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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지 부도탑. 회암사지의 끝 천보산 바로 아래 있다.
회암사지 부도탑. 회암사지의 끝 천보산 바로 아래 있다. ⓒ 이승열
회암사지가 명치끝에 걸려 있다. 벌써 스무날이 넘게 명치끝에 단단하게 박혀 날 압박하고 있다. 시험 일정 발표되면 괜히 안하던 짓 하면서 시간 끌면서, 공부하기 싫어 용쓰는 수험생 같다. 쓰지 않을 이유와 핑계만 계속 찾고 있다. 계획표 짜는데 하루, 필통 정리하는데 또 하루, 그것도 모자라 책상 홀랑 뒤집어 놓고 정리하면서 스무날째 시간을 끌고 있다.

두 번째 회암사지에 서 있다. 긴 세월 흙더미 속에서 이제 막 모습을 드러내며 고스란히 자신의 이야기하고 있다. 흙더미 속에 세월을 묻어 두고 잊고 사는 것은 인간뿐이다. 회암사지에 올 예정은 전혀 없었다. 마지막 피서를 즐기려는 차들이 거리를 주차장으로 바꿔 버린 지 오래였다. 목적지를 정한 채 나선 길은 아니었다. 발길 닿는 대로… 아니 길 막히지 않는 골목을 찾아 헤매다 보니 바로 그 곳에 회암사지가 있었다.

회암사지 부도탑의 조각들. 크기가 나라안에서 손꼽힌다 한다. 비늘 덮힌 기린은 천마의 모습으로 성인이 나타난다는 상상 속의 동물이다.
회암사지 부도탑의 조각들. 크기가 나라안에서 손꼽힌다 한다. 비늘 덮힌 기린은 천마의 모습으로 성인이 나타난다는 상상 속의 동물이다. ⓒ 이승열
3년 전쯤 가을 회암사지에 선 적이 있었다. 쌓여진 흙더미 속에서 돌들이 천년의 옛 이야기들이 토해내며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짝 잃은 당간지주는 긴 세월 군부대에서 뒹굴다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어설프게 폐사지 한 귀퉁이에 세워져 있었다. 돌멩이 옆에 군부대가 그 앞에 거대한 공장이 함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우선 유물관에 들렀다. 몇 년 동안 발굴현장을 찍어 놓은 사진들을 보고, 컴퓨터로 만든 자료 화면을 보며 설명을 듣고 나니 욕심이 생겼다. 이미 내 속에 둥지 틀기 시작한 저 장중한 회암사지를 내 언어로 설명하고 싶어서 저지른 일이었다.

<오마이뉴스> 여행 란에 가끔 글을 올린다고 소개하고 안내를 부탁했다. 이미 회암사지 이야기를 독자에게 전하기에는 실력이 턱없이 모자라고 무리라는 것을 알고도 저지른 일이었다. 미리 공문을 보내 신고해야 하나 기꺼이 안내를 해 주었다.

역사를 전공한 것도 아니고, 문화재에 대해 특별한 지식도 없는데, 치기만으로 덤벼들 회암사지가 아니었다. 손에 잡히는 특별한 건물이 있는 것도 아니요, 끝없이 쌓여있는 돌무더기와 이미 쓰임이 없어진 우물, 풀 섶에서 뒹굴고 있는 맷돌이 전부였다. 그런데 그 돌들이 날 놓아주질 않고 있었다.

평소대로 횡하니 둘러보고 가슴에만 넣어두고 나왔으면 좋았을걸 결국은 후회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안내를 부탁했다. 회암사지 이야기를 쓰지 않는 한 더 이상 여행기를 쓸 수 없다는 사실까지도 알고 있었다. <오마이뉴스>를 팔아 안내를 받고는 시치미 뚝 떼고 있어도 실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언제나 문제는 이 알량한 양심이 문제다. 서푼어치짜리 값어치도 되지 않는 양심! 모든 게 헝클어져 버렸다.

계단 소맷돌의 선명한 조각. 아래 검게 보이는 부분은 땅속에서 세월을, 윗부분은 드러난 채 세월을 보냈다.
계단 소맷돌의 선명한 조각. 아래 검게 보이는 부분은 땅속에서 세월을, 윗부분은 드러난 채 세월을 보냈다. ⓒ 이승열

3단지의 거대한 맷돌. 동시 식사할 수 있는 인원이 2천을 넘었다 전해진다.
3단지의 거대한 맷돌. 동시 식사할 수 있는 인원이 2천을 넘었다 전해진다. ⓒ 이승열
회암사지, 발굴기간만 10년... 현재 발굴된 건물만 54동

해바라기 하며 돌무지 위에 앉아 인생의 덧없음을 느끼며 약간은 진부해진 채 내 속으로 깊이 아주 깊이 침잠하기 좋은 곳 폐사지. 하나 역시 표현이 문제였다. 자신처럼 역사를 전공하고 발굴 작업에 참여하는 사람을 ‘땅군’이라고 표현한 박종규 연구원(경기문화재단 기전문화재연구원 소속)은 느낀 대로, 보이는 대로 그대로 표현하면 된다고 격려했다.

97년 시작한 발굴이 2007년이 되서야 끝날 예정이니 발굴에만 꼬박 10년 세월이 걸리는 셈이었다. 지금까지 발굴에서 드러난 건물만도 54동, 전체 시설의 70% 구들을 놓았던 온돌방. 그 역사가 500년 가까이 땅속에 묻혀 있었다. 실제로 50년대까지 흙으로 덮인 이 회암사지 위에서 사람들은 농사를 짓는 생활의 터전이었다고 한다. 기껏 2m 아래 유구한 역사를 간직했던 사찰이 있었음은 여기저기 뒹구는 돌들하며 바람이 전해주어 알고 있었을 것이다.

조선 건국에 지대한 공을 끼친 무학대사로 인해 국가와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온 양주 회암사는 이성계가 왕위를 양위한 한 후 수도생활을 한 사찰로 유명하다. 연산군의 대대적인 불교 탄압에도 불구하고 명맥을 이어가던 회암사가 다시 부흥기를 맞은 것은 명종 대, 당시 문정왕후의 신임을 받고 있었던 승려 보우는 회암사를 부흥의 거점으로 삼았으나, 갑작스런 문정왕후의 사망으로 보우도 회암사도 역시 그 후 퇴락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나팔 모양을 주계단 입구. 이 곳으로 가야만 정청에 닿을 수 있다. 각 보조 계단은 폐쇄된 담장까지만 출입이 가능한 구조.
나팔 모양을 주계단 입구. 이 곳으로 가야만 정청에 닿을 수 있다. 각 보조 계단은 폐쇄된 담장까지만 출입이 가능한 구조. ⓒ 이승열

빽빽히 들어선 전각들, 그리고 그를 지탱하는 돌무지. 이곳보다 규모가 큰 곳이 많았으나 엄청나게 웅장하게 느껴졌다.
빽빽히 들어선 전각들, 그리고 그를 지탱하는 돌무지. 이곳보다 규모가 큰 곳이 많았으나 엄청나게 웅장하게 느껴졌다. ⓒ 이승열
총 262칸의 전각들로 이루어진 동방 제일의 가람에는 15척(4.5m)의 불상 7구, 10척(3m)의 관음상이 봉안되어 있었다고 목은 이색의 ‘천보산 회암사 수조기’에 자세히 기록하여 놓았는데, 현재 발굴로 드러난 모습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 그 당시의 웅잠함을 증명한다.

만행 중에 만난 승려들이 서로가 회암사 출신임을 몰라 서로 어느 방장 아래 소속된 승려인지 물을 만큼 큰 규모를 자랑했다고 한다. 쌀 씻는 함지박이 빠져 죽을 정도 규모가 컸다하는데 공간의 규모는 만평 정도로 그리 크지 않았다 한다. 공간 안에 빽빽이 자리 잡은 건물들 때문에 거돈사지 같은 폐사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훨씬 더 넓고 웅장하게 보인다는 것이 박종규 연구원의 설명이다.

회암사는 천보산 남쪽에 계곡을 메워 계단식으로 8단지의 평지를 조성한 뒤 그 위에 건물들을 배치하였다. 절 입구 중앙 계단에 삼도가 있어 신분에 따라 출입처가 엄격히 제한됐음을 알 수 있다. 단지 내부마다 담장이 쳐 있어 다른 건물에 이를 수 없는 폐쇄적 구조를 가지고 있어 어느 길로 들어서느냐에 따라 도달할 수 있는 곳이 달랐다.

퇴위한 태조 이성계의 수도생활... 문정왕후 죽음 이후 퇴락의 길

보도와 계단을 따라 걸으면 절의 중심 건물인 보광전에 이르게 된다. 보광전 뒤에 온돌 구조를 갖춘 요사채가 배치되어, 왕의 행차 시 왕이 거주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제일 위쪽 8단지의 정청은 바를 정(正)자 모양의 건물로 궁궐지에서만 출토되는 청기와가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곳이다. 정청 근처의 계단식 정원은 역시 경복궁 꽃계단을 연상시키며 이곳이 궁궐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절임을 입증하는 자료가 된다.

서승당지의 'ㅌ'자 구들장. 왕의 행차시 호위했던 무사들의 숙소로 추정된다.
서승당지의 'ㅌ'자 구들장. 왕의 행차시 호위했던 무사들의 숙소로 추정된다. ⓒ 이승열
8단지 정청 아래 서승당 역시 한번 불을 때면 온기를 49일이나 간직했다는 경남 하동의 ‘칠불암 아자방’과 같은 온돌 시설을 갖춘 시설로 왕의 행차 시 호위 군사들이 최측근에서 머물던 시설로 추정된다. 요즘 말로 하자면 5분대기조처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왕의 신변을 보호하고 있던 셈이다. 칠불암 아자방의 온돌 규모보다 더 큰 자음 ‘ㅌ’자 모양으로 생긴 구들의 골들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능선을 깎아 계단식으로 평지를 구성하면서 계곡물을 사찰 경내로 끌어들여 작은 폭포며 물소리까지 사역 내부에서 감상할 수 있게 했다. 인간의 쓰임새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자연을 손질은 하되 그 뜻은 거스르지 않은 인간과 자연이 둘이 아님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관솔가지와 송진으로 불을 밝히던 정료대. 석등이 아니라 정료대로 불을 밝힌점이 이채롭다.
관솔가지와 송진으로 불을 밝히던 정료대. 석등이 아니라 정료대로 불을 밝힌점이 이채롭다. ⓒ 이승열
일반 사찰에서 발견되는 석등의 양식과 달리 정료대를 각 단지마다 만들어 그 위에 관솔 가지와 송진을 올려놓고 불을 밝혔다. 송진이 타며 밤을 밝혔을 회암사의 야경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장관이다. 석등이 아닌 정료대로 밤을 밝힌 점 또한 이곳이 왕실과의 깊은 관계를 보여주는 점이다.

그 동안의 발굴로 폐사의 원인이 화재임을 확인되었지만 언제인지 동기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명종실록에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태우려 한다’, 선조실록에 ’회암사 옛터에 불탄 종이 있다‘는 기록을 보아 그 중심에 유생이 있지 않았나 하는 추정만 하고 있다. 빈대가 많아 불을 태워서 없어진 절로 알려져 있으니 빈대 잡으려 초가삼간이 태운 격이 아니라 그 많은 건물들을 날려 버렸다. 풍수 좋은 곳에 자리 잡았던 절집들을 차지하려는 유생들로 인해 절집들이 사라진 예를 이곳에서도 겪지 않았나 싶다.

회암사지 북쪽 현재의 회암사 부도군. 지공, 나옹, 무학이 회암사지를 내려다 보고 있다.
회암사지 북쪽 현재의 회암사 부도군. 지공, 나옹, 무학이 회암사지를 내려다 보고 있다. ⓒ 이승열

보물로 지정된 회암사 부도와 쌍사자 석등. 돌들은 오늘도 말이 없다.
보물로 지정된 회암사 부도와 쌍사자 석등. 돌들은 오늘도 말이 없다. ⓒ 이승열
지금의 회암사는 회암사지에서 700m쯤 떨어진 산골짜기 비탈에 자리 잡고 있다. 지공, 나옹, 무학 등의 부도와 비가 이곳 골짜기에서 흙더미 속에 숨겨졌던 옛 회암사터를 내려다 보고 있다. 생전 최고의 대접을 받고 영예를 누렸던 무학대사는 불에 타고 흙으로 덮인 채 잊혀져 가고 있는 회암사를 고스란히 지켜보면서 이성계를 도왔던 자신의 행적을 어찌 판단할까?

 

덧붙이는 글 | 한여름 땡볕 더위 속에서 친절히 안내해 준 기전문화재연구원 박종규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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