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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김성기)와 알돈자(강효성)
돈키호테(김성기)와 알돈자(강효성) ⓒ 민은실
지난 3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뮤지컬 <돈키호테>를 봤다. <지킬 앤 하이드>로 국내에 알려진 연출가 데이비드 스완의 솜씨를 다시 맛볼 수 있는 작품이어서 기대가 컸다.

뮤지컬 <돈키호테>는 소설 '돈키호테'를 썼다는 죄목으로 투옥된 세르반테스와 그의 시종 산초가 감방 죄수들과 함께 즉흥극을 벌이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면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무대를 연출하는 지하 감옥의 무대 세트와 절제된 안무, 애잔하면서도 쾌활한 스페인 특유의 음악이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최대한 원작을 살리려고 하는 배우들의 연기 덕분인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느낌의 뮤지컬이었다.

기사 수련중인 돈키호테는 허무맹랑한 생각들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허름한 주막을 '거대한 성'으로 착각하고, 주막 주인을 '성주님'이라고 부르기까지 하니 자칫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칼자루 쥐는 법도 모르는 양반이 겁없이 노새꾼들과 전투를 벌인다. 역시나 결과는 뻔하다. 실수투성이에 얻어맞기만 하는 그 순간 알돈자와 그의 종 산초가 없었다면 그는 녹다운 됐을 것이다.

그러나 정의에 불타며 끊임없이 이상을 외치는 돈키호테가 밉지 않다. 창녀에 불과한 알돈자를 고귀한 숙녀라는 이름의 '둘씨네아'라고 부르는 모습은 귀여워 보이기까지 하다. 기사가 사라진지 600년이 지났는데도 자신이 기사라고 믿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아끼지 않는다는 돈키호테는 대체 뭘 믿고 그리 긍정적인가.

모든 것이 그에게는 핑크빛 세상인 것이다. 그의 허무맹랑함에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다. 그가 둘씨네아라고 부르는 알돈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진실을 찾아가고 자신만의 세상을 꿈꾸는 돈키호테를 만나면서 그녀의 삶은 변한다. 희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돈키호테(김성기)와 산초(김재만)
돈키호테(김성기)와 산초(김재만) ⓒ 민은실
돈키호테(김성기)가 알돈자를 향해 부르는 'The Impossible Dream'은 <돈키호테> 뮤지컬을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는 곡이다. 주막에서 미친 짓을 하는 알돈자를 향해 힐란성 질문을 하는 돈키호테의 절규에 가까운 부르짖음인데 분노와 안타까움과 사랑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까닭이다.

<돈키호테>의 감초 역을 맡은 김재만의 연기도 돋보인다. 산초의 익살스러운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일부러 7kg이나 찌웠다는 그의 엉뚱함은 돈키호테 캐릭터를 보좌하기에 충분했다. 이상주의자 돈키호테를 중재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한 현실주의자 산초. 어쩌면 산초는 돈키호테의 또 다른 자아인지도 모른다. 이상에서 동떨어진 세르반테스의 밝은 자아 말이다.

정의를 향해 무한 질주하는 돈키호테의 허무맹랑함은 결국 고독하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가리키며 미치광이라고 말한다. 정의가 없는 곳에서 정의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 미치광이인가, 정의가 있음에도 없다고 고집 부리는 사람이 미치광이인가. 적어도 돈키호테의 허무맹랑함은 값없지 않다. 삶을 포기했던 알돈자에게 희망이라는 것을 심어줬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물음은 관객의 몫이다. 마지막 장면에 '누가 미치광이인가?' 라고 묻는 돈키호테의 대사가 없었더라면 여운은 더 길게 남았을 것이다. 답을 알려주지 않은 수수께끼가 더 흥미롭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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