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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당신이 존경하는 우리 나라 역사 속 인물은 누구인가?'라고 묻는다면 누구라 대답하겠는가? 이순신? 세종대왕? 아니면 백범 김구? 당장 떠오르는 인물만도 수 명에 달할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 이렇게 묻는다면 어떨까? '당신이 존경하는 우리 나라 역사 속 여성 인물은 누구인가?'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사임당, 유관순 정도를 나열하곤 입을 다물 것이다. 여기, 감춰졌던 우리 역사 속 여성인물들을 기행을 통해 되돌아 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있다. 전국여대생대표자협의회(이하 전여대협) 주최로 지난 10일부터 13일까지 열린 '제2회 여성역사기행'에 참가한 단원들의 3박4일 여정을 담아보았다.... 기자주

첫째날 - 마음트고 마주보기

지난 7월 10일(일) 낮 12시. 경희대학교 여학생휴게실 '미랑'에 여행 가방을 짊어진 50여명의 대학생들이 모였다. '금남의 공간' 여학생 휴게실로 모인 이들 가운데 간간히 남학우들도 끼어 있는 것으로 보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이들은 바로 전여대협에서 주최하고 한국여성재단에서 후원하는 '제2회 여성역사기행' 단원들.

김하얀(홍익대 총여학생회장) 단장은 "기행을 통해 그 동안 역사 속에서 살다 간 여성 인물의 삶을 재발견하고 아울러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당당한 운명의 주인이 되자는 것"이라며 이번 행사의 취지와 의의를 밝혔다.

▲ 본격적인 기행을 앞두고 경희대에 모여 다함께 '김치~'
ⓒ 전여대협
첫 날 일정은 서울 대방동에 위치한 '여성사전시관'을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여성의 시각에서 바라본 선사시대 이후 근대 이전까지의 역사가 '여성, 깨어나다' '여성, 일어서다' '여성, 일하다' '여성, 달라지다' '여성, 표현하다'라는 다섯가지 주제로 나뉘어 전시되고 있는 이곳에서 단원들은 한국의 여성역사를 찬찬히 되돌아봤다.

▲ 여성사 전시관을 둘러보고 있는 단원들.
ⓒ 전여대협
'여성, 깨어나다'는 이름으로 전시된 여성교육사 자료 가운데 눈에 띈 것은 '용서할 수 있다, 참을 수 있다, 도울 수 있다, 희생할 수 있다'라고 적혀 있는 60년대 한 여학교의 교훈이었다. 그간 이루어져 온 여성 교육이 '여성의 자아실현'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보다는 '현모양처 양성'을 목표로 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자료였다.

이 밖에도 여성 선구자라 불리는 예술가 나혜석의 삶과 예술 세계가 다큐멘터리를 통해 상영되기도 했다. 여자도 사람이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온몸으로 살아간 화가이며 민족주의자고 여성해방론자였던 나혜석. 하지만 그녀는 시대를 앞섰기에 기대로부터 버림 받을 수밖에 없었던 선구자요, 선각자였다. 파멸했을지언정 패배하지 않은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며 단원들은 연신 눈물을 훔쳤다.

여성사전시관을 다녀온 단원들은 경희대로 돌아와 '여성의 눈으로 한국사 읽기'라는 제목의 강연을 들었다. 강의를 맡은 소현숙(경희대 강사)씨는 '여성사란 무엇인가'와 '일본군 성노예제'라는 두 가지 주제를 통해 역사 속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소외당했으며 어떤 방식을 통해 등장하게 되었는지 설명했다. 특히 일본군 '위안부'와 관련한 부분은 단원들이 다음 날 '나눔의 집'을 방문해 직접 뵙게 될 할머니들의 얘기와 맞닿아 있어 큰 관심을 끌었다.

본격적인 기행에 나서기 앞서 과거 여성의 역사를 살펴본 이 날은 간단한 축하주 한잔과 함께 진행된 발대식으로 마무리되었다.

둘째날 - 상처, 껴안음, 희망

미랑에서 맞는 둘쨋날 아침, 단원들의 일정은 심신의 안정을 도와주는 요가로 가볍게 시작됐다. 하지만 요즘 웰빙 열풍과 함께 불어 닥친 '요가 열풍'이 무색하리만치 난생 처음 요가를 접해 보는 단원들이 대부분이라 요가 수업은 결코 '가볍게' 진행되지 않았다(?). 뻣뻣하기만 한 허리와 다리를 억지로 구부렸다 펴기를 반복하던 단원들의 입에서 "악" 소리가 쉴 새 없이 터져 나온 것이다. 덕분에 앞에서 능숙하게 어려운 동작들을 척척해 내는 '숙련된 조교'는 단원들의 '애교 어린 볼멘소리'를 받아줘야 했다.

바로 어제 강연에서 들었던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직접 만나기 위해 단원들은 오전 10시 30분경, 경기도 광주시에 위치한 '나눔의 집'을 찾았다. 나눔의 집 사무국장 안신권씨는 "태평양 전쟁 말기, 일제에 의해 성적 희생을 강요 당했던 생존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곳"이라며 나눔의 집을 소개했다.

나눔의 집 내부에는 '위안부'들이 생활하던 위안소 내부를 실물 복원하고 각종 유물들을 전시해 당시의 상황을 관람객들이 몸소 체험할 수 있도록 한 '일본군 '위안부' 전시관'이 있었다. 현재 이북에 생존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얼마 전 "일본군이 '위안부'로 끌려간 조선 처녀를 죽여 국으로 끓여 먹었다"고 증언해 온 국민을 분노로 휩싸이게 했던 박영심 할머니의 '위안부' 시절 배불러있는 사진을 본 이동수(조선대1) 단원은 "충격적이다"는 말만 연신 되풀이하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 '나눔의 집'에서 박옥순 할머니의 증언을 듣는 중.
ⓒ 전여대협
이어 단원들은 나눔의 집에 기거하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 박옥순 할머니를 만나 당시 상황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18세 어린 나이에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4년간 반항 한번 제대로 못 해보고 겪어야 했던 수난에 대해 설명해 주던 할머니는 막바지에 이르자 끝내 한 맺힌 눈물을 지어 보여 주위를 숙연케 했다.

먹먹해진 가슴을 어루만지며 버스에 오른 이들은 다음 일정인 토지문학공원 관람을 위해 강원도 원주로 이동했다. 현존하는 문인의 최초의 기념, 테마형 문학공원인 토지문학공원은 박경리씨가 기거하며 대하소설 <토지>의 4, 5부를 완결한 옛집이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한 곳이다.

▲ '토지문학공원' 입구.
ⓒ 전여대협
이 곳에서 '소설에서 보여지는 성과 결혼' '여성, 남성의 시각으로 보고 쓰여지는 소설'에 대해 짧은 토론이 진행되기도 했다. 일찍이 문학작품을 통해 나타난 여성의 이미지는 남성 중심의 문학 안에서 감춰지거나 왜곡되어 온 바 있는데, 그런 점에 있어서 박경리씨는 한국 근대사를 여성의 시각을 통해 조망하는 등 '여성주의적 글쓰기'에 접근해 있다는 것을 눈여겨 봐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단원들은 열띤 토론을 벌였다.

이날의 마지막 일정은 관동대에서 진행된 '자아성장 미술치료'였다. '본인이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과 남들이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가운데 진정한 자신을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 진행된 이 프로그램은 최금란(한국미술치료학회 공인 미술치료사)씨의 도움으로 진행됐다.

셋째날 - 흩어진 기억, 여기 다시 모이다

이제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여기저기서 "악" 소리가 터져나오는 풍경에 다들 익숙해진 모양이다. 전날에 비해 소란한 감이 많이 줄어든 요가교실을 뒤로한 채 단원들은 허난설헌의 생가인 초당으로 향했다.

흔한 조선시대 기와집 정도로 보이는 초당이었지만 경난수(강릉 여성의 전화)씨의 설명을 따라 대문 앞 기와부터 시작, 행랑채, 사랑채, 안채 등등으로 나눠 구석구석 들여다보니 사소한 집안 구조 하나하나에도 나름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허난설헌 생가에 대한 설명을 듣고있는 단원들.
ⓒ 전여대협
"안채의 경우 여성들의 공간이라 할 수 있는데, 대문으로 가장 안 쪽에 위치해 있어 여성들의 사회 생활을 제한하던 당시의 사회상이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라는 그의 설명에선 당시를 살았던 여성들, 특히 이 집에 살았던 허난설헌 같은 선구자적 여성의 고초가 그대로 드러났다.

여성에게는 이름이 없던 시절에 이름이 있었고 한문을 익힐 수 없던 시절에 시를 지어 그 천재성을 인정 받았던 여인이건만, 주어진 시대의 모순에 순종치 않고 시대를 앞서나갔기에 비난의 감수해야 했던 그녀의 삶은 그로부터 3백여 년이 지난 시대를 산 나혜석의 삶과 꼭 닮아 있다. 이렇게나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여성 선구자들이 희생된 후에야 비로소 오늘날 여성들이 여성으로서의 목소리를 당당하게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 '허난설헌 백일장'을 마치고 자신의 작품을 들어보이고 있는 단원들.
ⓒ 전여대협
단원들이 느낀 허난설헌의 아픔은 이어 진행된 '허난설헌 백일장' 시간을 통해 시로, 수필로 다시 태어났다.

백일장 후 초당두부로 점심 식사를 마친 단원들은 3박4일 기행 일정 중 가장 손꼽아 기다려온 일정을 위해 들뜬 마음으로 경포대 해수욕장을 향했다. 버스를 타고 십여분 남짓 달려갔을까. 저 멀리에 어렴풋하게 보이는 동해바다를 본 일행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소리를 질렀다.

이윽고 이어진 물놀이 시간. 해수욕에, 서로 번갈아가며 빠뜨리기에, 조별로 팀을 짜 경합을 벌인 공동체 놀이에, 모래에 파묻기까지... 그간의 빡빡하고 다소 무겁기까지 했던 일정에서 벗어나 이 시간만큼은 모두가 파란 동해 바다의 시원함을 만끽하며 동심의 세계(?)로 젖어들어 갔다. 신나게 공동체놀이를 즐기던 양수아(조선대1) 단원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놀이를 통해 다 함께 어울릴 수 있어서 참 좋다"며 연신 싱글벙글 웃어보였다.

▲ 경포대 해수욕장에서 신나는 '꼬리잡기'한 판!
ⓒ 전여대협
뉘엿뉘엿 해가 기울어 갈 때쯤에야 물놀이를 마친 후 관동대로 향한 이들은 자신의 성적 경험들을 시간 순서에 맞춰 그래프를 통해 나타내보는 '나의 성애사 그리기' 프로그램 진행까지 끝내고 서둘러 서울 홍익대로 이동했다.

넷째날 - 미래를 향해 쏘다

마지막 일정을 위해 단원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이것저것 준비하며 부산을 떨었다. 노래 개사해 부르기, 문예공연 준비하기 등등. 단원들의 몸과 맘을 분주하게 만든 이번 기행의 마지막 일정은 바로 '제665차 수요시위 주최 및 참가'였다. 지난 2박3일간 이곳저곳을 다니며 몸소 체험하고 또 고민하게 된 여성문제를 '수요시위 주최 및 참가'라는 마지막 일정을 통해 실천적으로 풀어내고 한 것이다. 아침부터 부슬부슬 내리던 비에도 아랑곳 않고 단원들은 준비해 온 우비를 착용한 채 버스를 타고 서울 일본대사관 앞 수요시위 현장으로 향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지난 1991년 1월부터 현재까지 매주 수요일 낮 12시 서울 일본대사관에서 열리고 있는 정기 수요시위에는 나눔의 집 할머니들을 비롯, 각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들이 직접 참가한다. 이 날 시위 역시 10여명에 달하는 많은 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 '제 665회 수요집회'자리에 참가해서.
ⓒ 전여대협
할머니들이 좋아한다는 민중가요 '바위처럼'의 몸짓으로 시작된 제665회 수요시위는 우경진(창원대 총여학생회장) 단원의 사회로 진행됐다. 시위 자리에서 단원들은 민중가요 <처음의 마음>을 개사한 곡을 불러 여성 역사왜곡의 현실과 이를 바로세우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어 장박정임(순천향대 총여학생회장) 단원은 정치 발언을 통해 "저 악명 높은 독일의 히틀러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민중들을 향해 공식으로 사과했거늘, 일본은 사과는커녕 역사교사서 왜곡을 일삼고 한술 더 떠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진출하려는 등 만행을 서슴치 않고 있다"며 일본의 사과와 보상을 촉구했다.

김은정(목포대 총여학생회 부회장) 단원은 "후대에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 학생들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설 것"이라는 말로 용기 있는 할머니들의 행보에 청년학생들도 동참할 것임을 밝혔다.

잇따른 정치 발언으로 고조된 분위기를 한층 부드럽게 하기 위한 손뼉놀이 시간도 진행됐다. 할머니들의 귀에도 익숙한 동요 <반달>이 불려지는 가운데 학생들은 할머니의 손을 잡고 함께 손뼉을 치며 재미난 시간을 가졌다. 김하얀 단장의 성명서 낭독을 끝으로 시위는 마무리됐으나, 학우들과 할머니들 간에 맞잡은 손은 오래오래 떨어질 줄 몰랐다.

▲ 일본군'위안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손뼉놀이시간.
ⓒ 전여대협
윤선영(조선대1) 단원은 "오늘 나와 함께 손뼉놀이를 한 할머니가 팔을 걷어 보이며 '일본군의 군화발에 짓밟혀 팔 골격이 변형됐다'고 말해 마음이 아팠다"며 "나 자신이 스스로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그간 여성의 역사와 여성인물 등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는데, 이번 기행은 나로 하여금 이를 되돌아보고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는 말로 소감을 밝혔다.

3박 4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지도 모를 이들의 기행은 이로서 모두 끝났지만 이는 단원 모두의 가슴 속에 '끝'이 아닌 주체적인 여성으로서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해단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던 "힘모아~ 힘을줘~ 새 세상이 태어난다~"라는 한 여성 노래 가사처럼, 역사 속 그녀들과 마주한 그들로부터 발산될 힘이 양성 모두 함께 웃는 새 세상을 탄생 시키는 원동력이 되길 기대해본다.

덧붙이는 글 |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가리키는 표현은 정신대, 종군위안부 등등 참으로 다양하다. 하지만 정신대나 종군위안부 모두 올바른 표현이 아니며, 최근 국제 활동을 통해 붙여진 '일본군에 의한 성노예'라는 표기가 가장 정확한 의미다. 하지만 스스로를 '노예'라고 명명하는 것에 대한 할머니들의 고통과 반발을 고려해 완전한 의미는 아니지만 따옴표를 붙여 일본군 '위안부'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기사는 전국대학신문기자연합(www.unip.or.kr) 공동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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