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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지난 22일 저녁. 세상에서 제일 편한 자세로 남편은 애인(삼순이)을 만나고 있었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는 이때가 기회다 싶어 남편에게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복희아빠! 나 옷 한 벌 사주면 안돼?"
"무슨 옷?"

"내일 모레 코엑스(세계시민지자포럼)갈 때 입고 갈 옷이 없는데…."
"아무 거나 입고 가면 되지. 무슨 패션쇼 하러가?"

"그러게 그 아무 거나가 문제라니까. 입을 거라곤 몸빼바지밖에 없는데…."
"그래 그거 좋다. 이번에 세계시민기자들이 다 모인다며. 이 참에 우리나라의 몸빼바지가 어떤 건지 한번 보여 줘봐."

"사 줄거야 말거야?"
"한번 생각해 보고."
"그럼 빨리 생각해봐. 내일 모레가 행사거든."


남편은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농담반 진담반 그렇게 건성으로 대답을 했다. 아마도 옷 한 벌 사 입으려면 5~6만원은 들것이란 생각에 이번엔 좀 과다출혈인 것은 분명했지만 그래도 나는 알고 있었다. 남편은 분명 내게 옷을 사줄 것이라는 걸...

내가 남편 속에 들어가 보지도 않고 분명히 남편이 옷을 사줄 거라고 호언장담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그건 남편에게 하는 부탁이란 게 은밀히 따지고 보면 부탁이 아닌 동의를 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껏 대략 3만원을 넘어서는 생활비에 대해선 나는 꼭 남편에게 동의를 구했다. 물론 우리 집 경제권은 내게 있다. 하지만 그것 또한 관리만 내가 한다는 것이지 결정권은 전적으로 남편에게 있다. 한 달에 한 번 할인점에 가서 생필품을 살 때 빼고는 3만원이 넘어서는 모든 것은 남편에게 동의를 구한다.

가령. 부모님들 생신이나 용돈으로 인한 지출. 집안 경조사로 인한 지출. 딸아이로 인한 지출. 심지어 쭉쭉 뻗는 머리가 못마땅해 어쩌다 한 번 드라이 파마를 해야 할 때도 나는 남편에게 물어본다. 그런 대다수의 것들에 대해서 남편은 흔쾌히 동조를 하는 편이다. 그것도 아주 기쁜 듯이 말이다.

내가 그렇게 시시콜콜하게 남편에게 동의를 구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그것이 나 나름대로의 가장에 대한 절대적인 대우의 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남편이 기쁜 듯이 내 동의에 동조를 해주는 건 어차피 필요한 지출이기도 하거니와 우리 집 가장으로서의 아내에게 절대적인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에 대한 뿌듯함 때문인 것 같다.

우리 부부는 올해 마흔 둘. 서로 동갑내기 부부이다. 그래서 일상생활에선 서로 친구처럼 격의 없이 지내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부부지간에 서로 지켜야 할 예의라든지 그런 건 별로 챙길 겨를이 없다.

물론 서로 한 이불 덮고 한 솥밥 먹는, 또 서로 눈빛만 봐도 그 속 깊은 곳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부부지간에 뭐 그리 대단하게 예의 차릴 것이 있겠냐고 하겠지만 신혼 초. 남편과의 부부싸움으로 그게 아니란 걸 느낄 수가 있었다.

결혼 초. 남편과의 부부싸움이 좀 잦은 편이었다. 서로 황소고집에 나름대로 한 성질들 하다보니 늘 부딪혔다. 그런데 부부싸움을 할 때마다 남편의 입에서 빠지지 않고 튀어 나오는 말이 있었다.

"내가 자기 친구야? 도대체 나를 남편이라고 생각은 해?"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땐 그저 할말 없으니 억지를 부리고 생떼를 쓰는 거라고 나 혼자 그렇게 치부해 버렸다. 하지만 부부싸움이 끝나고 격해진 감정들이 고개를 숙이기 시작하면 꼭 남편의 그 말이 나를 괴롭혔다.

'도대체 내가 남편 대우 안 한 게 뭐 있어. 그럼 어떻게 해야 남편 대우 제대로 하는 건데...'

딱 꼬집어 '이게 정답 이다'라고 말해 줄 그 누군가가 없음에도 끊임없이 나는 누군가에게 되묻곤 했다. 그런데 그 정답을 나는 우리 시어머님에게서 비로소 찾게 되었다.

결혼 초. 1년여 시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아침저녁 얼굴을 맞대고 사는 시어머님은 전형적인 조선 여인네였다. 함께 사는 내내. 시어머님께서는 시아버님께 말대꾸 한번 하지 않으시는 지극히 순종적인 여인이었다.

시아버님께서 식사 도중 지나가는 말로 국이 싱겁다고 한마디 하실라 치면 어느새 시어머님께서는 소금을 가져 오셨고, 어느 날은 식사를 하시다 말고 속이 안 좋다고 하시면 어느새 시어머님은 주방에서 죽을 끓이고 계셨다. 시아버님께서는 가끔 귀한 물건을 당신이 직접 잘 간수하신다며 어딘가에 잘 챙겨 놓으시고도 찾지를 못하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시아버님께서는 시어머님께 버럭 소리를 지르시며 화풀이를 하시곤 하셨다. 하지만 시어머님께서는 단 한마디 말대꾸도 하지 않으시고 그저 묵묵히 물건 찾는 데만 열중하고 계셨다.

그런 지극히 순종적인 시어머님을 바라보는 시간이 쌓여 갈수록 나는 남편의 그 억지스러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남편은 내게서 바로 자기 어머니 같은 지극히 순종적인 아내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가 못했다. 남편의 말이 틀렸을 땐 틀렸다고 분명히 이야길 해야 했고, 굽은 것은 끝까지 바로 펴야 하는 그런 성격이었다. 비단 그런 올곧은 성격은 남편에게뿐만 아니라 그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절대로 어영부영 넘어 가질 못했다. 그런 나였으니 남편 입장에서 보면 내가 남편을 남편으로서 대우 안 한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싶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깨닫고도 나는 좀처럼 남편에게 순종적으로 대해지지가 않았다.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뀌는 긴 세월 동안 내 안에 잠재되어 있던 그 성격이란 게 하루아침에 고쳐지기란 쉽지 않았다. 또 곰살갑지 못하고 사근사근하지도 못하고 더군다나 애교는 또 빵점이니...

그래서 나름대로 생각한 대안이 작은 것 하나라도 무조건 남편에게 동의를 구하자는 것이었다. 그것 역시도 처음엔 쉽지는 않았다. 성인이 되고부터 남편과 결혼하기 전 35살 때까지 혼자 생각하고 혼자 결정하는 습관이 몸에 밴 탓에 나는 내 아집으로 똘똘 뭉친 값싼 자존심의 노예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뭘 이런 사소한 것까지도 남편에게 의논해야 돼? 겨우 3만원 쓸 자격도 내겐 없는 거야?'

그러나 나는 값싼 자존심을 버리길 아주 잘 했다는 생각을 남편의 얼굴을 보고서야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어떤 것에 동의를 구할 적에 아주 잠깐 지그시 눈을 감고는 생각이라는 것을 해보는 척할 때 남편의 얼굴 위로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던 그 회심의 미소를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결국 깨달았던 것이다. 남편을 가장으로서 대우 한다는 건 아주 작고 사소한 일로도 가능하다는 것을.

▲ 남편이 사준 옷(세탁을 하였더니 많이 구겨 졌습니다).
ⓒ 김정혜

▲ 남편이 사준 옷
ⓒ 김정혜

23일 저녁 무렵. 남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어서 준비해!"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다시 물었다.

"왜?"

남편은 아주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내가 자기 옷 한 벌 사주려고."

나는 호들갑스럽다 못해 아주 오두방정을 떨고 있었다.

"어머 진짜! 정말 고마워!"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고 있었다.

'자기 용돈에서 사 줄 것도 아니고 생활비에서 지출 할 거면서 뭘 그렇게 생색은 내고 싶을까.'

하지만 이번은 생색을 낼 만했었다. 남편은 거금 5만원을 선뜻 내 놓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한 마디

"이만 하면 나도 근사한 남편 맞지?"

글쎄. 그건 다음 달 남편의 용돈이 5만원 더 추가되는지 안 되는지를 봐야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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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자회원이 되고 싶은가? ..내 나이 마흔하고도 둘. 이젠 세상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하루종일 뱅뱅거리는 나의 집밖의 세상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곱게 접어 감추어 두었던 나의 날개를 꺼집어 내어 나의 겨드랑이에 다시금 달아야겠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훨훨 날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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