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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강임
길을 잃고 헤매다

잿빛 하늘에 파란 하늘이 보이기 시작하니 장마가 끝인가 보다. 주 5일제 근무로 조금은 느슨해진 주말, 느슨해진 마음이 길 떠남을 재촉한다. 오늘은 어느 곳을 떠나 볼까? 서귀포 70경을 취재한 지 벌써 2년째 접어드는데도 70리는 절반도 걷지 못했다. 잘 알려진 관광지라면 혼자서 휘리릭-다녀올 수도 있는 곳이지만, 위치를 모를 땐 길 떠남이 고통이다.

서귀포시 상효동 산 85번지 일대, 이곳은 서귀포시가 지정한 서귀포 70경 선돌이 있는 지점이다. 그러나 손바닥 지도에는 한라산 자락에 점 하나만 찍어 놓았으니 갈 길이 막연하다. 그리고 울창한 수목림으로 에워싼 이곳을 표현하자면 우선 말이 막힌다. 온라인에서 선돌 가는 길을 찾아봤지만 정확한 안내가 없다.

막연한 생각으로 "출발하며 어디든 찾아갈 수 있겠지"하며 차를 돌린 곳이 지도 속 돈내코 지점. 지도에 그려진 선돌의 위치를 따라 가다보니 서귀포시 충혼묘지의 공동묘지 앞에 이르렀다. 바싹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산 끝자락에 있는 절 집의 앞마당에 도착한 자동차를 보고 스님이 놀라신다.

"이곳은 자동차가 들어 올 수 없는 공간입니다,"

길 끝 그리고 산 길 끝에 자리 잡은 남국선원에 계신 스님의 말씀에 무례한 행자는 가슴이 쿵쿵 뛴다. 그곳에 계신 보살님께 선돌 가는 길을 물어봤다. 오던 길을 다시 돌아서 가란다.

ⓒ 김강임
선돌 가는 길

한라산 제 1횡단도로의 선돌선원의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차를 돌이니 길 옆에는 감귤원이 펼쳐졌다, 그러나 안내판이 없으니 이 답답함을 어디에 호소해야 할까? 자동차는 산 속으로 산 속으로 달려가는데 선돌 가는 길이 맞는지 모르겠다. 마침 감귤원을 손질하던 아저씨께 선돌 가는 길을 물었다.

"선돌요? 자동차가 들엉 가긴 힘든 곳인데 마심! 1km는 더 걸엉 가야 될 거우다!"
"예? 1km요 ? 그것도 걸어서?"

선돌선원에 자동차를 주차시킨 우리는 산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제주시에서는 햇빛이 쨍쨍 했는데 산길로 접어드니 천둥과 함께 굵은 빗방울이 내린다. 후드득-후드득-.

선돌로 가는 산길은 겨우 자동차가 한 대 정도 다닐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울퉁불퉁한 돌길 사이에 자동차 바퀴를 겨우 굴릴 수 있는 산길. 그 사이에는 장맛비에 씻긴 돌이 깊은 웅덩이를 파헤쳐 움푹 패어 있었다. 그러니 자동차 길로는 참으로 위험하다.

ⓒ 김강임
빗속을 걸어가는 산 속 숲길

빗속을 이렇게 둘이서 걷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그것도 아무도 살지 않은 깊은 산 속. 산길 옆에서는 산새소리가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더욱 구슬프다. 그리고 콩란과 산나리, 그리고 생태자원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다.

얼마나 걸었을까? 한라산에 자생하는 노송의 모습이 곧게 뻗은 곳에 이르자, 날쌘 새 한 마리가 우리의 발길을 인도하듯 앞지르기를 한다. "아직 멀었어요?" 목적지를 같이 걸으면서도 늘 목적지를 묻는 나에게 남편은 "난들 알아요? 나도 초행길인데."

그러나 사람 마음은 참 이상하다. 내가 모르고 있는 곳은 상대방은 잘 알고 있으리라는 착각. 그래서 신은 아담에게 이브라는 친구를 주셨나 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는 산길은 지루하거나 험난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구름 사이 나타난 노송 앞에 서 있었다.

ⓒ 김강임
초가의 절집 천진원

오르막길에는 두 갈래 길이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도 이정표는 없었다. 어느 곳으로 가야 할까? 남편과 나는 둘이서 흥정을 하다가 오른쪽 길을 택했다. 노송 뒤로 숨에 있는 구름 사이에 속살이 보이는 바위가 나타났다.

"선돌이다! 선돌!"

마치 산삼을 캐러 온 사람이 '심봤다!'를 외치듯 우리는 선돌을 외쳐댔다. 그리고 놀라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 김강임
사람냄새가 나는 산골 속 천진원. 수풀 우거진 길을 따라 구름을 앞지르고 다다른 산 속에는 절 집이 하나 있다. 이곳은 초가 절 집으로 천지원이라 한다. 절 집 앞에는 동그랗게 무리를 이루고 하늘높이 자란 대나무가 이색적이다. 그 뒤로 노송이 자리잡고 있다. 이 절 집에서 제일 먼저 행자를 반기는 것은 꼬리를 흔들며 다가온 개 3마리. 평소 개를 무서워하는데 이날만큼은 개가 참으로 반가웠다.

초가 앞에 서 있으니 향냄새가 난다. 그리고 천진원 앞에는 호수가 그림처럼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연자방아와 무언의 형상을 하고 있는 돌 2개는 천진원의 문지기이다. 참 고즈넉하다. 이제야 비에 젖은 머리를 만지며 안도의 숨을 내쉰다. 그리고 깊은 산 속 암좌에 내 마음을 내려놓는다.

ⓒ 김강임
내 마음 돌탑을 쌓고

초가 뒤에는 쌓아 놀은 돌무덤이 참으로 인상 깊다. 그리고 처마 끝과 마주하여 하늘을 찌르는 노송에는 온갖 한라산에서 자생하는 생태계가 살아 숨쉰다.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뿌리를 내리고 하늘로 올라가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생태계가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 말없음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감탄사만 연발한다. 이런 곳을 선경이라 부를까? 우리는 산길을 걸어오면서 힘들고 피곤했던 심신을 잊고 그만 넋을 잃고 있었다.

초가 뒤로 등산로는 아니지만 선돌 가는 길이 있다. 우리는 그 길을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직감으로 걸어봤다. 여름인데도 이곳은 낙엽이 지고 있었다. 그리고 숲은 얼마나 울창한지 오후 3시인데도 캄캄하다. 앞서 가는 남편이 길을 만든다. 그리고 남편은 가던 길을 멈추고 돌탑을 쌓는다. 아마 남편은 누군가가 쌓아 놓은 돌탑의 가운데에 자신의 돌을 얹어 놓았으리라. 앞서지도 않고 뒤서지도 않고 정도를 걷는 그의 마음처럼.

ⓒ 김강임
산에서 흐르는 물을 이용해서 수도를 연결해 놓은 약수터에서 물 한 모금을 마셨다, 천진원에서 10분 정도를 걸어 올라가면 또 한 채의 초가가 나온다. 파란 잔디 위에 외롭게 서 있는 초가도 내 마음의 절집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살고 있는 것 같은데도 인기척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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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경 같은 신선바위 그곳에 있었네

어디가 끝인지도 모르고 올라온 발걸음. 먼저 신선바위를 본 남편의 목소리가 산울림처럼 울려 퍼진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서 있는 벌거숭이 바위. 그리고 그 바위에 노송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신비로움. 온갖 수풀은 요술을 부르듯 옷을 입힌다.

ⓒ 김강임
선돌 아래에는 평상이 깔려져 있었다. 신선들이 놀다 간 자리일까 아니면 온갖 오욕의 때가 묻어 있는 인간의 안식처일까? 고개를 세우고 노송을 안고 있는 선돌을 바라보니 감개가 무량하다. 소원성취! 촛불을 사이에 두고 누군가가 다기에 떠놓은 정화수가 정갈스럽다. 내 마음도 노송과 선돌에 묶어 놓는 정한수처럼 정갈할 수 있다면.

ⓒ 김강임
산 속에서 정화수를 떠놓고 선돌 앞에 서니 인간의 나약함이 이런 것인가? 나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소원을 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무아미타불도 아니고 관세음보살도 아니고 석가모니불도 아닌 내 마음의 선경. 선돌에 마음을 묶어 놓고 노송에 발을 묶여 무아지경에 빠진 무심일 뿐.

꼼짝도 하지 않은 나를 보고 하산을 재촉하는 남편은 "언제 다시 한번 올라옵시다!"였다. 그러나 그 화두에 던진 내 응답은 참 미묘했다. "그래요! 언제 다시 한 번 올라옵시다!"

덧붙이는 글 | 선돌은 서귀포시가 지정한 서귀포 70경 중의 한곳이다.
 찾아가는길은 제주시- 한라산 제 1횡단도로( 5.16도로)- 숲 터널- 산돌선원-선돌로, 가는 길은 숲길이며 승용차가 들어가기에는 위험하다. 선돌선원에서 자동차를 세우면 1시간 정도 걸어가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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