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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사람의 필요에 의해, 사람이 다님으로써 태어난다. 그러므로 세월이 흘러 사람이 사라지면 길도 사라진다. 그렇게 사라져가는 옛길을 걷다 보면 적막감과 외로움이 숲 속에 가득 차 있다.

장사치들과 짐 싣는 말 그리고 호랑이가 공존하던 시절을 기억하는 길은 이제는 텅 비어 있다. 텅 빈 옛길을 걸으며 사라진 세월을 마주하면 시간과 역사의 무상함과 생의 덧없음을 반추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그런 길이 넘어가는 고개들이 조침령, 북암령, 박달령이다.

양양과 백두대간 너머 지역을 잇는 고개 중 한계령과 구룡령 외의 고개를 제외하고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은 고개들이 조침령, 북암령, 단목령이다. 양양에 있는 이 다섯 개의 고개 모두가 양양군 서면에서 인제 혹은 홍천으로 넘어가는 길에 자리 잡고 있다. 서면뿐 아니라 양양군 현북면 또한 백두대간과 접해 있지만, 유독 서면에만 고개들이 나 있는 까닭은 대간 너머에 마을과 주민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침령, 북암령, 단목령은 대간을 가운데에 두고 양양, 인제, 홍천에 살던 선질꾼, 마꾼과 같은 생선장수, 소금장수, 젓갈장수들이 양양장을 보거나, 수산물을 팔기 위해 왕래했던 고개이다. 선질꾼은 등에 바지게나 통지게를 지고 물건을 싣고 다니며 팔던 이들이고, 말을 가지고 물건을 실어 날랐던 이들은 마꾼이라 한다. 서림에서 조침령으로 올라가다 보면 초입의 새림골부터 굴아우골까지 11개의 골들이 고개길 좌우로 있는데, 이 골들에 이들이 쉬어가던 주막이 십여 개 남짓 있었다고 한다.

새도 자고 넘는다는 조침령

그 중에 강원도 양양군 서면 서림리와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를 연결하는 조침령은 해발 750m의 고개이다. 증보문헌비고에서는 '떨어질 조阻', '가라앉을 침沈'자를 써서 조침령(阻沈嶺)이라 하였으나, 근래의 백두대간 종주자들은 '새도 자고 넘는다는 고개'라는 뜻으로 조침령(鳥寢嶺)으로 표기하고 있다.

양양문화원에서 발행한 <양양의 땅이름>과 <양주지>에서는 증보문헌비고와 표기는 같으나, 다만 침자만 '베개 침枕'자로 표기하고 있다. 하여튼, 한계령이 1004m이고, 구룡령이 1013m인데, 그보다 훨씬 낮은 750m 고개인 조침령을 새도 자고 넘는다고 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예로부터 조침령은 말을 타고 다니기는 쉽지만 실제론 먼 길이라 했던 걸로 봐서는 구절양장 먼 길이라 그리 부른 듯싶다. 그래서 조침령을 '좆칠령'이라고도 했다 한다.

조침령도 구룡령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길이 본래의 옛길이 아니라고 한다. 본래의 옛길은 현재의 조침령보다 남서쪽에 위치한 '쇠나드리' 근처를 넘었다고 한다. 지금의 조침령은 20여 년 전 군부대가 놓은 새길이며, 예전에는 '반평고개'라 불렀다 한다. 반평고개라 한 까닭은 서림마을에서 조침령으로 가는 중턱에 5만여 평에 달하는 평지가 있는데, 소반 같이 평평하다 하여 '반평(반부둑')이라 부른 데서 따온 것이다.

그 반평고개에 지금은 동홍천-양양간 고속국도를 닦느라 터널도 뚫고, 포장공사도 하고 해서 옛길의 정취를 모두 삼켜버렸다. 그러니 사라진 옛길의 추억을 찾아 이제는 쇠나드리쪽 길을 다시 개척해보는 것이 진정한 옛길 순례꾼의 자세가 아니겠는가.

옛길 그대로의 정취를 간직한 북암령

조침령이 도로공사로 옛길이 사라져 버렸지만, 그 북쪽에 위치한 북암령과 박달령은 아직도 옛길 그대로이다.

북암령(928m)은 양양군 서면 북암리에서 서쪽 2km가량 지점에 있으며, 양양에서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로 가는 고개이다. 북암리는 미천골 선림원지에서 북쪽에 위치한 암자가 있었다 하여 북암리라 했으며, '북애미'라고도 부른다. 양양을 사투리로 '예양'이라 부르는 것처럼.

북암령을 가기 위해서는 먼저 서면 송어리로 가야 한다. 서면 논화리에서 오색 방향으로 빨딱고개를 올라 정상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왼쪽으로 길이 나있는데 그 길로 접어들면 송어리이다. 그 송어리에서부터 북암령 올라가는 길이 시작된다. 송어리에서부터 뚫려 있는 임도를 따라 40분 정도 걸으면 북암리가 나오고, 계속 임도를 따라 올라가면 약 1시간 정도면 북암령에 도착할 수 있다.

북암령 정상 일대는 매우 넓은 평지로 멧돼지들이 파헤쳐 놓은 흔적들이 널려 있다. 조침령에서 이곳 북암령까지의 길에서는 멀리 푸른 동해를 바라볼 수 있으며, 밤에 야영을 하면 밤바다를 수놓은 불빛과 하늘에 가득 찬 별빛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북암령에서 북쪽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박달령까지는 넉넉히 2시간 거리이다.

설피밭 가는 길, 박달령

박달령(809m, 단목령檀木嶺이라고도 한다)은 점봉산에서 내려온 잘록한 고개목으로써 조침령, 북암령과 마찬가지로 양양군 서면 오색의 마산에서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를 잇는 고개이다. 1217년(고려 고종 4년) 김취려 장군이 거란군을 제천, 원주에서부터 추격하여 이 곳 박달령에서 섬멸했다고 양양지방에 전해내려 온다. 그러나 실제로는 1216년에 침범한 거란군을 1217년에 김취려 장군이 전군병마사가 되어 충북 제천군 박달령에서 크게 무찔러 격퇴시킨 것으로 옛 문헌에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고개 이름이 같은 것에 주목한 누군가 이야기를 와전시킨 것이 지금껏 전해 내려오는 듯하다.

옛적부터 박달령을 넘는 길은 현재 오색초등학교가 있는 박달마을에서 시작한다. 오색마을 사람들은 '박다룩'이라고도 하고, 학교가 있다 하여 '학교마을'이라고도 한다. 옛적에는 산 형국이 말 같기도 하고, 조선 초에 오색역을 거쳐 갈 때 이 곳에서 말을 갈아타고 갔다고 해서 '마산(馬山)'이라고 불렀다.

오색초등학교 맞은편 오색천에 놓여진 돌 징검다리를 건너 박달골을 따라 넉넉히 2시간이면 박달령 정상에 도착할 수 있다. 한참 오르다 보면 우거진 풀숲에 가려진 길을 찾기가 쉽지 않는 곳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한낮에도 어두컴컴한 원시림 숲 속을 산책하듯 걷다보면 중턱쯤에는 장년의 두 팔 폭 정도의 난치나무가 있는 난치고개에 이르게 된다. 이 고개에 대한 오색리 홍창해 이장님의 설명이 재미있다.

'난치나무란 오래된 단풍고목을 이야기하며 박달령 오르는 길 주위에는 박달나무와 단풍나무가 유난히 많습니다. 난치고개 주변에는 머릿짐이나 지게를 올려놓기 좋을 만큼의 돌들이 쌓여 있는데 고개를 오르던 아낙네들은 혼자서 머릿짐을 내리고 다시 올리기 좋도록 높이를 맞추어 놓은 돌들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가쁜 숨을 죽이고 다시 단목령을 오릅니다.'

그렇게 가쁜 숨을 죽이고 오르다 보면 가파른 경사가 시작되는 데 정상까지 약 1km 정도 남겨둔 지점이다. 정상에 오르면 활엽수림이 나타나는데 이 구간이 바로 남한 최대의 원시림구간이다. 박달령 마루턱에서 서북쪽으로 보이는 우뚝 솟은 산이 바로 점봉산이다.

덧붙이는 글 | 설악산 밑동네 양양군 서면 장승리에서 태어나 양양에서 25년을 살면서, 구석구석 놀러다녔던 기억과 양양에 관한 각종 자료를 참고로 해서 쓰고 있습니다. 

이 글을 여행기라 하지 않고 향도기(嚮導記)라 한 이유는 양양의 가볼 만한 곳을 안내하면서 유래, 전설, 풍경의 배치, 구성, 인심 등을 서술하여 양양을 여행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뜻에서 쓰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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