리가 허옇게 센 할머니가 고구마밭 고랑에 앉아서 고구마 순을 다듬고 계셨습니다.

"할머니, 일하지 마시고 그냥 쉬시지 그래요?"
"아, 죽으면 몰라도 아즉까진 살았응게 꼬무락거려야제."

할머니는 천천히 고구마 순을 벗기십니다. 저 연세가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고구마순을 벗기고, 그걸로 요리를 만들어서 가족에게 먹였을까요?

할머니의 흰 머리가 새삼 고귀해 보였습니다.

ⓒ 김유자
할머니에서 손자에 이르기까지 온 가족이 출동해서 고구마를 캐고 있습니다. 잇몸약 광고던가요? 가수 셋이서 고기를 먹으면서 누군가 "고기는 씹는 맛이지"라고 너스레를 떠는 장면이 생각납니다.

이 가족은 지금 "고구마야 먹는 맛보다 캐는 맛이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실패로 끝난 주말농장에 대한 꿈

이렇게 해서 제 주말 농장 구경은 끝이 났습니다. 갑자기 정현종 시인의 시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가 떠오르더군요.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앉아 있거나
차를 마시거나
잡담으로 시간에 이스트를 넣거나
그 어떤 때거나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그게 저 혼자 피는 풍경인지
내가 그리는 풍경인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사람이 풍경일 때처럼
행복한 때는 없다

정현종 시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 전문


시가 아니라도 사람이 자기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풍경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 아닌가 합니다. 그 풍경을 바라보노라면 저절로 행복해집니다.

저도 내년엔 주말 농장 한 자락을 얻어 저렇게 풍경으로 피어나 볼 작정입니다.

전에 험하게 '초보' 딱지를 뗐으니 설마 다음에야 또 농사를 영 망치기야 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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