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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도윅, <질 들뢰즈의 시간 기계> 표지
로도윅, <질 들뢰즈의 시간 기계> 표지 ⓒ 그린비
들뢰즈의 저작과 해설서가 이미 국내에 많이 소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에 관한 저작들은 상당 부분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었다. 영화를 모르는 철학자들과 철학을 모르는 영화학자들이 대다수인 현실에서, 둘을 함께 조망하는 그의 저작은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의 영화철학에 관심을 가졌지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힘들었던 독자들에게는 희소식이 될만한 새 책이 나왔다. 영화학도인 김지훈씨의 번역으로 나온 데이비드 노먼 로도윅의 <질 들뢰즈의 시간 기계>는 '알기 어렵다'는 이유로 푸대접을 받던 들뢰즈의 영화 철학에 대한 충실한 해설서를 자임하고 있다.

영화와 사유는 닮았다 :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

"뇌는 스크린이다"라는 말이 함축하는 것처럼 들뢰즈에게 영화는 사유와 대칭을 이룬다. 들뢰즈에게 물질, 이미지, 세계는 다른 말이 아니다. 들뢰즈의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는 사유와 이미지의 관계를, 또 시간을 다루는 영화의 두 가지 방식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영화와 사유는 닮았다. '운동-이미지'는 영화의 운동이지만, 이는 총체화하고 기호를 '전체'에 귀속시키는 사유의 운동과 동일한 과정이다. 그런가 하면 '시간-이미지'는 새로운 것의 출현을 촉발시키는 영화의 가능성이자 사유의 가능성이다.

로도윅에 따르면 들뢰즈의 영화에 관한 두 책 <시네마 1:운동-이미지>와 <시네마 2:시간-이미지>는 "영화를 통해 사유와 이미지의 관계를 해명하려고 한 시도"였다. 들뢰즈는 "영화가 시간과 운동에 대한 사유를 시청각적으로 표현하는 미학적 실천"이라고 믿었다. 들뢰즈는 영화의 공시적 의미작용에 집중하는 지배적 연구에 반발감을 가졌었고, 따라서 그의 영화 연구의 초점은 '시간'이었다.

'운동-이미지'는 사유와 이미지의 관계를 동일성과 총체성의 형태로 파악하고, 시간을 유기적 통일성을 가진 전체를 형성해가는 과정으로, '예측 가능한 것'으로, 간접적으로 제시한다. 반면 '시간-이미지'는 사유와 이미지의 관계를 비동일성의 형태로 상상하며, 시간을 새롭고 뜻하지 않은 것이 출현하는 각각의 순간으로 직접적으로 제시한다.

'운동-이미지'가 헤겔의 변증법적 사유에 대응한다면, '시간-이미지'는 니체의 계보학적 사유에 대응한다. 로도윅은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가 단순히 역사적 선후관계가 아님을 강조한다. "2차 대전 이전의 영화 전부와 그 이후의 영화들 중 대부분"을 규정하는 것이 '운동-이미지'인 반면에 "'사유-이미지'는 매우 드물다." 둘의 차이는 시간적 선후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과 '사유의 이미지'를 대하는 문제설정의 차이인 것이다.

'시간 기계'와 '바깥의 사유'의 가능성

철학을 "개념의 창조"로 정의했던 들뢰즈에게 '시간'은 "새로운 것의 창조를 위해 항상 회귀하는 가능성"이었다. 그리고 영화는 그러한 '시간'을 다루는 예술이다. 들뢰즈에게 영화가 특권적인 지위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아도르노가 새로운 형태의 음악에서 유토피아를 예감했던 것처럼, 들뢰즈는 영화를 통해 '저항의 기억'을 발견한다. 영화의 운동을 추동하는 '근원적인 예술의지'는 사유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허상을 만들어낸다. '사유내 사유되지 않은 것'을 만들어냄으로써 그것을 설명할 수 없는 지배적 사유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유를 촉발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들뢰즈가 강조하는 '바깥의 사유'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시간-이미지'는 새롭고 뜻하지 않은 것의 출현을 통해 이제까지 권력의 다이어그램과 역사적 형성체의 '바깥'에 있는 어떤 '힘'을 제시한다. 그것은 권력이 정태화하려고 시도했던 유동적인 다양체, '미래-지향적 힘'이다.

권력이 정태화하는 것, 표준화된 상품생산과 정보의 증식은 현대 사회를 동일자의 회귀로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시간 기계'로서의 영화 예술은 '차이'를 통해 반복에 개입한다. 잠재성의 형태로 내속하던 가능성을 이미지를 통해 드러냄으로써 그로 이행할 수 있는 도주선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 예술의 '시간 기계'는 동일자의 회귀를 '차이'의 반복으로 대치한다.

이렇게 사유를 통해 영화를 바라보고, 영화를 통해 사유하려 했던 들뢰즈에게 "유토피아는 철학 또는 개념이 현재 환경과 접합접속되는 것"이었다. 현재 속에 '잠재성'을 끊임없이 접합접속시키는 영화 예술을 통해 그는 유토피아를 예감하려 했을 것이다. 그것은 권력이 아무리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는 '저항의 기억'이기도 하다.

"그것은 말없음이 아니라 오히려 다가와야 할 것과 사유되지 않은 것들을 위해 현재의 상태에 절대적으로 저항하는 것이다. 유토피아의 개념은 철학을 그 역사적 시대, 곧 후기 자본주의 시대와 결합하게끔 한다. 합의와 공모가 아니라, 저항과 비판으로서 말이다"(389쪽)

덧붙이는 글 | 1. 아도르노가 음악을 다루는 방식과 들뢰즈가 영화를 다루는 방식은 꽤 닮았다. 아도르노의 사상에서 후기의 음악학적 저작이 가지는 위치와 가능성을 설명한 노명우의 <계몽의 변증법을 넘어서>와 이 책을 비교해가며 읽어보자. 재밌는 도전이 될 것 같다.

2. 이 책은 들뢰즈의 영화 철학에 대한 해설서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들뢰즈의 입문서도 영화에 대한 입문서도 될 수 없으니 초심자들은 내공을 보다 다진 뒤에 도전하는 것이 좋겠다.


질 들뢰즈의 시간기계 - 영화를 읽는 강력한 사유, 에 대한 예술철학적 접근

데이비드 노먼 로도윅 지음, 김지훈 옮김, 그린비(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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