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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시내를 가로질러 흐르는 대동강
평양 시내를 가로질러 흐르는 대동강 ⓒ 박도
전할 수 없는 사진

북에서 돌아온 다음날(26일)부터 어제까지 사진 정리로 무척 바빴다. 이번 대회 기간에 찍은 사진은 디지털 카메라 800여 매, 슬라이드필름 200여 매로 1,000번 이상 셔터를 누른 셈이다.

슬라이드필름은 서울 충무로 단골집에 맡겨 현상 인화를 해서 찾고, 컴퓨터에 갈무리된 디지털사진은 다시 정리 분류했다. 내 사진 속에 담긴 인물을 찾아서 메일을 아는 분은 모두 보내드렸다.

아들을 데리고 출근하는 평양시민, 탁아소에 맡기고 직장으로 간다고 했다.
아들을 데리고 출근하는 평양시민, 탁아소에 맡기고 직장으로 간다고 했다. ⓒ 박도
내 사진을 기다리기나 한 듯 벌써 답장 메일이 여러 통 왔다.

"사진 고맙습니다. 묘향산 사진 안 찍었더라면 후회할 뻔 했군요. 실물보다 훨씬 예쁘게 찍혀졌으니 말에요. 후훗! 귀하게 보관하고 요긴하게 쓰도록 하겠습니다."
"사진 보내주셔서 고맙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더 좋은 인연으로 만나기를 바랍니다."
"보내주신 사진은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내 조그마한 수고로 감사의 인사를 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즐겁고 흐뭇한 일인가. 그런데 내가 찍은 사진의 대부분은 북한의 산하요, 북한 동포들의 모습이다.

소년궁전에서 만난 깜찍한 북한 어린이들의 귀여운 모습, 사적지나 명승지 곳곳에서 만난 안내원 누이들, 길거리에서 만난 동포들, 버스 기사, 나와 가장 대화를 많이 나눴던 민화협 안내원 동무, 북녘의 선배 후배 작가들 …

그런데 이들에게는 사진을 보내줄 수가 없다. 그들이 내가 보낸 사진을 받으면 얼마나 좋아하고 고마워할까? 사진 한 장으로 그들과 나는 더 가까워질 테고 다시 한 번 뜨거운 동포애를 느낄 것이다.

학교 수업이 끝난 뒤 학생소년궁전에서 국악(가야금)을 배우는 어린이들
학교 수업이 끝난 뒤 학생소년궁전에서 국악(가야금)을 배우는 어린이들 ⓒ 박도

한 마리 나비처럼 사뿐사뿐 춤을 추는 소녀들(학생소년궁전)
한 마리 나비처럼 사뿐사뿐 춤을 추는 소녀들(학생소년궁전) ⓒ 박도
지구에서 가장 먼 내 조국

나는 지금 강원도 산골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하지만 마우스만 클릭하면 내 컴퓨터에 담긴 글이나 사진을 지구 어디나 보내고 있다.

미국 워싱턴, 뉴욕에 사시는 동포, 캐나다에 사는 제자, 스웨덴에 사는 동포, 키르키즈스탄에 사시는 KBS 통신원, 연변의 동포에게도 시공을 초월하여 아무 때나 서로 소식과 안부, 사진을 주고받고 있다.

하지만 비행기를 타면 50분밖에 걸리지 않는 휴전선 너머 내 동포에게만은 직접 메일로 전할 수 없다. 지구에서 가장 먼 내 조국 땅이다. 그런데 북녘에도 소년궁전에서 학생들이 컴퓨터를 켜놓고 학습하는 장면을 보았기에 간접으로나마 내 사진이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보낼 수 없는 사진(1), 북한 안내원이 백두산 장군봉에서 해돋이를 바라보고 있다
보낼 수 없는 사진(1), 북한 안내원이 백두산 장군봉에서 해돋이를 바라보고 있다 ⓒ 박도

보낼 수 없는 사진(2),  백두산 밀영지에서 북한 안내원들과(가운데 남정현, 오른쪽 김영현, 왼쪽 필자). 이들 북한 안내원 복장이 일제 때 독립군 여전사의 복장이라고 한다.
보낼 수 없는 사진(2), 백두산 밀영지에서 북한 안내원들과(가운데 남정현, 오른쪽 김영현, 왼쪽 필자). 이들 북한 안내원 복장이 일제 때 독립군 여전사의 복장이라고 한다. ⓒ 박도
서울 평양 간 50분 거리

우리 일행이 탄 비행기는 러시아제 뚜-154 기종의 중형 여객기라는데 기름을 극도로 절약하고자 냉방을 해두지 않아서 기내가 몹시 무더웠다. 뜨거운 날씨에 정장차림으로 짐(카메라 가방과 노트북 가방에 집행부에서 부탁한 라면박스까지)에 치어 기내에 오르자 땀이 앞을 가릴 정도였다.

좌석에는 부채가 마련됐지만 기내 공기가 더우니까 부쳐도 시원치 않았다. 내 좌석은 11C로 통로 쪽이다. 비행기 창으로 조국의 산하를 굽어보려던 꿈은 접어야했다.

11:35, 마침내 비행기가 움직였다. 곧 활주로를 달리더니 사뿐하게 인천공항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우리 비행기는 서울 평양 간 540킬로미터를 시속 850킬로미터 고도 7900미터로 나릅니다. 비행시간은 50분입니다. 그럼 손님 여러분들의 유쾌한 여행이 되시기 바랍니다."

TV <남북의 창> 시간에 여러 번 보고 들었던 악센트가 강한 북녘 여성의 똑 떨어지는 안내방송이 북한여객기임을 실감케 했다.

보낼 수 없는 사진(3), 버스기사 서강호(43, 오른쪽)씨
보낼 수 없는 사진(3), 버스기사 서강호(43, 오른쪽)씨 ⓒ 박도
곧 여승무원이 수레에다가 신문과 잡지를 싣고서 승객의 요구대로 나눠주었다. 나는 <조선>이라는 월간잡지(우리나라 주간지와 비슷했음)와 <로동신문>을 집었다.

6면으로 발간된 2005년 7월 20일자 <로동신문>의 제1면 머리기사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정일 동지께서 최전연에 위치한 조선인민군 금성친위 제000군부대를 시찰하시였다"라는 큼직한 고딕 제목을 달고 있었다.

머리 제목 아래는 가로 36센티미터, 세로 14.5센티미터의 사진화보로 앞줄 가운데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검은 선글라스를 낀 채 서 있고, 그 왼쪽과 오른쪽에는 군과 내각의 간부들이, 뒷줄은 모두 9줄로, 줄마다 50명의 남녀 병사들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부동의 자세로 기념 촬영한 사진이 실렸다.

병사들이 서 있는 뒤에는 "위대한 김정일 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혁명의 수뇌부를 목숨으로 사수하자!"라는 구호를 쓴 피켓이 가운데 세워 있었다. 신문 편집이나 기사 내용이 우리의 신문과는 전혀 다른,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기관지'였다. 잡지의 내용도 비슷했다.

다시 여승무원들이 수레에다가 음료수를 싣고 왔다. 무엇을 들까 망설이자 승무원이 배사이다를 권했다. 배 맛에 사이다 맛으로 입안이 산뜻했다. 이어 기내식이 나왔다. 지난해 연길 유경반점에서 북한 음식 맛을 본 적이 있지만, 한마디로 북한의 음식은 그 맛이 담박하다. 화학조미료를 조금도 쓰지 않은 듯, 우리 옛맛을 느끼게 하는 그윽한 맛과 깊이가 있다.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으로 유명한 청천강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으로 유명한 청천강 ⓒ 박도
나라는 두 쪽이 나도 산과 강은 그대로다

그새 기내방송은 20분 뒤 이 비행기는 평양공항에 닿을 것이며 평양의 날씨와 기온을 알려주었다. 이렇게 가까운, 지난 날 내 집에서 학교로 출근하는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이 거리를 두고, 아직도 얼마나 많은 남북의 동포들이 망향의 아픔에 살고 있는가.

남녘 태생으로 북에 아무 연고도 이산가족도 없는 내가 그분들보다 먼저 북녘 땅에 발을 내딛는 게 못내 송구스러웠다. 식사가 끝나자 승무원들이 물과 커피를 날랐다.

입에 익은 커피 잔을 받았더니 "사탕가루 드릴까요?"하고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탕가루, 우유가루 두 봉지를 주었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사탕가루'인가. 그들은 또 우리네 크림을 우유가루라고 불렀다.

12: 30, 우리 일행을 태운 서울 발 평양행 JS 616기는 마침내 평양 활주로에 닿았다. 기내 창으로 바라본 평양은 조금도 낯설지 않은 내 조국이었다. 초록 들판의 벼, 콩, 옥수수, 소나무, 미루나무, 아카시아 … 평양이 아니라 원주공항이나 여수공항에 도착한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일찍이 두보는 <춘망(春望)>이라는 시에서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라고 노래했다. 비록 나라는 두 쪽으로 갈라졌지만 내 조국 강산은 그대로 남아 있음에 얼마나 반가우랴. 이날따라 내 조국 강산이 나그네의 눈시울을 적시게 했다.

"시절을 애상히 여기니 꽃을 보고도 눈물을 흘렸다(感時花濺淚)"는 두보의 마음을 이제야 헤아릴 것 같다.

북의  리동구(66)  작가와 남의 오수연 작가의 정다운 대담
북의 리동구(66) 작가와 남의 오수연 작가의 정다운 대담 ⓒ 박도

평양에서 만난 서울돈암초등학교 동창. 왼쪽 남의 김훈 작가와 오른쪽 북의 남대현 작가가 서로 동창임을 확인하고 껴안기 직전의 모습이다.
평양에서 만난 서울돈암초등학교 동창. 왼쪽 남의 김훈 작가와 오른쪽 북의 남대현 작가가 서로 동창임을 확인하고 껴안기 직전의 모습이다. ⓒ 박도

덧붙이는 글 | 그동안 오마이뉴스에 올랐던 인터뷰 기사를 모아 도서출판 '새로운사람들'에서 "박도가 만난 사람들 <길 위에서 길을 묻다>"라는 제목으로 책을 엮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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