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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나리몬
카미나리몬 ⓒ 박경

도쿄에 도착한 나를 맞이한 것은?

나리타 공항에서 케이세이선을 타고 도쿄 시내로 들어와 지하철을 갈아타는 동안, 따지고 보면 뭐 우리 풍경과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앞에 앉아 졸고 있는 여학생의 교복 치마가 일본 만화에 나오는 것처럼 터무니 없이 짧다거나 남자들의 양복 바지통이 점잖지 못하게 좁다거나, 에어컨 바람이 마치 자연속 바람처럼 상쾌하다는 것만 빼고는.

아사쿠사에서 내려 지상으로 튀어 나온 순간, 당황스러웠다. 우리 나라에서는 죽음을 알리는 노란 등이 거리에 주렁주렁 매달려 바깽이 가족의 도쿄 시내 안착을 환영하고 있었으니.

나카미세
나카미세 ⓒ 박경

액운을 막는 수호문 역할을 한다는 카미나리몬을 통과해 상점가가 늘어서 있는 나까미세에 들어섰다. 비로소 일본에 왔다는 걸 온몸으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온갖 과자의 고소한 냄새들과 아기자기하고 화사한 민예품들, 콧소리 낭랑한 "아리가토 고자이마시타" 소리들.

맛은 오방떡, 크기는 삼분의 일, 모양은 탑이나 닭을 본딴 아사쿠사의 명물, '닌교야끼'라는 걸 사 먹으며 센소지 뒷편 숙소에서 먼저 무거운 배낭을 풀었다.

침대 세 개를 거의 틈도 없이 붙여 놓은 비즈니스 호텔의 문제는 마실 물이 없다는 것이었다! 얼레? 계획에 당장 차질이 생겨 버렸다. 여름 도쿄 여행을 다니려면 물을 많이 먹게 되는데, 물값도 무시 못한다, 될 수 있으면 호텔에서 한 통씩 얼려서 여행을 다니라는 배낭족들의 말을 금과옥조로 새겨 빈 물통까지 챙겨 왔건만.

여행 첫날 오후, 가볍게 돌아보자는 기분으로 우리 가족은 가까운 센소지 구경을 나갔다. 이미 본당의 문짝은 닫혀 있었다. 날은 아직도 훤한데. 일본 사람들이 일찍 일찍 문닫는 데에는 정말 부지런하다는 걸 처음 느끼는 순간이었다.

메이지신궁 앞의 우물
메이지신궁 앞의 우물 ⓒ 박경

물을 마시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작은 신사(神社)가 곁에 있어 발길을 옮기는 순간, 평소 돈 챙기고 건강 챙기는 직업정신으로 무장한 이 아줌마의 눈에 번쩍 뜨이는 것이 있었으니. 물이었다! 대나무 대롱을 졸졸 타고 흐르는 물이 돌함지박에 넘쳐 흐르고, 손잡이가 긴 바가지가 여러 개 있었다. 절에 가면 한번쯤 목을 축여주는 감로수처럼 일본도 마찬가진가 싶었다.

남편이 신사를 구경하는 동안, 딸과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바가지로 물을 떠 마셨다. 이 물이 다 돈이지 싶어, 들고 나온 빈 물통에도 물을 가득 채우고는 길 가다 돈 주은 것처럼 아주 기분이 흡족했다. 이제 물 걱정은 없게 생겼다. 아침에 숙소를 나설 때마다 여기서 물을 한통씩 채우면 물값은 굳은 것이다. 왠지 물맛도 더 좋은 것 같다.

그 물을, 금고에 금덩어리 모시듯 호텔 냉장고에 모셔 놓고, 나는 마시고 또 마셨다. 일본은 수돗물도 그냥 마신다는데, 이런 약수는 더 좋겠지 싶어, 샤워하고 나서도 마시고, 여행 첫날 낯선 잠자리에서 잠 못 이뤄 문득문득 깨어날 때도 벌컥벌컥 마셔댔다.

밤새 거의 한 통 가까이 혼자 마셔댄 그 물이 마시는 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것은 다음날이었다. 센소지 앞쪽 또 다른 곳에 물이 흐르고 바가지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하나 같이 마시는 듯 싶더니 뱉어내고, 세수하는 듯 싶더니 화장하듯 볼을 톡톡 두드리는 것이었다.

당장 곁에 있는 어제 그 신사로 달려가 보니, 일본 팻말이 그제야 들어왔다. '水'자와 '食' 자만 까막눈에게 들어올 뿐. 그래서 먹으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남편은 더듬더듬 읽더니 그제야 "먹지 말라는 거 같은데?"하는 것 아닌가.

메이지 신궁을 가도 그런 우물이 있었다. 몸을 정갈히 하기 위해 손과 입을 씻는 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참나. 비 피하라고 지붕까지 만들어 놓고, 깨끗한 대나무 대롱으로 알뜰하게 흘러내리는 물, 그걸로 씻기만 하라고?

그러면 왜 친절하게 바가지는 갖다 놓은 거야. 우리야 뭐 어딜 가도 약수 문화에 젖은 사람들이라 물 있고 바가지 있으면 그게 몸에 좋으니 떠먹으라는 걸로 받아들이는 게 당연하지 않나 말이다. 이럴 때 여행의 참맛을 느끼게 된다. 아, 역시 세상은 넓고 인간살이는 제멋대로야.

오른쪽, 왼쪽 바뀌니 쉽지가 않네

이 사건을 신호탄으로 서서히 우리 가족은 일본 문화를 몸으로 느끼며 어질어질 좌충우돌하게 된다. 4박 5일 내내 헷갈렸던 오른쪽 왼쪽도 그렇다. 영국으로부터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은 우리와 방향이 정반대다. 에스컬레이터를 타도 왼쪽에 서야 하고, 차의 운전석이 바뀌어 있어 차가 오고 가는 방향도 다르다.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길을 건널 때에도, 우리는 왼쪽을 먼저 보고 오른쪽을 살피게 된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먼저 오른쪽을 살피고 반쯤 건너가다가 왼쪽을 살펴야 한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다는 거다. 바로 차가 움직이는 걸 보면서도 고개는 습관처럼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간 크게 무단횡단을 하는 순간, 일본에서의 버스 클랙숀 소리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어야 했다. 오른쪽을 먼저 살펴야 하는데 왼쪽을 살피며 길을 건넌 것이다. 통제할 수 없는 습관의 공포를 처음으로 느끼며 부풀었던 간이 사정없이 졸아들었다.

하지만 또 이럴때 여행의 맛을 느끼게 된다. 내 익숙한 습관과 관성을 뒤흔들어 놓는 신선한 바람을 느끼는 순간. 그 바람은 어김없이, 말할수 없이 가벼운 일상의 먼지들을 한순간에 날려 버려 줄거라는 행복한 예감이 들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8월 20일부터 24일까지 일본 도쿄를 다녀와서 쓴 여행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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