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자신의 '꿈의구장'인 정읍역앞 구두수선소에서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권쌍주씨. 그는 신체장애4급의 장애우다.
자신의 '꿈의구장'인 정읍역앞 구두수선소에서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권쌍주씨. 그는 신체장애4급의 장애우다. ⓒ 정종인
'발이 편해야 마음이 편한 것은 당연한 이치죠'

'구두미화원(?) 아니면 구두수선공(?)' 속된 말로 구두닦이로 살아가면서도 구김살 없이 살아가는 사람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들려왔다. 어린시절 사고로 육체적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구두미화원의 애잔한 사연이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정읍역 부근에서 '유명인사'로 통하는 권쌍주(57)·김종순(46) 부부가 화제의 주인공. 각자 장애를 앓는 장애우 부부지만 서로 등받이가 되어주며 알콩달콩 살아가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세상에 안해본일이 없을정도로 산전수전을 겪은 권쌍주씨. 이름이 특이하다.
세상에 안해본일이 없을정도로 산전수전을 겪은 권쌍주씨. 이름이 특이하다. ⓒ 정종인
삼복더위에 구두와 씨름하는 권쌍주씨. 구두광을 내는 일은 그래도 나은 편이지만 구두를 수선하는 일은 요즘 같은 더위 속에서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정읍시민들로부터 그는 '구두닦이의 달인'이라는 닉네임을 선물 받았다.

권씨는 구두를 닦고 광을 내는 수많은 방법 가운데 물광에 대해서는 '최고수'로 통한다. 바둑으로 말하면 이창호 9단과 견줄만 하다는 게 동료들의 평가다. 정읍시 연지동 정읍역 앞 광장 맞은편에서 희망의 둥지를 틀고 있는 '구두미화원' 권쌍주씨의 얼굴에는 늘 미소가 있다. 그만큼 자신의 일에 만족하고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가는 그의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권쌍주씨는 한 일터에서 연신 흘러내리는 비지땀을 흘려가며 오고가는 친근한 이웃들의 구두를 닦아준다.

부인 김종순씨도 어린시절 사고로 2급청각장애우다. 치료비가 없어 장애우가 된게 가장큰 슬픔이다.
부인 김종순씨도 어린시절 사고로 2급청각장애우다. 치료비가 없어 장애우가 된게 가장큰 슬픔이다. ⓒ 정종인
"구두닦이가 남들은 천한 직업으로 여길지 몰라도 저는 최고 자부심을 느낍니다. 지저분한 구두가 저의 손을 거치면 신데렐라 유리구두가 되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하지요."

특유의 전라도 사투리가 진하게 묻어나는 말투도 재미있다. 일에서 얻어지는 재미를 알고 즐거움을 아는 권씨는 자주 콧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그의 말투는 다소 어눌해 보이기도 하지만 삶의 교훈들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취재 중에 함께한 손님에게 단골된 비결을 묻자 이구동성으로 '물광'을 든다. 자신만의 독특한 트랜드를 가져야 살아남을 수 있는 21세기 '정글의 법칙'을 아는 사람이다.

권씨는 구두에 관해서는 세상 어떤 일 보다 자신이 있다. '물광의 대가' 권씨가 구두를 수선하는 모습을 보면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삼매경에 빠져든다. 진지한 작업분위기는 어느 누가 보아도 인정할 만하다. 권씨의 고향은 전북 익산이다. 유소년시절에 정읍에 정착한 권씨는 세상고생은 다해 봤다.

남이 하기 싫은 일을 찾아해야 배고픔을 해결하고 생활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모진 풍파를 겪으며 살아왔다. 일명 노가다(막노동)는 물론 건설현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준 전문가 수준이다. 벽돌벽을 마감하는 미장이로도 한때는 잘나갔다.

2급과 4급 장애우 부부인 권쌍주씨와 김종순씨부부는 90대년 저축왕에 올라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2급과 4급 장애우 부부인 권쌍주씨와 김종순씨부부는 90대년 저축왕에 올라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 정종인
리어카로 연탄배달도 해봤다. 부화장에서 병아리도 키워봤다. 수박장사 경험이 있어 요즘도 맛있는 과일을 골라내는 것은 자신있다. 그동안 권씨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일년 열두 달 쉬어본 일이 없다.

"닥치는 데로 일했지요. 건설경기가 없는 겨울에는 빙판길을 올라 연탄배달을 하고…."

권씨 기억으로 다섯 살쯤 되던해 마당에서 놀다가 옆 난간으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지만 가난한 살림살이로 인해 병원에도 가보지 못하고 결국 장애우의 비애를 안아야 했다. 그는 현재 신체장애 4급 판정을 받은 장애우다.

"지금 가장 어려웠을때를 생각하며 회고해 보면 청소년기인 17살 되던해 로 기억되는데 어찌나 배가 고프고 해서 울면서 길거리를 해매는 날이 다반사 였을 정도였지요."

그때부터 죽기 살기로 열심히 일했다.

부인 김종순씨도 어렸을 때 사고로 2급 청각장애를 안고 살아간다. 부인 김씨도 권씨 못지 않게 험란한 인생 항해를 한 주인공이다. 인터뷰 도중에도 종이에 적어나가는 부분이 답답해 보였는지 권씨가 대신 통역을 해주는 친절을 보이기도 했다.

지난 90년대 초에는 저축의 날을 맞아 대통령상을 수상한 권씨 부부. 당시 함께 수상했던 대통령 휘호가 새겨진 시계와 상장을 가보처럼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요즘 권씨부부는 불경기지만 그의 기술력과 성실함을 인정해주는 단골손님들이 즐비해 큰 어려움은 없다.

슬하에 1남1녀를 둔 이들 부부는 대학에 재학 중인 자녀들이 부모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효자, 효녀라고 자랑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제는 평생소원이었던 내 문패가 달린 쉴만한 집도 파출소 뒤에 장만을 했어요. 저에게는 과분한 30여평 단독주택이지요."

이들 부부는 지난시절 역경을 뚫고 살아온 만큼 어려운 이웃을 보면 밥 한 끼라도 대접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에 만족하며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고단한 삶에 지친 서민들의 마음까지 닦아주기 위해 땀범벅이 되어도 권씨의 작업은 그칠 줄을 몰랐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