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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사와 마사치의 <연애의 불가능성에 대하여>. "자신이 타자와 함께 있고, 자기 자신 역시 바로 그 타자라는 사실은 인간에게 근원적인 사태이다."
ⓒ 그린비
오사와 마사치의 <연애의 불가능성에 대하여>는 제목에서 오해할 수 있는 것처럼 연애가 정말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사랑의 심리학적 현상을 설명하는 연애학서도 아니고, 연애에 대한 현학적인 조소를 머금은 책도 아니다.

드물게 연애에 대한 철학적 접근을 시도하는 이 책은 속류 연애론에 대한 대중들의 기대를 저버리면서도 타인과의 관계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독자들에게 그 이상의 '사건'으로서 다가갈 것 같다.

마사치는 '사회성'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근원적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탐구하기 위해 책은 '연애'라는 키워드를 경유한다. 그러나 연애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저자는 언어, 화폐, 미적 표현의 문제를 넘나들며 완전히 고립되어 있는 인간에게조차 불가피하게 각인되어 있는 '타자성'의 문제를 숙고한다.

언어에 나타나는 '사회성'

"자신이 타자와 함께 있고, 자기 자신 역시 바로 그 타자라는 사실은 인간에게 근원적인 사태이다."(7쪽)

우리의 '언어'에서부터 인간의 사회성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후기의 비트겐슈타인은 완전히 혼자만의 '사적(私的)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논증으로 보여줬다. 언어를 사용해 '무엇'을 지시하기 위해선 지시해야 할 '무엇'이 아닌 것을 지시했을 때 그 언어의 사용이 틀렸다는 걸 판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지시할 것과 다른 것과의 구별을 통해 그 지시가 실효성을 얻게 되니 말이다.

그러나 사적 언어의 경우에는 그런 지시의 적절성을 판명해 줄 사람이 '나'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반증이 있을 수 없는 이상 그것은 타당한 것일 수 없다. 타당하고 타당하지 않고를 떠나서도 사적 언어는 그 언어의 '지시대상'과 그 '배경'을 변별해 내지 못한다. 따라서 사적 언어는 어떤 것과의 변별을 통해서만 의미를 가지는 언어의 내적 규정을 부정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 그의 논증이었다.

사적 언어의 불가능성으로 알 수 있듯이 언어를 통한 지시는 언제나 타자를 향한다. 언어는 사회적이라는 것을 전제로 깔고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언어를 사용하는 한 우리는 언제나 잠재적인, 혹은 현재적인 커뮤니케이션 안에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왜 나를 사랑하나요?"

▲ 영화 <연애의 목적>. 홍은 왜 책임감도 없어 보이고 밝히기만 하는 유림과 사랑에 빠졌을까? 페미니스트들은 흥분했지만 오사와 마사치라면 "사랑을 그 대상의 성질로 설명하는 것은 우매한 짓"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 싸이더스
저자는 사랑의 문제가 언어 철학에서의 '고유명사' 문제와 동형성을 띠고 있다고 말한다. 고유명사의 동일성은 내가 나의 경험과 환상을 귀속 시키는 우주의 동일성과 같은 문제다. 우리의 사랑하는 연인은 묻는다. "왜 나를 사랑하나요?"라고. 그러나 우리가 "당신은 아름답고 똑똑하기 때문"이라는 찬사를 아무리 이유로 붙여 봐도 연인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럼 아름답고 똑똑하면 내가 아닌 누구라도 괜찮은 거야?" 이 질문에서 딜레마가 발생하는 이유는 고유명사의 지시가 그 성질에 대한 기술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나의 성질'로 환원될 수 없는 것처럼 '당신에 대한 사랑'도 '당신의 성질'로 환원될 수 없다.

그럼에도 사랑은 '당신이어야만 한다'는 유일성을 요구한다. 그 유일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랑은 '당신이 아니라면'이라는 불가능성의 가정을 거친다. 사랑의 유일성을 보여 주려면 누구도 사랑하는 연인을 대체할 수 없다는 걸 보여 줘야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다른 대상은 현실에서 배제되지만, 잠재적인 가능성으로서는 언제나 존재할 수밖에 없다. '나'를 중심으로 하는 우주의 동일성에 잠재적으로는 '차이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사랑은 타자의 체험을 나의 행위에 접속하는 특별한 행위이다. '나'라는 동일성의 우주는 일반적으로 모든 경험과 행위를 나의 신체를 중심으로 한 우주 안에 귀속 시킨다. 그러나 사랑의 경우에서는 우주의 궁극적인 중심이 '나'에게서 '타자'에게로 옮겨간다. 나는 타자의 체험을 고려해 행위해야만 하며 그 행위는 나의 우주로만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사랑이라는 커뮤니케이션에서 '나'라는 확고한 우주의 동일성은 깨진다. '타자'를 중심으로 하는 또 다른 우주가 있을 수 있다는 사태를 사랑이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의 우주와 정접할 수도 있지만, 나의 우주 안으로는 도저히 수렴할 수 없는 또 다른 우주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랑'은 나와 타자가 서로 우주의 동일성을 상정할 때만 가능한 사태이다. 그래야만 사랑은 '당신이어야만 한다'는 유일성을 말할 수 있을 테니까.

노 대통령은 왜 한나라당에 불타는 '연정'을 느끼는가

이렇게 사랑에서는 '차이성'이 그 자체로 '동일성'으로 이행할 수 있다. 이것은 매우 독특한 과정이다. 일반적으로 차이와 동일성은 다른 수준에서 위치하고 그것에 의해 차이는 상대화된다. '삼성'과 '현대'의 차이가 상대적인 것은 '거대 자본'이라는 동일성 안에서는 그 차이가 관련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이성이 그 자체로 동일성이라면 그 차이는 해소할 수 없는 차이, 순수한 차이가 된다.

여기서 우리가 사랑에 대한 가장 투명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들을 떠올려 보라. 투명한 사랑 이야기의 정점에 있는 <가을동화>를 비롯한 슬픈 멜로 영화들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도저히 해소될 수 없는 주인공들의 '거리'가 아름다운 사랑의 전제로 제시되지 않던가.

"요컨대 연애는 스스로의 불가능성이라는 형태로밖에 존재할 수 없다. 사랑이 증오와 같은 것일 수도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26쪽)

해소될 수 없는 순수한 차이. 절대적인 '타자'에게서 우리는 사랑이라는 사태를 발견할 수도 있다. 불현듯 노무현 대통령이 자신의 정치 인생에서 '절대적인 타자'일 수 밖에 없었던 '한나라당'에게 뜨거운 '연정'을 품고 있는 이유가 이해가 됐다.

그러나 그 전에 대통령은 자신의 국정에서 태클을 거는 '한나라당'이 언제나 자신과 함께 있을 수 밖에 없음을, 자신의 '동일성'안에 잠재적으로나마 언제나 존재할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할 수는 없었을까?

덧붙이는 글 | 화폐는 언제나 교환가치를 인정하는 후속의 타자를 전제해야만 유통이 가능하다는 저자의 독특한 화폐론이나, 전자 미디어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의 현주소를 분석하는 논문은 분량과 주제의 일관성 문제 때문에 이 서평에 담지 못했다. 그러나 그 정도는 책을 찾아 읽는 독자들을 위한 '선물'로 남겨둬야하지 않겠나는 생각도 든다.


연애의 불가능성에 대하여

오사와 마사치 지음, 송태욱 옮김, 그린비(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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