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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실 기록문화의 꽃, 의궤> 돌베개 출판사, 표지
<조선왕실 기록문화의 꽃, 의궤> 돌베개 출판사, 표지 ⓒ 돌베개
귀찮기 짝이 없는 의궤는 왜 만들었을까? 막강한 국왕의 권한을 규제하기 위해서였다. 기록은 후세에 남아 평가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또 있다. 행사 중간에 작성하여 행사를 원만히 치루기 위함이었다. 행사 전체 상황을 그린 그림을 반차도라고 하는데, 이것은 일종의 행사 도상 훈련이기도 했다. 더 있다. 이후에 같은 행사를 수월하게 치루기 위함이다. 집안의 제사도 할 때마다 헷갈리는데, 국가적 거대한 행사, 그것도 수십 년 만에 다시 하는 행사는 전례가 바로 법이 된다.

의궤는 상설적으로 치루는 행사가 아니라 중요한 행사나 과제가 발생했을 때 제작되었다. 따라서 임시기구인 도감이 구성되어 관리가 선발되어 행사나 과제가 실시되고 그것을 정리한 것이다. 이런 의궤는 임금에게도 보고되었고, 몇 부를 더 작성하여 해당관청과 난리 통에도 피해를 입지 않을 사고(史庫)같은 곳에 보관되었다.

이 책은 조선의 수많은 의궤 중에서 대표가 되는 12가지를 골라 그 행사와 함께 의궤를 소상히 소개하고 있다. 구체적인 의궤로 들어가 보자.

<태실의궤>는 왕실의 태를 보관한 기록이다. <장태의궤>, <태실의궤>는 태를 봉안하고 태실을 조성한 공사의 전모를 담고 있다. 왕실의 태는 국운과 관련이 있다 하여 처음에는 항아리에 넣어 보관하였다가 국왕 즉위 가능성이 있는 태는 석실에 넣어 명산에 묻었다. 왕이나 세자의 경우에는 군사를 두어 지키기도 했단다. 태봉은 풍수지리상 명당인 야산 꼭대기에 태를 매장하고 아래에 재실을 지은 공간이다.

전국에 태봉리라는 지명은 여기서 유래했다. 그런데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에는 조선의 태실 53위가 안치되어 있다. 일제가 아마도 조선의 정기를 끊어 버리겠다는 의도로 전국 명산의 태실을 이곳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참으로 가증스러운 짓이다.

<가례(嘉禮)도감의궤>은 왕실의 결혼의 의식 절차와 진행에 대해 소상히 기록한 의궤로 모두 20여 건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말미에 그려 넣은 반차도는 축제의 생생한 분위기를 전해주고 있어 비디오 영상을 보고 있는 듯하단다. 결혼 행진 중에 비나 빈의 가마에 함께 실은 요강(要江) 대야(大也)도 한자로 표기되어 있어 재미를 더 한다. 고종이 운현궁에서 중전 민씨를 맞이한 가례의 의궤도 있다. 이 의궤 덕분에 가끔 재현하는 운현궁 고종과 중전 민씨(민비)의 결혼 장면이 생동감을 더 할 수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 국왕의 장례는 가장 중요한 행사 중에 하나였다. 이 행사 전반을 담은 것이 <국장도감의궤>이다. 그런데 국왕 장례를 담당하는 임시 기구인 도감이 장례를 총괄하는 국장도감, 시신을 안치하고 매장을 준비하는 빈전도감, 무덤을 조성하는 산릉도감으로 나눠졌기 때문에 의궤도 동시에 3종이 제작되었다.

장례는 그 절차가 매우 복잡하고 까다롭기 때문에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국장 행렬은 엄숙하고 장중해야 했다. 행렬을 그림으로 그린 반차도는 발인하기 10일전까지는 완성해서 확인을 받아야 했다. 정조의 국장 행렬의 반차도에는 1440명의 인원이 그려져 있는데, 이들은 모두 미리 그려진 반차도를 통해서 도상 훈련을 하고 행렬 중에서 자신의 위치를 숙지했던 것이다.

기록의 천국 조선의 대표적인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일 이다. 국왕 사후에 실록청을 설치하고 전 왕대의 실록을 편찬하였다. 실록청에서는 사초(史草), 시정기 등 실록에 관련되는 내용을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자료로 삼았다. 사관은 국가의 모든 회의에 참가하고 기록하였다. 자신의 논평도 보탰다. 퇴궐한 뒤 집에서도 관련 내용을 재정리했다가 실록편찬에 활용하였다.

실록의 생명은 그야말로 객관성 유지였다. 실록에 실은 마지막 사초인 정초가 정해지면 앞 단계 초안들은 모두 물로 씻어 없앴다. 이때 잔치도 벌였다. 실록청의궤는 이런 과정을 비롯한 실록 편찬과 봉안의 전체 절차를 기록하고 있다.

선조는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두 가지 실록을 가지고 있다. 경종과 현종도 그렇다. 이때에도 <선조실록수정청의궤>가 작성되었다. <선조실록>을 제작했을 때는 광해군의 북인정권의 입장이 반영되었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선조실록 내용이 못마땅할 수 에 없었다. 그래서 수정한 선조실록이 제작되었던 것이다. 그 수정 과정을 의궤로 만든 것이다. 수정 이후에 앞선 실록을 없애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평가는 역사에 맡겼다. 조상들의 기록과 객관성을 지키고자 하는 정신이 눈부실 정도로 아름답게 느껴진다.

5월에 종묘, 10월에 사직단에 가 본 사람이면 그 곳에서 제례가 열리는 것을 볼 수 있다.지금은 일종의 관광 이벤트처럼 되어 버린 이런 제례가 과연 옛날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재현 과정은 어떤 경우보다 과거의 모습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절차와 비용 심지어 동원된 춤추는 동작까지 모두 밝히고 있는 <종묘의궤>, <사직서의궤>가 있기 때문이다.

<보인소의궤>는 국왕과 왕비의 도장인 보와 그 이하 기관들의 도장인 인의 제작 과정을 담은 의궤이다. 보인소의궤는 모두 9건이 작성되었다. 인장 제작에 동원된 27가지 공정에 77명의 장인이 참여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악기조성청의궤>는 악기를 새로 만들고 만든 의궤이다. 정조가 즉위하고 사도세자를 모시기 위해 경모궁을 지었다. 그곳에서 사용할 악기를 만들고 의궤를 작성했으니, <경모궁악기조성청의궤>가 되었다. 이때 43개 분야 148명의 장인이 동원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그 공정이 참으로 궁금해진다.

중국에서 우리를 동이족이라 한다. 조선시대 활쏘기는 단순한 무예만이 아니었다. 수양의 수단이었고, 친목을 돋우는 행사였고, 상하신분을 확인하는 의식이었다. 국왕과 신하가 함께하는 활쏘기 의식이 대사례였다. <대사례의궤>는 영조가 성균관에서 행한 대사례를 정리한 의궤이다.

예를 갖추어 활을 4발씩 쏘고 적중 여부에 따라서 상과 벌을 내렸다. 의궤에는 각자의 성적까지 기록하고 있다. 한발도 적중하지 못한 사람은 스스로 벌주를 마셔야 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나 같으면 일부러 못 맞혀 술을 잔뜩 마시고 말겠다. 보통술은 아니지 않을까?

정조임금이 1795년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힌 화성 현륭원에 행차하여 어머니 혜경궁 홍씨 회갑잔치를 벌이고 돌아온 8일간의 장대한 행사를 정리한 것이 <원행을묘정리의궤>이다. 이 행차는 사실상 대단한 정치적 목적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노론세력을 극복하여 왕권을 키워 개혁을 추진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이 의궤는 활자로 인쇄한 최초의 의궤이기도 했다.

장용영 수위식 재연장면, 정조가 신풍루에 올라 활쏘기훈련을 참관하는 장면이다. <원행을묘정리의궤>가 있기 때문에 재연가능하였다.
장용영 수위식 재연장면, 정조가 신풍루에 올라 활쏘기훈련을 참관하는 장면이다. <원행을묘정리의궤>가 있기 때문에 재연가능하였다. ⓒ 돌베개
의궤는 8일간의 행사 전체를 기록과 그림을 곁들여 나타내고 있다.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반차도인데, 김홍도를 비롯한 당시 화원들이 그렸다고 한다. 정조의 행렬을 63면의 그림으로 정리하였다. 행사 중간에 휴식 시간에 먹을 식사 때 사용한 그릇, 음식 재료, 밥상 장식 꽃의 숫자까지 기록되어 있어 그 자세함에 놀라울 뿐이다. 경기도에서는 이 의궤를 참고로 수원을 ‘효의 도시’로 홍보하기 위해 능행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정조는 도읍을 노론의 소굴인 서울에서 화성으로 옮길 생각이었을까? 1794년 화성 축조를 명령했다. 정약용이 총감독을 맡았다. 10년 넘게 걸릴 것으로 예상했으나 2년여 만에 끝냈다. 그리고 3년여에 걸쳐 <화성성역의궤>를 제작하였다. 이 구체적인 기록 또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화성은 한국전쟁 때 많이 파괴되었다. 지금은 많은 부분이 복원되었다. 행궁을 비롯한 많은 건물들도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모두 의궤에 실린 기록과 상세한 그림 때문이다. 의궤에서 보이는 기록정신은 눈부시다.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을 분야별로 이름, 근무 일수, 지급한 임금을 일일이 기록했다. 안돌이(安乭伊), 유돌쇠(柳乭金)와 같은 천인 이름도 보인다.

화성 축조에는 벽돌이 적극적으로 사용되었고, 공사에 필요한 기계들이 제작되고 이용되었다. 이때의 거중기를 비롯한 기계도 그림으로 그렸다. 18세기 후반 조선의 모든 역량이 총동원되었다. 화성은 조선 후기 문화의 총체이었고, 그것을 제대로 알 수 있게 만든 것은 바로 <화성성역의궤>였다. 우리는 이런 의궤가 있음을 마구잡이 자랑해도 되지 않을까?

조선시대 궁중에서 잔치는 어떻게 벌였을까? 잔치할 때 춤은 어떤 춤을 추었을까? 음식은 어떤 것이 있었을까? 궁중의 잔치를 알아보려면 <진연의궤> 혹은 <진작의궤>를 살펴보면 된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부터 반차도와 행사도가 첨부되어 그 생동감이 더해졌다.

기축년진찬도병 중 명정전외진찬도(부분), 무용수들이 춤추는 장면이다. 화려한 무용복과 무용 모습을 생생하게 그렸다. 마치 비디오를 보는 것 같다.
기축년진찬도병 중 명정전외진찬도(부분), 무용수들이 춤추는 장면이다. 화려한 무용복과 무용 모습을 생생하게 그렸다. 마치 비디오를 보는 것 같다. ⓒ 돌베개
잔치에는 춤이 따르기 마련이었는데, 궁중무용이 그 종류에 따른 동작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현재는 사라져버린 것이 많다는 생각이 안타깝기조차 하다. 잔치가 끝나면 잔치 장면을 화원을 동원하여 다양한 크기로 그렸는데, 잔치에 애쓴 사람들에게 직급에 따라 나눠줬단다. 공로상치고는 참으로 재미있기도 하고 기발하기도 하다. 그림의 수준이 있었으니 가능했을 것이다.

국왕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도 대단한 국가적 사업이었다. 그 과정을 어진의궤에 실었다. 임금의 모습을 보고 직접 그리는 도사(圖寫)보다는 훼손된 그림을 보고 그리는 모사(模寫)가 더 많았다. 이런 의궤는 모두 9건이 전하고 있다. 그 중 7건이 모사이고 2건이 도사라고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임금초상화는 태조, 영조, 철종 어진 3종밖에 없단다. 한국전쟁 때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단다. 안타깝고도 안타깝다. 그렇게 잘 보관되어 오던 보물들이 현재에 와서 사라지고 말다니.

의궤는 임금에게 행사 전말을 보고하는 보고서이기도 했다. 이것이 어람용 의궤였다. 최고의 글씨와 장정으로 품격이 대단했단다. 임금은 의궤를 보고는 보관처에 보냈다. 정조 임금은 규장각을 만들고 여기에 보관토록 했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됐다. 전쟁으로부터 가장 안전한 강화도에 규장각 분관인 외규장각을 짓고 여기에 보냈다.

그러나 이게 어찌된 일인가? 서구 열강들이 조선을 침략할 때 가장 주요 통로가 강화도가 되고 말았으니. 1866년에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략하고 퇴각할 때, 외규장각을 약탈했다. 그림이 화려하고 겉으로 보기에 그럴싸한 것 189종 340여 책은 챙기고 나머지 5천여 책은 불태워버리고 말았다. 그 중에서 경부고속철도 선정 때 한권만이 돌아왔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우리에게 있어야 제대로 의미와 가치를 받을 수 있는 의궤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19세기 후반 약 100년 전에 시민혁명으로 사회 민주화를 추진하고 있던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범하고 약탈하면서도 우리의 기록문화를 보고는 감탄했다. 자존심마저 상했던 모양이다. 해군 장교 주베르는 “이곳에서 감탄하면서 볼 수밖에 없고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아무리 가난한 집에라도 어디든지 책이 있다는 사실이다”라고 고백했다.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던 의궤의 내용이 어떤 것인 줄 알았더라면 그들의 자존심은 무참히 무너졌을 것이다. 이제라도 프랑스에게는 짐밖에 안되지만 우리에게는 무한한 가치를 지닌 우리의 의궤를 보내주길 바란다. 그것이 유일한 진정으로 자존심을 회복하는 길이므로.

조선 왕실 기록문화의 꽃, 의궤

김문식.신병주 지음, 돌베개(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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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 살고 있습니다. 낚시도 하고 목공도 하고 오름도 올라가고 귤농사도 짓고 있습니다. 아참 닭도 수십마리 키우고 있습니다. 사실은 지들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개도 두마리 함께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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