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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정굴 재발굴 예비조사 현장
ⓒ 조영민
지하 15미터 직하한
굴속에 들어 왔다.
굉장히 시원하다.

그런데 금방 등골이 오싹해져
밖으로 뛰쳐나오고 만다.

깜깜한 굴속에 수백 개의 부릅뜬 눈과
잘린 혀가 나타나 아우성치고,
여기저기 핏발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일제시대 금맥을 찾겠다고
일본놈들이 50미터를 파 내려갔던
고양시 금정굴

금정굴에서 금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조선백성들의 피눈물로 가득 차고
넘쳐 흘러나왔을 뿐이다.

1950년 여름까지도 이곳은
동네 아이들이 돌맹이를 집어던지며 놀던 놀이터였다.

그런데, 1950년 10월
이 굴은 태극단에 의해 학살당한
무고한 양민들의 주검 수백구가 한꺼번에 묻히게 된다.
그 후로 금정굴은 사람도 짐승도 피해 다니는 죽음의 골짜기가 되었다.

이승만 모리배들이 한강다리를 폭파하면서
백성들을 버리고 도망갔다가
9월 28일 다시 서울로 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부역자 색출과 양민 학살이었다.
고양파주지역에서만 적게는 400명,
많게는 2천명까지 학살을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93년 고양시민회가 적극 나섰고, 금정굴 유족회가 결성되었다.
95년 유족들이 자비를 들여서 발굴에 나섰고,
160여구의 유골이 나왔다.
그러나 굴의 붕괴 위험이 있었고,
권한도 없고,
돈도 없는 상황에서 발굴은 중단되었다.
수백구의 유골은 서울대 의대 한켠에 임시로 보관되어 있는 상태다.

지금 금정굴은 10년 만에 다시
발굴 예비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이날 금정굴 유족회 회원들의 모임이 있었다.
당시 아버지가 희생당한 한분의 유족이
당시를 회상하며 토해내듯 상황을 말한다.

1950년 10월 26일인가 그럴꺼야.
우리 어머니가 밥을 해가지고 경찰서로 갔는데
담당경찰이 무슨 심사를 한다던가 하기 때문에 밥을 받지 않는다고 했어
가지고간 밥을 다시 싸들고 집에 돌아왔는데 누가 그래
무슨 심사는 심사냐 지금 금정굴에서 다 쏴 죽이고 난리가 났다는 거야.
밤이 되어 작은아버지와 내가 몰래 갔어.
불을 밝힐 수도 없고, 굴속에 들어가서 성냥을 한번씩 켜고
아버지 시신을 수습하려고 했는데 포기하고 말았어.
좁은 굴에 시신을 쌓아놓았고,
피비린내가 진동을 해서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 가 없었던 거야.
그런데 한 사람을 살렸어.
그 사람은 총을 뺨에 스치듯이 맞았고, 그냥 굴속으로 떨어졌던 거야.
시체더미에 쌓여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신음하는 걸 살려냈지.

그때 저쪽으로 태극단이 올라오고 있었어
우린 성급히 피해 달아났지.
그때 마주쳤더라면 다 죽었을 거야.
다음날 작은 아버지는 경찰서에 끌려가서 죽을 뻔했지
경찰이 권총을 머리에 갔다대면서
“너 이 새끼 빨갱이 찾으러 갔었지”하면서 죽이려 했어.
다행히 바닥에다 총을 쏘며 협박했지 죽이지는 않았어.

그때 좌익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북쪽으로 가버렸는데
심부름 같은 거 한 사람들과 먼 친척까지
그리고, 감정이 좋지 않은 사람을 모략해서 죽였어.
여자들도 많이 죽였고, 아이들도 마구 죽여 버렸어. 어휴~...

앗! 어르신 말씀을 듣고 있는 동안 무차별 공격을 당하고 말았다.
모기가 장난이 아니다.

이 놈의 모기들은 틀림없이 55년 전에
학살당한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은 모기들의 피를 이어 받았을 것이다.
또 오늘 통한의 세월을 살아가는 이들의 피를 빨아 먹는다.

지금 학살당한 이들의 뼈들은
서로 뒤엉켜 서울대 의대 한켠에서 신음하고 있다.
죽은자와 산자의 뼈는 이어져 있다.
죽은 자의 뼈가 아프면
산 자의 뼈도 아프다.

옛날 지금과 같은 유전학과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
죽은 자와 산자가 혈연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때
죽은 자의 뼈를 가져다
산자의 피를 뿌렸다
피가 뼈 속으로 스며들면 한 핏줄이요
피가 뼈 속으로 스며들지 않으면 한 핏줄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55년 전 학살의 공포는
피를 통해서 흐르고 있다.
뼈와 뼈가 부딪치며
뼈 속에 피가 스며 흐르고 있다.
피 속 유전자에 인식되어
피를 빨아 먹은 모기가 알을 낳고
다시 모기가 되어
오늘 나의 피를 가져가고
대신 공포를 전달 해 준다.

제발 하루라도 빨리 진상을 규명하여
억울하게 죽은 이들과
통한의 세월을 살아온 이들의 뼈가 아프지 않고,
안식을 취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위령비를 세우고 금정굴인권평화센터를 만들어야 한다.
바로 옆 태극단 추도비는 박물관으로 보내든지 천인공노할 만행을 적나라하게 적시하여 다시는 반인륜행위가 되풀이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아, 금정굴
식민지 수탈의 아픈 역사와
냉전 대립의 피멍이 들은
이 시대의 가시자리

우리 두손 마주잡고
아픈 가시자리에서
인권평화의 꽃이 활짝 피어나게 하자.

덧붙이는 글 | www.ngotimes.net에도 송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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