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990년대가 시작되면서 제가 발견하게 된 이상스런 현상 가운데 하나는 LP의 갑작스런 퇴장이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대전 시내 레코드 가게들에서 LP들이 거의 동시에 사라져버렸던 것입니다. 그 대신 CD라는 낯선 물건이 레코드 가게 진열장을 채웠습니다.

비틀즈니 밥딜런이니 젊은 시절부터 이럭저럭 모아 놓은 LP가 200여 장 가까이 됐지만 전 이 새로운 변화에 쉽게 동화돼버렸습니다. 그때는 마침 오디오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쑥스러운 제 전축의 턴테이블이 고장나 있던 때라서 더욱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제 LP들도 그때부터 지금까지 15년 동안을 전축 아래에 있는 진열장에서 쿨쿨 잠자고 있는 것이지요.

소설의 주인공은 한 장의 레코드

▲ 책 표지
ⓒ 작가정신
그 때문인지 '레코드가 쓴 자서전"이라는 부제가 붙은 <책의 자서전>의 작가 안드레아 케르베이커가 쓴 신작 소설 <33과 1/3>을 읽는 마음은 더없이 각별했습니다.

<33과 1/3>이라는 책 제목은 1분에 33번, 정확히는 33과 1/3번 회전하기 레코드의 특성에서 따온 것일 겁니다.

십오 년 동안 옷장 속에 잊혀진 존재로 처박혀 있다가, 주인의 손에 이끌려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되는 한 장의 레코드가 이 소설의 주인공입니다.

'나'를 구입한 사람은 쉰 살 된 로렌초라는 사람입니다. 열네 살 때 처음 '나'를 샀던 소년은 자라면서 독립하고 결혼을 하고나선 음악을 잊어버리고, 그가 아껴왔던 레코드들을 버리게 됩니다. 수많은 다른 LP들처럼 버려지지 않은 것은 이 LP가 그가 샀던 최초의 음반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라고 지칭하는 이 앨범은 자신이 누가 부른 어떤 음반인지 끝끝내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지스의 '새터데이 나이트 피버'나 캣 스티븐스가 작곡한 '티 포 더 틸러먼'이란 앨범 등과 친한 걸로 봐서 '나'는 1970대에 태어난 듣기 편한 이지리스닝 계열의 록 앨범 가운데 하나일 것으로 추측할 수는 있습니다.

작가는 더 이상 주인공인 '나'에 관한 정보를 털어 놓지 않는 대신 독자들 스스로 이것이 무슨 앨범일까를 추측하도록 유도하면서, 당시의 노래들을 하나하나 더듬어보는 재미를 느끼게 하려는 장치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롱 속의 잡동사니들 속에서 답답하기만한 생활을 하다가 밖으로 나온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바로 6,70년대에 유행했던 LP들의 재킷을 전시하는 전시회였습니다. '나'에게는 정말 멋진 변화였으며 그야말로 '장밋빛 인생'이 펼쳐지고 스스로 자부심을 갖기에 이릅니다.

주인공인 '나'는 여러 록 그룹과 그들의 음악을 언급하며 옛 노래들을 추억 속에서 끄집어냅니다. 밥 딜런의 허스키한 목소리, 믹 재거의 목쉰 외침, 레너드 코헨의 우울한 음색, 자신감에 넘치는 비틀즈, 언제나 자유분방한 레드 제플린 등등….

'나'의 주인인 로렌초는 이런 LP들을 들으면서 소년 시절을 보냈고 어른으로 성장했습니다. 이런 종류의 음악을 들으면서 사랑에 빠지고, 우정을 쌓아가고, 세상을 배워나갔습니다.

전시회에서 사방 10cm밖에 안되는 CD라는 음반을 처음 만난 '나'는 혼란스러워합니다. '나'는 1970년대 후반에 출시된, LP시대의 마지막 음반인 영국 록 그룹의 다이어 스트레이츠의 음반인 <메이킹 무비스>에게 "지금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내게 이야기 좀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나 "무슨 변화가 일어난다는 거예요? 아무 일도 없어요'라는 퉁명스런 대답이 그가 들은 이야기일 뿐이었습니다.

마침내 전시회가 끝나가고 거기 출품된 100여 장 LP들은 모두 우울해 합니다. 그때 전시장 끝에서 존 레논의 <이매진>을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가 들려옵니다. 레코드들은 한 데 뭉쳐 <이매진>의 후렴구를 합창합니다. 그리고 <노킹 온 헤븐스 도어> 등 LP시대를 대표한다고 알고 있던 모든 곡을 밤새도록 합창합니다.

훌륭한 존 레논. 우리의 역할을 상기하기 위해 그가 필요했다. 그 어떤 옷장 속에 갇힌다 해도 뺏길 수 없는 역할. 우리는 한 세대의 시민의식이었다. 기술의 발달로 인해, 크기가 너무 큰 우리, 우리의 음반이 구식이 되어버린 오늘 날에도 그 결과에 대해서는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다. 밤이 새도록 우리는 우리 시대를 대표한다고 알고 있는 곡들을 모두 다 불렀다. 아침이 되자 우리는 모두 눈 한 번 붙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피곤해서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우리는 존에게 다시 피아노를 연주해달라고 부탁했다. 언제나 우리 꿈의 동반자였던 그 부드러운 음을 들으면서 우리는 유토피아로 가득 찬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소설 <33과 1/3>의 전개 과정은 안드레아 케르베이커의 전작 <책의 자서전>과 비슷합니다. <책의 자서전>은 밀라노 고서점에서 네 번째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60년 된 책이 주인공이었지만 이 책에서는 33년 된 LP가 주인공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지요.

사회적 의미를 상실해버린 음악에 대한 완곡한 비판

저자 안드레아 케르베이커는 누구?

1960년 이탈리아 밀라노 태생인 안드레아 케르베이커는 1997년에 '현미경으로 본 일상의 영상'이라 평가받은 단편집 <사진>으로 이탈리아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바구타상 신인상을 받으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가부장Pater Familias>(2001)과 <책의 자서전Diecimila>(2003)을 발표했다. 특히 한때 베스트셀러였던 책이 네번 째 주인을 맞이한 자신의 기구한 사연을 들려주고 있는 <책의 자서전>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번역되어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안드레아 케르베이커는 1만 2000권의 장서를 지닌 대단한 독서가로 알려져 있다.
/ 김유자
<책의 자서전>에서 주인공인 책과 함께 지냈던 수많은 동료 책들과 그 작가들에 대한 흥미 있는 평가를 했던 것처럼, 저자는 이 책에서도 1970년생인 '나'라는 앨범과 함께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많은 음반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옛날 레코드 전시회에 전시된 '나'가 들려주는 옛날 음반 이야기는 우리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음악과 그 음악이 주는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소설입니다.

LP시대 팝의 명곡들에 대한 이야기는 읽는 이를 매우 흥미롭게 합니다. 책의 두께는 겨우 90여 쪽에 지나지 않지만 글 중간 중간에 나오는 우리에게 익숙한 노래와 그 노래에 얽힌 추억들을 곱씹느라 책을 읽는 진도는 쉽게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새로 출현한 CD를 바라보던 '나'의 다음과 같은 술회가 아마도 작가가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아닌가 합니다.

경음악은 사회의 문화적 유산에서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예전처럼 오늘도 경음악을 듣고 음반을 소유했다. 그렇지만 이제 음반은 그들을 둘러싼 사회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그들은 음악이었고 그것으로 족했다. 우리는 진보의 일부분이었다.

책을 읽는 동안은 사라져 가는 것들, 사라질 운명에 처한 것들이 가진 의미를 더듬어 본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펴낸 곳:작가정신
펴낸이:안드레아 케르베이커
책값: 8,500원


책의 자서전 - 어느 베스트셀러의 기이한 운명

안드레아 케르베이커 지음, 이현경 옮김, 열대림(2004)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