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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그자리에 복원한 사립소안학교
당시 그자리에 복원한 사립소안학교 ⓒ 김준

지금의 소안초등학교자리에 공립보통학교가 있었다.
지금의 소안초등학교자리에 공립보통학교가 있었다. ⓒ 김준
사립학교와 공립학교 생도들 간에도 등하교시 버턴등에서 자주 마주쳐 싸움이 벌어졌던 모양이다. 특히 공립학교 학생이 사립학교 학생에 맞는 것은 모욕이라며 학교폐지를 조건으로 공립학교가 동맹휴학을 하기도 하였다. 버턴등은 동부와 서부가 만나는 허리가 잘록한 부분으로 소안도에서 유일하게 갯벌이 발달한 곳이다. 지명으로 본다면 일제 이전부터 그곳에서 활염 즉 소금을 구워냈을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공립학교 수업을 마친 맹선리, 가학리, 미라리, 진산리 학생들이 지나쳐야 하는 곳이며, 반대로 비자리, 월항리, 이목리에 사는 사립학교 학생들이 수업 후 지나쳐야 하는 길목이다.

사립학교에 다녔던 주채심(1993년 당시 79세)은 13살 되던 해에 학교가 폐교되었다. 월항리에 살았던 그녀의 기억에 5명의 여학생이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고 기억하며 남자들은 훨씬 더 많았다고 한다. 월항리에서 학교가 있는 가학리까지 족히 10km는 되는 거리였다. 당시 분위기는 여자들에게 글을 가르치면 연애질하고 편지질 한다고 부자일수록 글을 가르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의 오빠(주채도, 1907년생, 일심단원, 배달청년회 사건으로 구속 징역 2년 선고)가 항일운동을 하다 평안도 신의주 감옥에 갇히자 어머니는 명을 잦으며, 그녀에게 '옥중가'를 부르라고 해 노래를 부르며 같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한다. 월항리에 여학생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마을주민이 마련해 준 사랑방(기숙사)에 가서 친구들끼리 모여서 공부하고 학교에서 배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녀는 평생의 기억 중에서 그때처럼 재밌는 세월은 없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사립에 150명, 공립에 불과 30명(조선 1927.5.17)
사립에 150명, 공립에 불과 30명(조선 1927.5.17) ⓒ 김준

사립소안학교 폐교 관련 기사(조선 1927.5.17)
사립소안학교 폐교 관련 기사(조선 1927.5.17) ⓒ 김준
공립학교는 대부분 면이나 주재소 등의 기관에 근무하는 사람들의 자녀들이며 소안사람들은 공립학교에 보내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보통학교에서는 '일본노래'를 가르쳤고, 사립학교에서는 '조선노래'를 가르쳤다. 사립학교 폐교 후에도 마을에 기숙사를 운영하기도 하여, 동네 젊은이들이 생활지도를 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왜놈들 학정을 고발하는 '소인극'을 만들어 공연하며 민족운동을 고취시키는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남자들은 여자들에 비해서 사립학교나 보통학교에 가는 경우가 많았지만 여자들은 상대적으로 교육을 받을 기회가 적었다. 그래서 기숙사에서 단체생활(야학)을 하면서 민족운동 노래를 배웠었다.

강요된 기억 : '해방의 섬'에서 '빨갱이 섬'으로

소안도 주민들의 항일의식 고취에 '사립소안학교'가 큰 역할을 했다면 항일운동의 직접적인 역할은 '수의위친계'에서 비롯되었다. 수의위친계에 참여했던 이월송(일심단 단장)은 계에 참여한 신지, 묘도, 고금, 금일, 소안은 물론 구례, 담양, 고창, 영광, 나주, 장성, 목포 심지어는 경남 동래, 경북 상주의 활동가들을 기억해냈다. 이들 중에는 광주에 강석봉, 구례에 선태섭, 영암에 조극환, 나주에 이항발, 목포에 조문환과 김철진 등 일제강점기에 전남지역은 물론 전국적으로 알려진 사회주의운동가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해방 이후 여운형이 이끌던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산사람이 되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소안 항일운동의 지도자 송내호 선생 묘소
소안 항일운동의 지도자 송내호 선생 묘소 ⓒ 김준
1950년 7월 하순 전선이 무너지면서 나주, 화순, 강진, 장흥의 경찰부대들이 완도로 집결했다. 그리고 최후에 대치선이 남창이었다. 완도에 모든 발동선은 징발되고 일명 '완도상륙작전'을 준비하고 있을 때 소안도에서는 죽음의 그림자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전쟁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북한에 동조할 위험이 있는 사람들을 제거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그 대상이 1949년 조직된 '보도연맹'(정식 명칭은 '국민보도연맹')이었다. 국가보안법에 저촉되거나 전향자들을 회유 및 통제하기 쉽게 모두 가입시켜 좌익운동을 와해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이 조직에 소안도 항일운동 관련자들도 상당수 포함되었었다. 이들이 소안 노인들이 증언하는 '관제공산당'이며, 피해자가 적게는 50명 많게는 100명에 달했다. 증언자들은 이후 재차 민간인 학살이 이루어질 찰나 송내호와 함께 소안 항일운동의 지도자였던 정남국(보도연맹 피해가 예상되었지만, 수의위친계, 배달청년회, 일본에서 노동운동, 조선공산당 참여 등)이 적극 나서 무사하게 살아 돌아왔다고 기억하고 있다.

50여 년 전 학살이 일어났을 그 바다에서 늙은 부부가 낙지 통발을 건져 올리고 있다.
50여 년 전 학살이 일어났을 그 바다에서 늙은 부부가 낙지 통발을 건져 올리고 있다. ⓒ 김준
소안도에서 피해가 가장 컸던 마을은 월항리였다. 특히 월항리는 사립학교 교장을 지냈던 김사홍과 김경천이 고향이었다. 당시 섬지역의 민간인 학살의 대표적인 유형이 줄에 묶어 돌에 매달아 수장시키는 방법이었다. 임자도가 그랬고, 무안 복길, 영광 염산 등이 그랬다. 소안도에서도 줄줄이 묶어서 배에 실려 간 사람들이 이후 돌아오지 못했다. 한 동안 소안도 일대 바다에 시체들이 널브러졌으며, 간혹 그물질에 시체와 뼈들이 걸려 오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특히 일본으로 유학을 갔단 온 사람들이 많이 희생을 당했다. 사립학교가 폐교된 이후에 소안도 사람들은 아이들을 공립학교에 보내는 대신에 '야학'이나, 김 양식 등으로 경제적으로 가능한 사람들은 일본으로 유학을 선택했었다. 소안도는 일제강점기에도 김 양식이 유명했었다.

이후 소안사람들의 기억에 '항일'은 기억해서는 안 되는 일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불령선인'으로 낙인찍혔던 소안사람들, 그 낙인은 해방이후 '빨갱이'들이 사는 섬으로 바뀌었다.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것은 이제 죄가 되었고, 자식들은 취직은커녕 감시의 눈길을 피할 수 없었다. 오죽 했으면 해방이 되고 20여 년이 흐른 후 소안도는 물론 항일민족운동사에서 전국적인 인물인 송내호 선생의 기념사업회 모임에 해당지역의 공무원들이 참여를 꺼려했겠는가. 이미 1963년 3월 1일 송내호 선생은 독립유공자로 포상이 추서되었는데도.

이제 당시 노인들은 '보도연맹'에 대해서도 입을 열기 시작했다. 소안도 주민의 40-50여명이 끌려가 죽었으며, 한 집안에 기일이 같은 사람이 대여섯 명인 경우도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때는 주민들 중 누가 '회의'했다고 손가락질 하면 바로 죽였다. '회의'는 곧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을 의미했던 모양이다. 1980년 후반으로 필자가 대학원 시절로 기억된다. 평생을 재야 경제학자로 지내다 조선대학교 교수로 온 '박현채' 선생님과 광주에 몇 선생님 그리고 필자를 비롯한 대학원생이 무등산을 오른 적이 있다. 무등산 일대에서 활동했던 박현채 선생님의 빨치산 이야기를 듣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무등산장에서 올라가 등산로가 아닌 길로 들어섰다가 길을 잃었는데, 그 때 박현채 선생님이 하셨던 말이 '그때는 이렇게 길을 잃으면 바로 '회의'를 했지'하시는 것이다. 모든 일을 회의를 해서 결정했다는 것이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도 소안도는 해방의 땅이었다. 하지만 해방 후 소안사람들은 해방의 '기억'은 지워야 했고, 친일의 권력의 강요된 '기억'을 기억해야 했다. 소안사람들의 진정한 해방은 기념관을 짓고 독립유공자로 추서하기에 앞서 '해방의 기억'을 되찾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어지는 기사는 소안도 세번째 이야기 '잊혀진 '기억'살리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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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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