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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만적인 부시 사과를 규탄하는 상징의식
기만적인 부시 사과를 규탄하는 상징의식 ⓒ 평통사
그래서인지 미군당국은 이번 사건이 발생했을 때 사고 직후 거듭 사과와 유감을 표명하고 미국 대통령까지 나서 정상회담 자리에서 유감 표명을 하는 등 이례적 모습을 보였다. 그에 따라 이번만큼은 미군당국이 재판권을 포기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를 가졌던 것도 사실이나 결국 헛된 바람으로 끝났다.

미군당국은 2002년 8월, 여중생 사건에 대한 재판권 포기를 거부하면서 아이젠하워 전 미국 대통령의 말을 빌어 “명백한 공무수행 중의 사건에 대해 미국의 기본권을 지금껏 포기한 적 없었듯이 현재도 미래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정책”이라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런데, 그렇게 자국의 기본권을 중시하는 미국이 정작 우리 나라의 기본권은 철저히 무시하고 있어 이중적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우리 나라, 90% 가까이 재판권 포기

미군당국은 우리 나라가 1차적 재판권을 가지고 있는 비공무 중 미군범죄에 대해서는 사건의 경중에 관계없이 일단 재판권 포기 요청부터 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왔다. 그 경우 우리 나라는 몇몇 중대사건을 제외하고는 90% 가까이 재판권을 포기해 온 것이 현실이다.

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2004년의 경우 미군인 범죄는 총 298건이 발생해 그중 56건(17.7%)에 대해 우리 나라가 재판권을 행사했다. 하지만 이전 통계에 비추어 볼 때 통계에서 누락된 단순 대물 교통사고 최소 2백건을 포함한다면 실제 재판권 행사비율은 11% 선에 그칠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는 지난 7월 초 의정부에서 미군 세명이 길가던 시민의 얼굴을 맥주병으로 가격한 사건에 대해 미군당국이 법무부에 재판권 포기 요청을 하였고, 그에 따라 가담 정도가 경미하다고 판단되는 두 명에 대해서는 담당 검사(의정부지방검찰청 하충헌 검사)의 의견에 따라 재판권을 포기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논란이 되고 있다.

7월 2일 의정부에서 길가던 시민 얼굴을 맥주병으로 폭행한 혐의로 미군 3명이 소환 조사를 받으러 의정부경찰서에 출두하고 있다.
7월 2일 의정부에서 길가던 시민 얼굴을 맥주병으로 폭행한 혐의로 미군 3명이 소환 조사를 받으러 의정부경찰서에 출두하고 있다. ⓒ 경기북부범시민대책위
공소사실에도 이들이 사실상 공동으로 모의하여 범행을 저지른 정황이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범행 가담 정도가 경미하다는 이유로 재판권 자체를 포기한 것은 납득할 수 없다.

이들 중 한 명인 레이놀즈 이병(20)이 피해자 조씨의 어깨를 손으로 붙잡아 세우고, 조씨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워커 일병이 맥주병으로 가격했다. 그리고 현장에서 유일하게 검거된 제롬 일병(22)은 붙잡히는 과정에서 조씨의 친구 정상준씨(35)에게도 맥주병을 휘두르고, 배를 발로 걷어차기도 했다.

그러고도 1차 소환조사 당시 같은 일행이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며 자신은 응급조치에 나섰다가 오히려 범인으로 몰렸다며 국민을 우롱했다. 이후 도주한 두 명이 모두 자수해 2차 소환조사를 진행했을 때도 이들 두 명은 경찰 조사에서 범행 가담 사실 자체를 극구 부인하는 등 계속 거짓말을 일삼으며 전혀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검찰은 조사 과정에서 피해자 측은 물론, 가해 미군들도 소환조사 한번 하지 않고 서류만 가지고 판단한 것으로 드러나 더욱 문제로 되고있다.

이번에 불기소된 제롬 일병을 붙잡으려다 복부를 차이기도 한 피해자 정상준씨는 “아무리 결과가 경미하다고 하나 과정이 중요한 것 아니냐. 내가 제롬이 휘두르는 맥주병을 피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나도 크게 다쳤을 것이다”라며 검찰의 처분에 강한 불만을 표했다.

“미측 요청이 있으면 사실상 포기해야”

형사 처벌에서 피해 당사자의 처벌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검찰은 피해자가 검찰 조사를 통해 그러한 진술을 할 수 있는 기회 자체를 박탈했다. 특히 경찰 조사에서 가해 미군들과 피해자측의 진술이 엇갈리고 있던 상황에서 재판을 통해 가해자와 피해자, 목격자 진술 등을 통해 정확한 사실 관계와 가해 미군 각각의 가담 정도를 판단했어야 함에도 소환 조사 한 번 하지 않고 재판권 포기 결정을 내림으로써 사건의 실체 규명에 어려움을 낳게 됐다.

설사 불기소 사유에 해당한다 하더라도 일단 재판권은 행사키로 하고, 추후에 판단하면 됐을 문제다. 그동안 미군당국의 재판권 포기 요청이 있으면 대부분을 재판권을 포기해 온 오랜 관행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비단 관행만의 문제는 아니다. SOFA 자체가 갖는 구조적 문제점도 크다.

검찰 측은 이번 의정부 맥주병 폭행사건과 관련, 일부 공범에 대해 재판권을 포기한 이유에 대해 “미군당국이 재판권 포기 요청을 해오면 SOFA에 따라 특별히 중요한 경우가 아니면 재판권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 이소희
SOFA 합의의사록에 따르면, 미군당국이 재판권 포기를 요청하는 경우 “우리 나라가 재판권을 행사함이 특히 중요하다고 결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1차적 재판권을 포기한다”(합의의사록 제3항 (나)에 관하여 1항)고 나와 있기 때문이다. 본협정 상에는 양국 공히 재판권 포기를 ‘호의적의로 고려’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합의의사록을 통해 우리 나라에 대해서는 미군당국의 재판권 포기 요청이 있는 경우 사실상 ‘포기’하도록 강제 규정을 두고 있는 것이다.

재판권은 ‘사법 주권’의 문제

재판권 문제가 중요한 것은 재판권은 ‘사법 주권’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국 영토 내에서, 자국 국민이 피해를 입었을 때 그에 대해 재판권을 행사하는 것은 주권의 문제다.

하지만 SOFA에서는 주한미군의 특수한 지위를 고려하여 적어도 공무 중 사건에 대해서는 미군당국이 1차적 재판권을 행사하도록 ‘예외’를 두고 있다. 따라서 적어도 비공무중 사건에 대해서는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우리 나라가 재판권을 행사하는 것이 국제법적으로도, 상식적으로도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미군당국이 우리 나라에 1차적 재판권 포기 요청을 무분별하게 남발하는 것은 그 자체로 우리 나라의 사법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행위다.

미군당국이 재판권을 행사하는 경우 공정한 처벌을 기대하기 어려운 현실에서는 더욱 그렇다. 지난 2002년 여중생 사건에 대해 미 군사법원에서 무죄 평결을 내린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백번 양보해서, 여중생 사건은 공무 중 사건이어서 그렇다 치더라도, 비공무 중 사건에 대한 미군당국의 처리 실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군당국은 우리 나라가 재판권을 포기한 비공무 중 사건에 대해 80% 이상 주의, 견책 등의 행정적 징계로 끝내고 형사 처벌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 2000년 1월에서 6월까지 미군당국이 우리 나라가 재판권 행사를 포기한 미군인 166명 중 재판을 통해 징역형을 내린 것은 단 한 명에 불과하고, 84.3%에 해당하는 140명은 주의, 견책의 행정적 징계에 머물렀다.

미군당국은 금번 ‘미군트럭 압사사건’에 대해서도 “재판권을 행사한다고 해서 반드시 군사법원에 회부하는 것은 아니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어 가해 미군들이 재판도 받지 않고 내부 징계로 끝날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SOFA, 근본적으로 개정해야

더 이상 이러한 고질적인 문제를 막자면 SOFA를 근본적으로 개정해야 한다. 앞서 지적된 바와 같이 우리 나라의 재판권 행사를 가로막는 독소조항을 삭제하고, 공무 중 사건이라도 우리 나라 국민이 사망에 이르는 등 피해가 중한 경우에는 우리 나라가 1차적 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미군당국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공무 중 사건에 대해 미군당국이 1차적 재판권을 포기한 전례가 없다고 주장하며, SOFA 개정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 하지만 전례가 없다고 해서 개정을 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해외 수십개국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고 하지만 우리 나라만큼 미군범죄가 많이 발생하고,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나라도 없다. 문제가 있다면 고치는 것이 상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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