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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고 최용선옹의 영정사진
애국지사 고 최용선옹의 영정사진 ⓒ 정종인
일촉즉발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큰별'이 아쉬움을 뒤로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되찾은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제헌헌법이 만들어진 제헌절이자, 일요일인 17일 밤 8시 10분경 광복군 출신의 애국지사 최용선 선생이 자택에서 숙환으로 82년 동안의 생을 마감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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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 출신 애국지사 최용선 선생 별세

장례식이 거행된 정읍장례식장에는 지난 17일부터 전국에서 몰려든 조문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전남 영광 출신인 애국지사 고 최용선옹은 일제로부터 나라를 되찾은 후 민족의 최대염원인 '통일'의 순간을 지켜보지 못하고 운명을 달리했으나, 광복 회원을 비롯 많은 시민들의 애도 속에 생을 마감했다.

미망인인 김명신여사는 전북도지정무형문화재로 활약하며 제자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국악인이다
미망인인 김명신여사는 전북도지정무형문화재로 활약하며 제자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국악인이다 ⓒ 정종인
유족으로는 부인 김연임씨와 운성, 봉준 2남이 있다. 김명신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하고 있는 부인 김연임 여사는 지난 4월 판소리 동초제로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지정을 받은 바 있다. 생전에 최옹은 부인의 판소리 공연이 열린 정읍사예술회관을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자주 찾아 격려하는 '자상한 남편'이기도 했다.

미망인 김명신명창이 최옹의 지인들에게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미망인 김명신명창이 최옹의 지인들에게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 정종인

[취재후기]최용선옹이 남기고 간 발자취

기자가 전라일보 사회부 차장으로 일하고 있던 지난 94년, 최최용선옹을 인터뷰 한 내용이 적힌 빛바랜 취재수첩을 어렵게 찾아 다음과 같이 내용을 재구성했다. 인자했던 모습으로 광복군 시절 간직했던 통행증과 건국훈장 애족장을 보여주던 기억이 편린으로 가슴을 파고 든다. 조국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사선(死線)을 넘었던 고 최옹의 애국정신이 후손들에게 교훈으로 자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라의 큰별'이었던 고(故) 최용선 옹의 명복을 빈다.

전남 영광 출신인 고인은 1943년 10월 강제징집돼 중국 산시(山西)성 주둔 일본군 3541부대에 배속됐다가 탈출해 다음해 중국 충칭(重慶)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소속 광복군에 입대했다. 최옹은 45년 8월까지 광복군총사령부 경위대에 배속돼 특수임무를 맡는 등 빼앗긴 조국을 찾기 위한 치열한 전투를 소화해낸 '백전노장'이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수여받아

최옹은 지난 1924년 1월 16일 '영광굴비'로 유명한 전남영광군 법성면 천연동에서 태어났다. 정읍과의 인연은 7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남영광과 광주광역시 인근에 살다 선조들의 고향인 정읍에 이주해 온 것으로 전해진다. 40대 중반의 혈기왕성한 시기였다.

험란한 독립투사의 길

독립운동가로서 최옹의 일대기는 만 20세가 되던 지난 1944년 9월 일제에 강제 징집 당하면서 시작된다(1943년 입대설도 있으나 지난 94년 인터뷰시 최옹은 정확히 44년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강제징집된 최옹은 중국 산서성(山西省) 안읍지구(安邑地區)에서 훈련을 받고 일본군 3541부대에 배속되어 독립군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눠야 하는 번민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호시탐탐 탈출 기회를 엿보던 최옹은 동료로부터 자신이 소속된 부대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인 중국 중경(重慶)에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와 광복군(光復軍)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해 성공한다.

중국 작석지구에서 탈출성공

조국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동지들과 함께 탈출을 모의하던 최옹은 자신의 소속부대였던 경부대대의 지휘본부가 광동으로 진군한다는 소식을 듣고 주도면밀한 탈출계획을 수립했다.

그 해 12월 20일 호남성 작석지구에서 수명의 동지들을 규합해 소총 15정과 장교용 권총 1정, 수류탄 8발, 실탄 7백여발, 군 작전지도 등을 갖춘 완전무장 상태로 빠져나왔다. 그러나 최옹일행은 탈출과정에서 일본군에 발각되어 생사를 건 전투를 벌였다.

몇 시간 계속된 전투에서 최옹 일행은 일본군 10여명을 사살하는 최초의 전과를 올리며 탈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교전 과정에서 최옹과 가장 가까웠던 동료가 일본군의 총탄에 쓰러지는 아픔을 겪었다.

최옹은 며칠 후 중화민국 제74 야전사령부 소속인 채운사 부대와 함께 여러 차례 전투에 참가해 일본군을 격파했다. 이런 이유로 최옹은 채운사 부대장으로부터 항일투사임을 인정받고 부대에 정식으로 배속돼 '낭인' 신분을 벗어날 수 있었다.

광복군 배속후 특수임무

1945년 4월 중국 중경에 위치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도착한 최옹은 토교대(土橋隊)에 입대하고 광복군총사령부 경위대(光復軍總司令部 警衛隊)에 배속되어 특수임무를 수행했다.

당시 이 부대에서는 초대 대장인 이영기를 비롯 한성도·김동수 장군의 지휘 아래 정치·경제·군사 분야의 교육을 받았다. 이후 최옹은 이국땅에서 광복을 맞이하고 다음해인 1046년 6월8일 이범석 장군 인솔하에 토교(신한촌)에서 귀국했다. 독립유공자로서의 행적을 인정받은 최옹은 1990년에서야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 정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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