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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이었는데, 한 명은 낯익은 얼굴이었다. 지리산에서 만난 김태환씨였다. 옆에는 지원을 나온 김태환씨의 후배 김종호씨라 했다. 동엽령에서부터 출발해 지금 도착했다는 것이다.

김태환씨는 나보다 두 살이 많다. 형이라 부르기로 했다. 두 사람도 나처럼 물 없이 온 듯, 코펠 가득 담겨있는 물을 보더니 달라한다. 두 사람은 코펠 가득 담겨있는 물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마신다. 그 모습 보니 흐뭇해진다. 더 마시라고 나머지 물도 권하지만 배부르단다. 갈증이 심했던 모양이다. 얼굴에 피로가 역력해 보인다.

어디서 자느냐 물었다. 내심 함께 자자 권하고 싶었는데, 저 밑에 조금만 가면 산장이 있다는 것이다. 지도에 그렇게 표시가 되어 있단다. 거기서 식사도 하고 씻기도 하겠단다. 사실 나는 지도도 변변한 것을 들고 온 게 아니다. 인터넷 사이트에서 대충 유용하다 싶은 지도 몇 개 종류별로 프린트해가지고 온 것이 전부였으니 태환형처럼 자세한 정보가 없다.

정보가 없는 것은 그만큼 불편하고 힘들다는 것. 나는 태환형 일행을 따라 함께 산장에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 이미 텐트를 쳐놓고 밥을 하고 있으니, 지칠 대로 지친 태환형 일행을 마냥 여기 묶어둘 수 없는 일이다.

밥이 다 되면 함께 먹고 가라고 권하고 싶었으나 반찬이 없다. 차마 권하지 못했다. 내일 아침에 만나자고 말을 건넨 후 태환형과 종호씨는 도로를 따라 내려간다. 두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 나는 혼자 남아 텅 비어 더 넓게 보이는 폐주유소 자리에 바람이 지나가는 것을 본다.

밥이 다 된 듯하다. 주변에서 취나물과 참나물을 딴다. 막영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장소인데 산이 아닌 탓인지 어제 만큼 행복하지는 않다. 신풍령 고개를 넘어가는 자동차 소리가 연방 들리고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이 가끔 내가 있는 텐트를 비추며 지나간다.

하늘엔 온통 별이 가득하다. 오늘은 푹 자야 할 텐데, 자동차 소리와 헤드라이트 불빛에 쉽게 잠들지 못할 것 같다. 혼자 있을 땐 몰랐지만 사람이 지나간 자리는 더 허전한 법인가 보다.

함께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라 생각했던 태환형을 스치듯 만난 게 겨우 두 번째이지만 그러나 그 만남은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는 느낌이 오고간 듯, 형이 지나간 자리가 구멍처럼 넓어져간다. 추스르고 자야한다. 촛불 아래서 일기를 쓴다. 오늘은 바닥이 평평해서 쉽게 잠들 듯하다. 게다가 처마가 지붕 노릇을 해줄 터이니 오늘은 이슬도 맞지 않고 잘 것 같다. 아침이면 세상에 온통 햇빛이 지천일 거다. 아침이 기다려진다.

▲ 신풍령 휴게소에서의 텐트
ⓒ 정성필

아침이다. 여느 때와는 달리 새소리나 바람소리가 아닌 자동차 소리에 잠을 깬다. 폐주유소인지 모르고 서울 번호판을 단 승용차 한 대가 주유소로 들어와 빵빵거린다.

잠을 깬다. 부스스한 채로 일어나 밖을 본다. 승용차에서 사람들이 내린다. 주유소 안을 들여다본다.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오랜만의 따스한 잠에 취했는지 해가 이미 중천이다. 시계를 본다. 9시. 매일 걷고, 매일 땀을 흘리고 매일 먹는 것조차 부실한데, 그동안은 깊은 잠을 잘 못 잤다.

자다 깨다를 반복한다든지, 너무 일찍 일어난다든지, 일어나면 다시 잠들기 힘들다든지, 이런 일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간밤엔 완전한 잠을 잤다. 꿈도 없이, 깨는 법도 없이, 춥지도 않게, 편하게 잤다. 잠만 편하게 자도 이렇게 행복한 것을. 몸이 말끔하다. 간밤엔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세면대가 있는 곳에서 이도 닦고, 샤워도 했다. 밥도 반듯하고 편편한 곳에서 먹고, 잠도 처마 밑에서 잤다. 이슬도 맞지 않고 추위에 떨지도 않고 깊은 잠을 잤다.

집에 있을 때, 소중하다 느끼지 못했던 것조차 산에서는 온통 감사 할 일이다. 승용차에서 내린 사람이 나를 보더니 무슨 무서운 범죄자를 본 것처럼 흠칫 놀라더니 떠나 버린다. 며칠 거울도 보지 못했다. 아침 화장실로 가 세면대 앞의 커다란 거울을 본다. 까맣게 탄 얼굴, 살이 쭉 빠져 버려 주름살이 더 깊어진 얼굴, 씨익 웃으니 치아가 더 하얗게 보인다. 그 사람 놀라서 갈만도 했겠다라는 생각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간밤 일찍 일어나 함께 가기로 한 태환형이 왜 나를 안 깨우고 갔을까? 생각해본다. 혹시 늦게 출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침을 느긋하게 먹으며 기다리기로 한다. 아침은 저녁에 해 놓은 밥을 먹는다. 느긋하게 고추나물과 주변에 아직도 연한 쑥을 뜯어 된장 풀고 국을 끓인다. 쑥향 가득한 국물에 밥, 감사하다. 이렇게 살아있음과 여기까지 건강하게 왔음에 감사하다. 히말라야 14좌를 세계 최초로 올라선 라인홀드매쓰너의 말이 생각난다. “등산의 참다운 기술은 살아남는데 있다”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내 체력으로 그렇게 먼 길을 갈 수 있을까? 의심했다. 할 수 있을까보다는 할 수 없을 거야라는 속삭임이 더 강했다. 그러나 여기까지 왔다. 할미봉의 거친 암릉을 뒤뚱거리며 넘었다. 잡목에 팔이 긁히고 비에 온몸 젖으며 걸었던 길이 여기 까지 왔다. 물론 전체 거리의 1/4이 채 안되는 길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밥을 먹고 텐트를 걷으며 천천히 태환형을 기다린다. 오겠지? 먼저 갔더라면 불렀을 텐데, 라며 기다렸다. 11시.

“이상하다.”

“지나갔나?”

“지나갔다보다.”

나는 서둘러 다음 산행지로 가기 위해 들머리를 찾는다. 들머리는 도로로 잘린 가파른 언덕을 올라야 한다. 키 낮은 관목 숲이 나오고, 가지가 많은 소나무 숲이 팔을 잡아챈다. 걷다가 배낭에 가지에 걸려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날이 덥다. 빼재에서 충분히 가져온 물도 곧 떨어질 듯하다. 처음 출발할 때는 물을 많이 마시지 않았다. 날이 더워지면서 물을 많이 마시기 시작한다. 이상고온이 며칠 째 계속된다. 아직 오월인데도 온도는 30도를 웃돈다.

태양도 뜨겁다. 낮은 산이 계속 이어진다. 지겨운 니키다소나무의 군락을 벗어나니 싸리나무 군락지가 나온다. 키 낮은 싸리나무 군락에 연한 잎이 오르고 있다. 싸리 군락은 상당 구간 이어진다. 연하게 오른 나뭇잎에 눈이 즐겁다. 점심을 먹는다. 산에서 먹는 일은 중요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산에선 먹는 만큼 간다.” 아침에 남겨 놓은 밥을 먹는다. 낮은 산이라 파리 때가 덤벼든다. 전에는 파리를 쫓으려 팔을 휘젓기도 하고, 끊임없이 덤벼드는 파리에게 화도 냈지만, 오늘은 파리를 무시한다. 붕붕거려도, 덤벼들어도 쫓아내지 않는다. 묵묵히 밥만 먹는다.

“너희들도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이렇게 목숨 걸고 덤비겠냐?”

늦은 점심을 먹고 다시 출발한다.

덧붙이는 글 | 2004년 5월 16일부터 7월 4일까지 백두대간 무지원 단독 연속종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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