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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에는 장판수가 밧줄하나에 허리가 묶여 대롱대롱 매달린 채 위를 보며 욕을 퍼붓고 있었다.

“야 이 가이삿기들아! 이런다고 뭐가 달라질 줄 아네! 차라리 줄을 끊고 날 죽이라우!”

욕을 퍼붓는 장판수위로 정체를 알 수 없는 군관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제 전쟁은 끝났는데 너희들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이냐? 당장 군사들을 해산하지 않으면 이 자를 죽이겠다!”

차충량, 예량 형제와 최효일은 물론 병사들도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남한산성에 들어서 있는 자들이 자신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것은 눈치 챌 수 있었으나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철군을 강요할 정도라는 건 누구도 예상 못한 일이었다. 최효일이 성벽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너희들은 대체 누군데 이러는거냐! 장초관을 이리로 돌려 보내거라!”

군관은 껄껄 웃으며 최효일에게 손가락질을 해대었다.

“네 놈들이 어디서 굴러먹던 개뼉다귀들이길래 내게 이래라 저래라 말하는 것이냐! 병마사를 이리로 데려와 내게 간청하도록 해라!”

그 말에 흥분한 최효일이 마구 욕지거리를 내뱉자 차충량이 급히 이를 말리며 군관에게 소리쳤다.

“시일이 너무 촉박하니 기다려 주시게나!”

군관은 콧방귀를 끼며 대답했다.

“그럼 내일 해 뜰 녘까지 대답을 주어라! 그렇지 않으면 이 자의 목숨은 없다!”

그때는 거의 해질 무렵이었으니 군관의 말인즉, 하룻밤을 자고 난 뒤 장판수를 죽일 것이냐 살릴 것이냐 결론을 내리라는 말이었다.

“그까짓 거 무시합시다! 애석하나 장초관을 희생하는 수밖에 없소!”

군관이 성벽 위에서 모습을 감춘 후 최효일은 마구 소리를 질렀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 상황을 보시오. 일전의 전투도 장초관이 있었다면 어찌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었소. 장초관이 없어 군졸들의 동요가 심해지니 이래서는 장초관을 희생시켜 싸운다 한 들 앞일을 장담할 수가 없소이다.”

그 말에 최효일도 더 이상 자신의 주장만을 앞세울 수 없었다. 자신이 지휘한 싸움이 패배한 것은 분명 사실이었고 장판수에 비해 지휘관으로서의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최효일은 옹졸하게 자신만을 옹호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내가 성벽을 넘어가 장초관을 구해오겠소!”

최효일이 즉시 뛰어나가려 할 때 장막 뒤에서 조심스레 계화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먼저 제 말을 듣고 가시오. 내 일찍이 남한산성의 암문을 드나든 적이 있다오. 그때 길을 눈여겨보아 두었으니 그리로 들어가는 것은 어떠하오?”
“암문? 하지만 성안의 놈들도 암문마다 보초를 세워두었을 것이 아닌가?”

최효일의 말에 차예량이 신중히 입을 열었다.

“성위를 보니 그리 많은 병졸이 있는 것 같지는 않소. 암문마다 사람을 세워 놓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무작정 성벽을 타고 넘어가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소?”
“소녀가 앞장서겠나이다. 길은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계화의 말에 최효일이 당장 따라 나서려 하자 차예량이 그를 막아섰다.

“종사관께서는 이곳에 있으시오. 내가 가리다.”

최효일은 정색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어허! 이 일은 내가 하리다!”
“장초관이 없어 어수선한 판국에 종사관마저도 진을 비우면 어찌 병사들을 지휘할 수 있겠소? 종사관이 아니면 병사들을 맡을 수 없으니 이 일은 내게 맡겨 두시오.”

패전으로 인해 의기소침해진 최효일의 기를 은근히 살려주는 차예량의 말이었다. 최효일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 지 더 이상 나설 명분이 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럼 차선달만 믿겠소! 데리고 갈 병졸은 몸이 날랜 이들로 스무 명쯤 대기시켜 놓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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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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