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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던 샌드라 오코너 미 대법원 판사의 갑작스런 은퇴로 보수화의 위기를 맞고 있는 미국. 사진은 '미국 방식을 지지하는 사람들(People for the American Way)'의 사이트.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던 샌드라 오코너 미 대법원 판사의 갑작스런 은퇴로 보수화의 위기를 맞고 있는 미국. 사진은 '미국 방식을 지지하는 사람들(People for the American Way)'의 사이트.
7월1일, 한 여성의 갑작스런 은퇴선언으로 미국이 발칵 뒤집혔다.

샌드라 데이 오코너. 미국 역사상 첫 여성대법원 판사이자 보수-진보로 대비되는 미 대법원에서 유일하게 사안에 따라 유연성 있는 소신을 고집했던 오코너의 은퇴는 미국 정치판을 급격히 뒤흔들고 있다.

오코너의 은퇴 발표가 나온 후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한편으로는 그녀의 역사적 중요성과 업적을 기림과 동시에 그녀의 후임으로 들어설 판사 선정을 놓고 진보 세력과 보수 세력 간의 총성 없는 전쟁이 시작된 것.

미국 첫 여성 대법원 판사, 캐스팅 보트를 쥐다

1930년, 텍사스 엘파소에서 태어난 오코너는 전기도 안 들어오고 수도시설도 없는 애리조나의 목장에서 자랐다. 스탠포드 대학 학부를 거쳐 스탠포드 법대를 3등으로 졸업했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비서직밖에 없었다.

차선책으로 공직에 투신한 오코너는 애리조나 주정부에서 경력을 쌓다가 1981년, 여성 대법원 판사를 임명하려는 레이건 대통령에 의해 전격 발탁됐다. 인사청문회를 만장일치로 통과한 후 오코너는 24년간 대법원 판사직을 수행하며 미국에서 가장 큰 권력을 행사하는 여성의 한명으로 자리매김했다.

낙태, 교육, 인권, 경제, 사형 문제 등 미국인들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문제를 놓고 진보와 보수로 대변되는 세력이 미국 문화를 주도하려 다툴 때 그 종착지는 거의 예외 없이 대법원이다. 주와 연방정부가 현안을 놓고 대립할 때 헌법을 바탕으로 둘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는 곳이 바로 대법원.

흥미로운 점은 아홉 명의 판사로 구성된 미 대법원이 대부분의 사안에서 오코너를 제외하고 보수(4) : 진보(4)로 대립된다는 것. 아홉명으로 구성된 대법원 구조상 이기는 쪽은 적어도 5-4의 판결을 받아야 하는데 오코너가 어느 쪽에 표를 던지느냐에 따라 정책이 결정된 경우가 자주 있어왔다.

그녀가 캐스팅 보트를 던져 판결을 결정지은 굵직한 사안은 낙태 문제(여성의 낙태 권리 지지), 사형 문제, 대학 입학 시 소수인종 우대 문제(2003년, 이 법안의 중요성을 재확인하는 쪽), 가장 최근에는 공공장소에 모세의 십계명을 전시하는 사안을 놓고 내린 판결에서 정부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5-4로 관철되는 데 한 표를 행사했다.

국제 사회까지 들썩거리게 한 판결로는 '부시vs고어'를 들 수 있겠다.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플로리다 주의 재검표를 중단시켜서 사법부가 인위적으로 부시 정권을 창출한 판결에서 오코너는 강경 보수주의자들 편에 붙어 5-4의 판결을 내렸다. 당시 오코너는 연방정부보다 주 정부를 옹호하는 그녀의 지론에 위배되는 정치적 선택을 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오코너를 제외한 나머지 여덟명이 대체로 진보나 보수라는 이념 구도에 따라 딱 쪼개지고 오코너만이 사안 별로 양 쪽을 오가다 보니 그녀의 몸값이 치솟는 것은 당연한 결과. 그래서 대법원에 사안을 논하러 가는 법조인들은 모두 온건 보수인 오코너를 염두에 두고 변론을 작성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때문에 오코너를 비판하는 이들은 미국인들이 '오코너의 미국', '오코너가 결정하는 미국'에서 살고 있다고 불평하기도 했으나 이념보다는 합리적인 면을 중시하는 판사로 유연하고 융통성 있는 사고를 한다는 지지도 많았다.

오코너는 왜 사임했나

샌드라 오코너 은퇴 소식을 전하고 있는 웹사이트.
샌드라 오코너 은퇴 소식을 전하고 있는 웹사이트.
오코너는 미국의 첫 여성 대법원 판사로 많은 여성 법조인들에게 희망을 주었지만 페미니스트는 아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대법원의 첫 여성이었기 때문에 철저한 직업정신으로 일했다는 평도 들었다. 오코너는 1980년대에 유방암에 걸려 치료를 받을 때도 단 하루도 업무를 거르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 그녀가 은퇴를 결심한 이유는 무엇일까.

오코너는 단 세 문장으로 사임서를 작성했다. 부시 대통령에게 쓴 편지 어디에도 왜 은퇴하는지가 나와 있지 않다. 오코너의 측근들은 75세인 그녀의 나이도 나이려니와 치매로 점차 건강이 나빠진 그녀의 남편 때문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또 한 편으로 무시할 수 없는 숨은 이유는 정치적 이유다. 대법원 판사의 공석을 현직 대통령이 추천하는 미국 절차상 공화당인 부시 대통령 재임시 그녀가 사퇴해야 보수주의자가 그녀의 자리를 계승할 수 있다는 계산 때문이다. 그러나 오코너의 은퇴에 대한 압력설은 거의 나오고 있지 않은 상태다.

오코너의 은퇴 발표는 독립 기념일을 낀 연휴를 앞둔 미국을 강타했다. 80세의 고령에 갑상선 암을 앓고 있는 대법원 주심 판사 랭퀴스트의 사임설이 작년부터 끊임없이 나돌긴 했지만 건강이 양호한 오코너가 은퇴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것. 심지어 그녀의 아들까지도 놀라움을 표시했을 정도다.

이제 미국 정계는 오코너의 빈 자리를 누가 메울 것인지를 놓고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몰려드는 먹구름...부시의 선택은?

미국 언론들은 강경 보수주의자인 랭퀴스트가 사임한다고 했다면 부시대통령이 그 자리를 보수주의자로 대체해도 미국민들의 저항이 크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렇게 된다고 해도 대법원의 진보 대 보수의 숫적 구도가 바뀌지 않기 때문.

그러나 오코너 은퇴의 경우는 다르다. 이제껏 그녀가 해온 '스윙 보트(swing vote)' 역할로 볼 때 그녀를 대신해 더 오른쪽으로 치우친 인사가 들어간다면 대법원이 앞으로 내릴 판결들이 모두 보수로 쏠릴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정권은 4년에 한 번씩 심판을 받지만 한 번 임명된 대법원 판사는 본인이 사임을 결심하기 전까지는 자리보전이 가능한 종신직임을 고려할 때 대법원의 보수화가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기 때문.

이렇게 될 경우, 미국인들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슈들, 낙태, 동성애, 사형, 소수 인종 등 제반의 인권 문제가 모두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특히 최근 국제적으로 조명 받는 관타나모 수용소 같은 외국인 관련 법적 문제, 테러리즘 및 종교와 연계한 미국의 우경화 등도 대법원의 몫이다.

미 보수단체 '미국을 위한 진보 (Progress for Ameica)' 사이트. 이들은 부시 대통령이 추천하는 후보를 지원하기 위해 광고 등으로 1800만불을 쓰겠다고 밝혔다.
미 보수단체 '미국을 위한 진보 (Progress for Ameica)' 사이트. 이들은 부시 대통령이 추천하는 후보를 지원하기 위해 광고 등으로 1800만불을 쓰겠다고 밝혔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진보와 보수 단체 모두 즉시 사활을 걸고 후보 물색에 뛰어 들었다. <미국을 위한 진보 (Progress for Ameica)>라는 보수 단체는 오코너 은퇴 소식이 나온 7월 1일, 곧바로 회원들에게 이메일을 돌렸다. 부시가 추천하는 후보를 지원하기 위해 광고비 등으로 1800만 불을 쓰겠다는 것.

같은 시각, 진보 성향의 단체 <미국 방식을 지지하는 사람들(People for the American Way)>도 전체 이메일을 보내 "보수 인사가 자리를 채우면 미국이 70년은 후퇴하게 된다"는 우려를 나타냈다.

민주당 역시 극 보수 인사가 대법원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하겠다고 공언했다. 상원에서는 이미 후보 추천 절차를 놓고 민주당과 공화당이 힘겨루기에 들어간 상태다.

처음으로 대법원 인사를 하게 된 부시 대통령은 여섯 명 이상의 후보군을 적어도 일주일 정도 시간을 두고 고려한 후 지명 하겠다는 계획이다. 인사 청문회는 9월 정기 의회 때나 8월에 임시 의회를 소집해 열 예정이다. 부시가 뛰어난 정치력으로 진보, 보수 세력 양 쪽을 만족시키는 후보를 내지 않는 이상 미국의 여름은 몹시 뜨거울 전망이다. 그가 제시할 미국의 비전은 과연 어떤 색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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