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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풍령 휴게소에서의 텐트
신풍령 휴게소에서의 텐트 ⓒ 정성필

아침이다. 여느 때와는 달리 새소리나 바람소리가 아닌 자동차 소리에 잠을 깬다. 폐주유소인지 모르고 서울 번호판을 단 승용차 한 대가 주유소로 들어와 빵빵거린다.

잠을 깬다. 부스스한 채로 일어나 밖을 본다. 승용차에서 사람들이 내린다. 주유소 안을 들여다본다.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오랜만의 따스한 잠에 취했는지 해가 이미 중천이다. 시계를 본다. 9시. 매일 걷고, 매일 땀을 흘리고 매일 먹는 것조차 부실한데, 그동안은 깊은 잠을 잘 못 잤다.

자다 깨다를 반복한다든지, 너무 일찍 일어난다든지, 일어나면 다시 잠들기 힘들다든지, 이런 일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간밤엔 완전한 잠을 잤다. 꿈도 없이, 깨는 법도 없이, 춥지도 않게, 편하게 잤다. 잠만 편하게 자도 이렇게 행복한 것을. 몸이 말끔하다. 간밤엔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세면대가 있는 곳에서 이도 닦고, 샤워도 했다. 밥도 반듯하고 편편한 곳에서 먹고, 잠도 처마 밑에서 잤다. 이슬도 맞지 않고 추위에 떨지도 않고 깊은 잠을 잤다.

집에 있을 때, 소중하다 느끼지 못했던 것조차 산에서는 온통 감사 할 일이다. 승용차에서 내린 사람이 나를 보더니 무슨 무서운 범죄자를 본 것처럼 흠칫 놀라더니 떠나 버린다. 며칠 거울도 보지 못했다. 아침 화장실로 가 세면대 앞의 커다란 거울을 본다. 까맣게 탄 얼굴, 살이 쭉 빠져 버려 주름살이 더 깊어진 얼굴, 씨익 웃으니 치아가 더 하얗게 보인다. 그 사람 놀라서 갈만도 했겠다라는 생각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간밤 일찍 일어나 함께 가기로 한 태환형이 왜 나를 안 깨우고 갔을까? 생각해본다. 혹시 늦게 출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침을 느긋하게 먹으며 기다리기로 한다. 아침은 저녁에 해 놓은 밥을 먹는다. 느긋하게 고추나물과 주변에 아직도 연한 쑥을 뜯어 된장 풀고 국을 끓인다. 쑥향 가득한 국물에 밥, 감사하다. 이렇게 살아있음과 여기까지 건강하게 왔음에 감사하다. 히말라야 14좌를 세계 최초로 올라선 라인홀드매쓰너의 말이 생각난다. “등산의 참다운 기술은 살아남는데 있다”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내 체력으로 그렇게 먼 길을 갈 수 있을까? 의심했다. 할 수 있을까보다는 할 수 없을 거야라는 속삭임이 더 강했다. 그러나 여기까지 왔다. 할미봉의 거친 암릉을 뒤뚱거리며 넘었다. 잡목에 팔이 긁히고 비에 온몸 젖으며 걸었던 길이 여기 까지 왔다. 물론 전체 거리의 1/4이 채 안되는 길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밥을 먹고 텐트를 걷으며 천천히 태환형을 기다린다. 오겠지? 먼저 갔더라면 불렀을 텐데, 라며 기다렸다. 11시.

“이상하다.”

“지나갔나?”

“지나갔다보다.”

나는 서둘러 다음 산행지로 가기 위해 들머리를 찾는다. 들머리는 도로로 잘린 가파른 언덕을 올라야 한다. 키 낮은 관목 숲이 나오고, 가지가 많은 소나무 숲이 팔을 잡아챈다. 걷다가 배낭에 가지에 걸려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날이 덥다. 빼재에서 충분히 가져온 물도 곧 떨어질 듯하다. 처음 출발할 때는 물을 많이 마시지 않았다. 날이 더워지면서 물을 많이 마시기 시작한다. 이상고온이 며칠 째 계속된다. 아직 오월인데도 온도는 30도를 웃돈다.

태양도 뜨겁다. 낮은 산이 계속 이어진다. 지겨운 니키다소나무의 군락을 벗어나니 싸리나무 군락지가 나온다. 키 낮은 싸리나무 군락에 연한 잎이 오르고 있다. 싸리 군락은 상당 구간 이어진다. 연하게 오른 나뭇잎에 눈이 즐겁다. 점심을 먹는다. 산에서 먹는 일은 중요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산에선 먹는 만큼 간다.” 아침에 남겨 놓은 밥을 먹는다. 낮은 산이라 파리 때가 덤벼든다. 전에는 파리를 쫓으려 팔을 휘젓기도 하고, 끊임없이 덤벼드는 파리에게 화도 냈지만, 오늘은 파리를 무시한다. 붕붕거려도, 덤벼들어도 쫓아내지 않는다. 묵묵히 밥만 먹는다.

“너희들도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이렇게 목숨 걸고 덤비겠냐?”

늦은 점심을 먹고 다시 출발한다.

덧붙이는 글 | 2004년 5월 16일부터 7월 4일까지 백두대간 무지원 단독 연속종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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