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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계사 삼거리에서의 막영
ⓒ 정성필
덕유산 종주는 탁 트인 시야와 시원한 바람으로 행복했다. 한국 땅에서 해발 천 미터 이상으로만 이루어진 능선이 그리 많지 않을텐데 덕유산은 해발 천 미터 이상으로 이루어진 능선이다. 지리산을 걸을 때만큼 시원한 풍경이 계속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동엽령을 지나 송계사 삼거리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7시쯤이다. 동엽령에서 물을 보충하고 왔어야했는데, 물을 뜨러 몇 백 미터를 내려간다 생각하니 아득해져, 남은 물로 버티기로 한다. 해가 서편 장안산 지나 먼 하늘에 걸치자 바람이 심해진다. 텐트를 쳐야하는데 텐트 칠 장소가 없다.

바람이 심해 능선 상에 텐트를 칠 수도 없고, 멀리 향적봉 대피소까지 가자니 체력도 바닥이 난 상태이다. 진퇴양난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어둡기 전에 빨리 텐트치고 안정을 취하는 일이다. 텐트를 칠 만한 작은 공간 하나 없어 결국 바람이 불어오는 서쪽 반대편 동쪽 경사진 곳 나무 아래 텐트를 친다.

이젠 텐트 치는 일에 익숙하다. 십분도 채 안 걸려 텐트를 친다. 더 어둡기 전에 밥을 한다. 물이 부족해서 쌀에 물만 부어 버너에 올린다. 배고프다.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한 이후로 늘 배가 고프다. 배고프다 못해 허기가 진다.

걷는 일은 장운동을 하는 일이어서 소화가 잘된다. 산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변한게 있다면, 밥맛이 좋아졌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장이 편해졌다. 배변이 일정하고, 뱃살이 줄기 시작했다. 나는 일종의 복부 비만자였다. 키 165에 허리둘레가 34였으니, 거의 자루나 다름없는 몸매였다. 내 몸, 뱃속은 온통 누런 지방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내장 지방, 그것을 빼야 나의 성인병이 근본적으로 사라질 것이다.

백두대간을 시작하기 전 나의 신체 문제는 분명했다. 소화불량에, 가스에 더부룩한 배와 심한 설사와 불규칙한 배변이 나의 문제였는데, 산길을 걸으면서부터는 그러한 현상이 어느새 사라졌다. 속은 늘 편했다. 소화가 잘됐고, 몸은 항상 가벼웠다. 다만 하루 종일 걷는 장시간의 산행을 받쳐주지 못하는 나의 체력만이 문제였을 뿐 몸은 보이지 않는 곳부터 점차 좋아지고 있었다.

밥을 할 때는 다음날 아침과 점심에 먹을 밥까지 한꺼번에 다 해놓는다. 저녁에 먹고 남은 밥은 비닐에 두 덩어리로 나누어 싸놓는다. 한 덩어리는 아침에 먹고, 나머지는 점심에 먹는다. 그렇게 해야 밥 해먹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이렇게 한꺼번에 세 끼 분의 밥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첫째는 물 문제를 해결해야한다. 물이 있어야 밥을 한다. 물이 없으면 생쌀을 먹어야한다. 산에서 물을 구하는 일은 어렵다. 다행히 능선상에 물이 있으면 좋지만 그러나 대개 물을 구하기 위해서는 몇 분에서 심지어는 몇 시간의 노력을 해야 한다.

그 노력은 산을 오르내리는 고통스러운 일이다. 고통은 곧 체력과 연결된다. 끝까지 가려면 체력이 있어야 한다. 줄일 수 있는 것은 줄이고, 참을 수 있는 것은 참아야 한다. 아니 참지 못할 일도 참아야 한다. 산에서 밥을 매 끼니 해, 밥 냄새 구수한 밥을 먹는 일은 매우 행복한 일이지만 사실상 힘든 일이다.

그래서 매 끼니 막 지어낸 밥 냄새의 황홀함을 참아야 한다. 저녁은 방금 지어낸 밥을 먹어도, 해뜨면 천막을 걷고 배낭을 꾸려 출발해야 하는 분주한 산행자에게는 아침을 해먹는 것은 시간 부족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아침부터 운행을 하는 점심까지는 저녁에 해 논 밥으로 대신한다.

▲ 장안산으로 지는 해
ⓒ 정성필
밥을 지어놓고 잠간 짬을 내 해지는 것을 보러간다. 멀리 장안산 너머로 해가 진다. 붉게 스러져 가는 태양을 본다. 산 정상에서 노을을 보는 일은 드문 일이지만 지금 여기서 오늘 보고 있다. 하늘이 온통 보랏빛 기운 가득한 붉은 색 물감처럼 번진다.

멀리 태양이 오렌지 빛에서 붉고 탐스러운 감빛으로 산등성이에 걸친다. 바람이 심하다. 추워 바람막이 점퍼 아래 몇 겹의 옷까지 껴입고 능선에 서 있는 데도 견딜 수 없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몇 번이나 볼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버틴다. 해가 완전히 넘어갈 때까지 노을을 본다. 파랗던 하늘이 점차 붉어지다가 나중엔 어둠에 지워진다. 먼 산부터 먹물 번지듯 시야에서 검은색으로 흡수된다. 별이 하나 둘 얼굴을 내민다. 등 뒤에선 이미 초승달이 떠 있다.

텐트로 들어가 밥을 먹는다. 산에서 제일 맛있는 것을 추천하라면, 나는 서슴지 않고 세 가지를 추천한다.

첫째는 물이다. 물이 산에서는 제일 맛있다. 둘째는 막 해놓은 밥이다. 이른바 산 밥 즉 산에서 먹는 밥은 그 맛이 다르다. 게다가 막 해 논, 김이 하얗게 올라가는, 그 밥은 먹지 않아도 그 냄새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 산 밥은 반찬이 없어도, 오직 간장에다만 비벼먹어도 행복하다. 셋째는 과일이다. 하지만 과일은 무거운 것이어서 가지고 다닐 수 없어 거의 먹어 보질 못했다. 다행히 당일 산행하는 분들이 가지고 온 과일을 좀 얻어먹게 되면 종일 그 과일 향이 내 몸에서 나에게 속삭인다. 정말 맛있지? 라며 말이다.

며칠 만에 느끼는 여유다. 무거운 어둠이 멀리 있는 능선부터 짓누를 때 쯤 나는 오랜만에 촛불 아래서 그동안 밀렸던 일기와 그동안 찍었던 사진을 보며 내가 걸어왔던 길을 생각한다. 뒤돌아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진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처음 출발 할 때의 불안함은 산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행복함으로 바뀌었다.

주사도 맞고 나면 별거 아니지만 맞기 전이 가장 불안하다. 백두대간도 시작하기 전이 불안한 거지 부닥치고 나면 불안과는 다른 감정이 생긴다. 시작이 중요하다. 시작이 절반이다.

덧붙이는 글 | 2004년 5월 16일 부터 7월 4일까지의 백두대간 무지원 단독 연속 종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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