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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관회가 열렸던 개경 만경대 행사장 복원이미지. 국왕은 편전인 선인전(宣仁殿)을 출발해 대관전(大觀殿)으로 행차한다. 근시관들에게 조하(朝賀)를 받은 후 위장대의 호위 하에 의봉문루(儀鳳門樓)에서 구정(毬庭)에 도열한 문무백관들로부터 조하를 받았다.
팔관회가 열렸던 개경 만경대 행사장 복원이미지. 국왕은 편전인 선인전(宣仁殿)을 출발해 대관전(大觀殿)으로 행차한다. 근시관들에게 조하(朝賀)를 받은 후 위장대의 호위 하에 의봉문루(儀鳳門樓)에서 구정(毬庭)에 도열한 문무백관들로부터 조하를 받았다. ⓒ (주)프리진
팔관회는 민족 고유의 전통의례가 결합된 국가축제

<삼국사기>(三國史記) 기록에 의하면 신라 팔관회는 진흥왕이 산천용신제(山川龍神祭)와 10월 제천행사 등을 불교의식과 결합해 개최한 것으로 돼 있다. 각 부족의 토속 신앙들을 통합해 종교의식을 단일화함으로써 중앙집권화를 공고히 한 것이다.

미륵불을 자처하였던 궁예는 팔관회를 '태봉'의 국가적 불교행사로 도입해 한 해를 마감하는 추수감사제 성격을 지닌 축제로 발전시켰다. 918년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태봉의 팔관회를 계승해 그 해 11월 15일에 개최했다.

하지만 고려 팔관회는 단순한 불교행사가 아니었다. 태조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한 후 국민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불교를 주목, 불교의례인 팔관회에 건국 공신들을 추모하는 위령제 기능 등을 보태 고려 최고의 문화축제로 거듭나게 했다.

이후 팔관회에서는 각국 사신들이 축하하는 글과 특산물들을 바쳤고 국왕은 답례로 음악공연과 백희가무(百戱歌舞)를 관람하며 즐길 수 있게 했다. 이 때 각국 상인들이 몰려들어 국가 간의 무역 거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팔관회가 열리는 동안은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되고 궁궐이 개방돼 이를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개경 성내가 밤새도록 북적거렸다. 이렇듯 고려 팔관회는 단순 종교행사를 뛰어 넘어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의례가 결합된 국가축제였다.

한편으로 팔관회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정중부로 시작되는 무신정권의 출발, 고승 균여가 사자후를 토한 곳, 역성혁명을 이룬 조선 태조 이성계를 암살하려던 곳 등이 바로 팔관회가 열리던 자리였다.

장 실장은 "팔관회 장소를 중심으로 무신정권의 태동과 이성계 암살 시도 등의 내용으로 시나리오를 개발했다"며 "팔관회에는 왕을 비롯한 모든 권력자들이 매년 한자리에 모이기 때문에 역사를 논할 때 빼 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장 실장은 이어 "팔관회는 왕을 비롯한 대열, 행렬, 움직임, 순서 등 매우 복잡한 의례로 이뤄지기 때문에 복원하는 내내 힘들었다"면서 "문화콘텐츠는 내용의 고증도 중요하지만, 다소 논란이 따르더라도 대중화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의 문화원형사업 콘텐츠 관리가 너무 고증 중심으로 이뤄져 사업화에 애로사항이 많다는 불만이다.

팔관회에 참가한 왕을 비롯한 문무대신들의 대열 배치도 및 그래픽 복원 이미지. 백희가무와 음악 공연을 관람하고 술과 음식을 즐기면서, 태자를 위시한 문무 관료들이 국왕에게 술잔을 헌수하거나 꽃을 바치면, 국왕이 참여자 모두에게 술과 꽃, 과일, 봉약(封藥)을 하사하는 순서로 행사가 진행됐다.
팔관회에 참가한 왕을 비롯한 문무대신들의 대열 배치도 및 그래픽 복원 이미지. 백희가무와 음악 공연을 관람하고 술과 음식을 즐기면서, 태자를 위시한 문무 관료들이 국왕에게 술잔을 헌수하거나 꽃을 바치면, 국왕이 참여자 모두에게 술과 꽃, 과일, 봉약(封藥)을 하사하는 순서로 행사가 진행됐다. ⓒ (주)프리진
연등회는 불교행사, 팔관회는 국가축제로 분명히 구분돼야

한편 장 실장은 팔관회와 연등회는 분명히 구분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장 실장은 "'연등회'는 팔관회와 함께 고려 2대 행사로 불리며 정월 대보름이나 2월 보름에 행하던 것으로 왕과 백성들이 연등을 화려하게 밝히고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며 풍년을 기원한 불교행사"라며 "지금처럼 연등만 건다고 팔관회로 불러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지난해 부산 해운대에서는 연등 2만개를 걸고 팔관회라는 불교행사를 열었다. 하지만 이는 팔관회가 아니라 연등회라고 부르는 것이 맞단다. 팔관회는 고려왕조 내내 이어졌던 문화유산으로 종교행사를 뛰어넘는 국가축제이기에 그렇다는 지적이다.

고려왕조의 국가의례로 매년 진행됐던 팔관회는 조선 건국 후 숭유억불정책에 따라 사대부들에게 가장 우선적인 철폐 대상으로 지목됐다. 이는 팔관회가 최고 위상의 국가의례로 고려 문화를 유지해 가는 중요한 장치이자 상징으로 고려 문화의 청산은 팔관회 폐지가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결국 팔관회는 조선 태조 원년(1392년) 도당이 혁파를 주창한 후 폐지됐다. 이후 팔관회는 다시 순수한 불교행사로 바뀌었고, 조하(朝賀)의식과 명산(名山), 대천(大川) 등 토속신에 대한 제사는 유교의례로 편입됐다.

팔관회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통의례 등 국가의 위상을 높이고 통합을 이루기 위한 내용을 모두 담고 있다. 화려한 연등을 밝혀 부처님께 국가와 백성들의 안녕을 기원하면서, 왕과 문무대신들과 백성들이 하나가 됐던 축제의 장이었다.

고려 멸망 후 천 년의 세월이 훌쩍 지난 지금, 비록 정부차원에서 팔관회를 제대로 계승하지는 못했지만, 국민들은 시시때때로 연등 대신 촛불을 들며 국가와 국민의 안녕을 기원하곤 한다. 그 촛불이 디지털로 새롭게 탄생한 팔관회를 밝혀 온 국민을 통합해주기를 바람은 지나친 상상일까? 팔관회를 다시 들여다 볼 필요는 충분하다.

고려 팔관회는 정치, 사회, 문화, 경제 망라한 국가행사

고려 건국과 함께 시작한 팔관회는 수도인 개경에서는 11월, 서경에서는 10월에 보름날을 전후로 사흘간 개최됐다.

서경의 팔관회는 개경보다 한달 빠른 10월 15일에 개최됐다. 서경의 팔관회는 고구려의 10월 동맹제(東盟祭)를 계승한 것으로 고구려 건국 시조인 동명성왕을 기리는 조상제와 추수감사제의 성격을 함께 지녔다.

태조 왕건은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내가 원하는 바는 연등과 팔관인데, 연등은 부처를 섬기고 팔관은 하늘과 오악(五嶽), 명산(名山), 대천(大川), 용신(龍神)을 섬기기 때문이다.…왕과 신하 모두가 함께 즐기면서 공경하는 마음으로 이를 행하도록 하라"며 팔관회를 중시했다.

팔관의 '관'은 금한다는 의미로 팔관은 살생, 도둑질, 음행, 거짓말, 음주, 높고 사치한 자리에 앉거나 꽃과 향수로 치장함, 가무음곡, 오후 식사를 금하는 팔계를 범하지 않음을 뜻한다.

다음은 개경 만월대 의봉루 앞마당에서 사흘간 개최된 팔관회 내용.

13일 준비일
팔관회 참가자들의 예행 연습과 행사 시설들을 설치했다.

14일 소회일(小會日)
소회일 행사는 공식 국가의례의 성격을 강하게 지녀 매우 엄숙한 분위기에서 이뤄졌다. 대관전과 의봉루 사이에 화려한 복장을 한 3천여명의 호위군사를 진열하고 태조영정에 술을 올리며 연희와 조하의식을 행했다. 이러한 의식을 통해 고려 황실의 위상을 알리고 융합을 도모했다.

15일 대회일(大會日)
대회일은 외국 사신들의 조하가 포함된 것이 소회일과 다른 점이다. 이 때 송나라 상인과 여진, 탐라, 왜에서 파견된 사신들이 축하 표문과 특산물들을 바쳤으며, 국왕은 이에 대한 답례로 음악공연과 가무백회를 관람할 수 있는 좌석을 배정하고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했다. / 최육상

덧붙이는 글 | (주)프리진 '고려 팔관회' 콘텐츠 자료 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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