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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만성리 굴 입구(진입로)
여수 만성리 굴 입구(진입로) ⓒ 김학수
미항의 도시 여수. 만성리 해수욕장 해안도로를 지나다 보면 마치 암벽에 구멍을 뚫어 놓은듯 기나긴 동굴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이 연장 640m, 폭4.5m, 높이4.5m의 여수시 시도(市道)에 속해있는 '만성리 굴'이다.

지금은 이곳이 사람과 자동차가 오고가는 도로가 되어있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 도로는 일제시대에 우리나라와 중국의 징용인들이 건설한 남철(南鐵)이라는 철로가 지나던 곳이다.

여수 만성리 굴 내부 모습. 굴 내부 중간중간에 차량이 교차할 수 있는 교차로가 있다.
여수 만성리 굴 내부 모습. 굴 내부 중간중간에 차량이 교차할 수 있는 교차로가 있다. ⓒ 김학수
11세 때 철도(남철)의 개통 모습을 지켜 보았다는 여수시 만흥동 장지현(83)옹은 대부분 중국인 징용자들이 손수레를 밀고 다니며 작업하는 모습과 철도가 완공되고 군수물자를 실어나르던 모습을 회고하며 일제치하의 암울했던 과거에 대해서 이야기 하였다.


문정인씨는 지금도 시간이 나면 여수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자료들을 정리하고 있다.
문정인씨는 지금도 시간이 나면 여수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자료들을 정리하고 있다. ⓒ 김학수
여수 만성리 굴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서 여수시청에 의뢰하였으나 보존되어있는 자료는 찾기가 쉽지 않았다. 수소문 끝에 1987~99년 3월까지 여수 문화원장을 역임했던 문정인(68·현 신화약국 운영)씨를 찾아가 소장하고 있는 자료를 전해 받을수 있었다.

여수 철로 작업의 옛날사진
여수 철로 작업의 옛날사진 ⓒ 사진제공: 문정인 홈페이지
1930년 12월 25일!

이날은 여수(麗水)의 개벽이래 가장 역사적인 하루가 아닐 수 없었다. 육지에서는 서울행의 기적이 울렸고 바다에서는 일본행의 뱃고동 소리가 높았으니 말이다.

(중간생략)

유사이래의 대역사는 드디어 1928년(昭和 3년) 2월 27일 착공되었는데 공사구간은 신항 제1부두에서 광주까지였다. 우선 신항에서 덕충동(德忠洞) 터널 앞까지의 공유수면을 매립하는 공사와 병행하여 노반을 다지고 궤도를 깔고 터널을 뚫는 순서로 진척되었는데 이 공사 역시 이 고장 개벽이래 처음보는 일대 토목공사로 전국에서 인부를 모집하였는데 하루에 취로인원이 2천명에 이르렀고, 바다를 메우는데 무한정 소요되는 방대한 흙은 지금의 척산(尺山) 초등학교가 들어앉은 흙산에서 파썼기 때문에 지금도 관문동 뒷산을 흙산이란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때 흙산에서 현장까지 흙을 실어나르는 광경 또한 천하의 장관이어서 수십쌍의 레일이 거미줄같이 깔려있는 가운데 수십대의 손수레들이 쉴 새 없이 질주하면서 흙을 나르고 터널을 뚫는 공사는 푸른 옷을 입은 중국인 꾸리들이 대부분이었으나, 더러는 성경도(成鏡道)와 평안도(平安道) 사람들이 섞여 있었는데 이들이 기이한 구호를 외치면서 터널에 정질을 하는 모습 또한 볼만한 구경거리였으며, 임금은 30~40전(錢)선이었다고 한다.

(이하생략)

자료출처: <여수 발전사>


한쪽 굴 입구에 작게 세워놓은 교차로 구간 표지. 안내 표지판은 찾아볼 수가 없다.
한쪽 굴 입구에 작게 세워놓은 교차로 구간 표지. 안내 표지판은 찾아볼 수가 없다. ⓒ 김학수
이를 토대로 볼때 여수의 '만성리 굴'은 우리의 지난 역사가 잠재되어있는 소중한 현장인 셈이다. 외지 관광객들이 여수를 찾아 이곳을 단순히 아름다운 관광도로로만 알고 떠나야 하는 잘못된 생각을 고치기 위해서라도 여수시에서는 아무런 안내표지 조차도 없는 이곳에 올바른 안내문을 세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덧붙이는 글 | 문정인(68.약사 현 화신약국 운영)
여수고 5회 졸업
성균관대 약학과 졸업
1987~1999.3 여수 문화원장 역임
여수 문화 연구소 홈페이지 운영(http://ysculture.com)
저서: 속 없는 사나이(1997), 속 없는 사나이(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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