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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도에 임하고 있는 사기장 신한균(신한균씨 제공)
작도에 임하고 있는 사기장 신한균(신한균씨 제공)
“도공(陶工)이라는 말은 원래 일본사람들이 쓰던 말입니다. 우리말로는 사기장(沙器匠)이 옳은 말이죠. 잘못 쓰이던 도공을 사기장으로 바로잡는데도 꽤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일본사람들이 쓰던 도공이라는 말은 단순히 그릇을 만들기만 하는 기능공을 이르는 말인데, 도자기에 대한 연구와 이론이 겸비된 사람은 도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니 도예가(陶藝家)라는 말도 아무에게나 붙이는 것이 아니라 도공으로서의 기능과 도사로서의 식견을 두루 갖춘 이에게 비로소 붙여줄 수 있는 이름이란다.

“흔히 물레 앞에만 앉아 있어도 도예가라고 하는데 원래 도자기를 만드는 데는 각각의 분야가 따로 있습니다. 가마에 불을 떼는 '불대장' 그림을 그려 넣는 '환쟁이', 성형(成形ㆍ그릇의 형체를 만드는 일)을 하는 ‘대장’, 유약을 바르는 ‘생질꾼’이 있어 각 분야에서 적게는 몇 년, 많게는 몇 십 년을 그 일만 합니다. 이 모든 것을 다 아우르는 사람을 ‘변수’라고 하는데 ‘변수’가 곧 ‘도예가’인 셈입니다. 말하자면 ‘변수’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겠죠.”

말만 들어도 숨이 막힌다. 예술의 어느 분야라고 쉽게 일가를 이루는 길이 있겠느냐만, 도자예술의 한 경지에 이르는 길이 이리도 멀고 힘겨워서야….

“도자기는 손가락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만듭니다. 전승도예가 단지 옛 것의 모방과 재현에만 그친다면 그것은 예술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긴 지나친 상업주의로 흐르는 것도 경계할 일입니다만….”

그의 말에 따르자면 전승도예는 우리 조상들을 통해 오늘날에 이어져 내려오는 전승기법을 발판으로 하여 새로운 도예 체계를 구축하는 것을 이르는 것이겠다. 그래, 그렇다면 그것은 또 다른 뜻에서의 창조이겠거늘….

“지금의 사기장 중에는 자기 작품을 ‘물건’이라고 부르는 작가가 더러 있습니다. 그런 사기장들은 사기장으로서의 자부심이 없다고 말할 수 있죠. 물론 자만심을 가지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부심 없이 도자기 작업에 임할 때는 명품을 만들기가 힘듭니다. 또한 자부심 없는 사기장의 행태는 사람들에게 우리 전승도예를 단순한 기능으로만 보이게끔 합니다.”

'조선 사발'은 '막사발'이 아니다

그런데 물레 앞에 앉아 그릇이나 만들고 있어야 할 이 그릇장이가 요사이 큰 사고(?)를 하나 쳤다. 생뚱맞게도 그릇이 아닌 ‘책’을 한 권 빚어낸 것이다. 사실 책이 나온 것은 이즈막이지만, 그가 이를 위해 공력을 들인 것은 10년이 넘는다.

<사기장 신한균의 ‘우리 사발’ 이야기>라는 이름을 단 이 책이 서점에 얼굴을 내밀자마자 날개를 달았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 이야기도 아니요, 눈물샘을 자극하는 통속소설도 아닌 한갓 그릇 이야기가 꽤 팔려나가고 있다는 소문이다. 그것도 정가 2만5천원에 535쪽이나 되는 것을….

책을 펼쳐보면 그제야 이 책이 눈썰미 있는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까닭을 알 수 있다.
“조선사발이 ‘막사발’이라고?” 책을 쓴 사기장 신한균은 책의 들머리에서부터 우리 조선사발은 결코 제멋대로 구운 막사발이 아니라는 것을 힘주어 말한다.

사기장 신한균의 우리 사발 이야기 (2만5천원)
사기장 신한균의 우리 사발 이야기 (2만5천원) ⓒ 가야넷
막사발이 무엇인가?
‘막-’이라는 말은 일부 이름씨 앞에 붙어 ‘닥치는 대로’, ‘함부로’의 뜻을 나타내는 접두사다. 또 ‘거친’, ‘아무렇게나 생긴’, ‘허드레의’의 뜻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닥치는 대로 하는 육체노동, 대수롭지 않은 허드렛일을 ‘막일’이라 하고, 막일을 해 돈을 버는 일을 ‘막벌이’, 아무렇게나 생겨 쓸모없는 돌을 ‘막돌’, 거칠게 짠 베를 ‘막베’라고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막’이라는 접두사의 이런 쓰임으로 본다면 ‘막사발’은 그다지 쓸모없고 보잘것없는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

과연 그런가? “아니다. 조선사발은 결코 제멋대로 구운 막사발이 아니다.”

예술미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 우리 사발이 한낱 막사발로 홀대받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사기장 신한균. 10년이 넘는 짧지 않은 세월을 애오라지 우리 그릇의 참모습을 찾아 헤매고 우리의 일그러진 그릇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땀 흘린 열매가 바로 <사기장 신한균의 ‘우리 사발’ 이야기>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일본의 국보가 된 조선사발을 직접 보고 이것이 결코 제멋대로 구운 막사발이 아님을 확신했다. 그때부터 규장각의 고문서를 뒤지기도 하고 일본의 미술관과 개인 소장가들을 만나는 등 ‘막사발’로 불리는 우리그릇의 ‘뿌리 찾기’에 온 열정을 다 바쳤다. 그러기를 10년이 넘고 11년이 되어 마침내 그릇이 아닌 한 권의 책을 빚어낸 것이다.

사기장 신한균에게 ‘언제 어찌하여 도예의 길에 들어섰느냐’고 묻는 것은 부질없는 질문이다. 그가 세상에 태어난 그날이 곧 도예입문의 날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니까. 이미 아는 이들은 다 아는 바이지만, 사기장 신한균은 우리 전통의 조선 사발을 최초로 재현해 낸 도예가 신정희 옹의 맏아들이다.

일제 강점 말기에 출생해 전쟁의 혼돈기를 거치면서도 오직 사발에만 매달려 국내 도예계의 일인자의 자리에 오른 신정희 선생이 바로 그의 부친인 것이다. 선생은 국내에서의 명성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의 중앙방송과 황실에서 ‘이도다완’의 재현작가로 인정한 그릇 세계의 실로 큰 그릇이다. 가족보다도 도자기가 더 우선이었던 그 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 눈만 뜨면 옆에 있던 사금파리들이 지겨웠다는 그는 철이 들면서 아버지가 얼마나 훌륭한 분이신지 깨달았다.
 
그가 대학과 대학원(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했고 졸업 후 대학 강단에 서기도 했던 것은 외도가 아니다. 단순한 기능인이 아닌, 마음으로 그릇을 빚고 거기에 혼과 얼을 담는 도예가가 되기 위해서는 드넓은 세상에 나가 생각의 깊이를 더하고 삶의 지평을 한껏 넓혀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세계 각국의 도자기를 섭렵하기 위해 바깥나들이도 수월찮게 했다.

특히 일본에서의 활약은 눈부시다. 1989년부터 일본 동경동급미술화랑에서 도예 개인전을 매년 개최하고 있고, 89년부터 지난해까지 해마다 일본 공영방송 NHK 초대전, 매일방송 초대전을 <신정희ㆍ신한균 부자전>으로 가졌는데 이들 초대전은 일본 각 지역의 최고 화랑에서 모든 비용을 부담한 조건이었다고.

1996년에 회령 유약을 국내 최초로 재현했으며, 2001년에는 일본 NHK에서 신한균 작도과정을 일본 전역에 생중계 했다.

그러나 그런 그도 일찍이 우리 옛 사발들의 실체를 모른 채, 그냥 일본책에 등장하는 사진만 보고 그릇을 빚어왔다. 그리고 그 사발들을 가지고 일본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물론 이 전시회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던 가운데 언제부터인가 한국의 사기장 신한균의 귀에 일본인들의 소리 없는 빈정거림이 들려오는 듯 했다.

“자기 조상들이 빚은 사발, 그 사발의 역사와 미학도 모르면서 그냥 사발을 빚어오는 한국의 도예가들…. 사발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간파하지 못하는 너희들이 만든 지금의 찻사발은 너희들 말처럼 차 사발이 아니고 막사발이다.”

이녁의 등 뒤를 스멀거리게 하는 이 소리 없는 소리. 그때부터 신한균은 우리 사발의 역사와 뿌리에 남다른 열정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따뜻하게 끌어당기는 맛, 있는 듯 없는 듯한 포용성, 자연과 가까운 친화력을 품고 있는 조선 사발을 실수로 만들어진 ‘막사발’이라고 폄하하게 된 것은 일본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그런 이름을 붙인 이후부터라고 한다.

1592년 임진년에 시작된 임진왜란을 가리켜 일본에서는 차사발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당시 탈취해간 사발은 현재 일본의 국보가 되어 있다. 그 가운데 처음으로 일본 국보가 된 도자기 ‘기좌이몽 이도’를 직접 본, 야나기가 한 말이 조선사발에 대한 잡기론의 모델이 된 것이다.

일본의 대표적 민예연구가로 조선 미술ㆍ공예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식견을 가지고 있던 야나기는 말했다.

“아주 평범한 물건이다. 이것은 조선의 밥사발이다. 그것도 가난뱅이가 예사로 사용하는 밥사발이다. 아주 볼품없는 물건이다. 전형적인 잡기다. 가장 값싼 보통의 물건이다. …개성 따위는 아무런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 … 평범함의 극치다. …이 정도로 흔해빠진 물건은 없다. 이것이 틀림없는 천하의 명기, 대명물의 정체다.”

신한균은 자신이 쓴 ‘우리 사발 이야기’에서 야나기의 그런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그가 보기에 야나기 주장의 결론은 “그 더러운 조선의 잡기에서 미를 발견하여 천하의 명물로 승화시킨 우리 일본인들의 심미안은 위대하다”는 것이다. 이렇듯 ‘막사발’이란 명칭 속에는 저들의 무서운 식민지 지배논리가 숨어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를 일본 국수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전문가들을 포함한 수다한 한국인들도 별 생각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분통이 터져 신한균은 팔을 걷어붙였다.

“그래! 나는 신정희의 큰아들이다. 아버지가 이것을 최초로 재현했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이것들이 정말 우리 민족에게 ‘막사발’이었던가?”

그로부터 사기장 신한균은 열병을 앓기 시작했다. 이것에 관한 책과 옛 기록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 사발들에 숨겨진 진실이 드러나고 이 사발들의 역사를 살짝 위장해놓고, 또한 사발들의 미학을 교묘히 일본인의 미학으로 바꾸어놓은 그 실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열별’은 책을 쓰지 않고는 고치기 어려운 중병이었다

“이제는 이 사실들을 기록, 아니 책으로 남겨야 한다. 그것이 한국 사기장으로 태어난 나의 운명이다.”

신한균의 ‘열병’은 책을 쓰지 않고는 고칠 수 없는 중병이었다. 하여 “그릇장이가 그릇이나 잘 만들면 될 일이지,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사발 연구는 무엇이며 책은 또 무슨 책인가?”라는 지청구를 들으면서도 그는 책을 쓰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옛 가마터를 누비기도 하고, 조선사발이 있다는 미술관뿐만 아니라 명품을 가지고 있는 일본의 개인 소장가들을 직접 찾아 나서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이녁의 손으로 직접 만져보게 해달라고 애걸복걸하기도 했다. 우리 것을 가져가 자기네 보물로 삼으면서 ‘판권’을 행사하고 있는 터라 이를 책에 기재하기 위해 비싼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그러나 그 비용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일본 학자가 왜곡한 우리 도자기의 역사적 진실을 찾아내고 또 식민사관과 왜독에 중독된 우리 사발의 본질을 바로잡는 일이라면 아무리 비싼 대가라도 기꺼이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일본 노무라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우리 그릇을 매만져 보고 있다.(신한균씨 제공)
일본 노무라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우리 그릇을 매만져 보고 있다.(신한균씨 제공)
<사기장 신한균의 ‘우리 사발’ 이야기>는 지난 11년 동안 그가 연구해온 결과물과 그동안 틈틈이 <오마이뉴스> 등 각 매체에 기고했던 글들을 모아 엮은 것으로 ‘사기장이 부르는 사발의 노래’인 셈이다.
총 열 대목으로 나누어 1~4장에서는 조선사발의 역사와 이것들의 고향, 그리고 이것들이 조선시대에 어디에 쓰이던 사발인가를 추적하고 있다. 그리고 5~6장에는 흙과 불 이야기, 7~10장에는 사기장이 느낀 사발에 대한 단상과 사기장과 관계된 내용들이 담겨있다.

때는 마침 독도 문제 등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역사 문제로 한일관계가 매우 껄끄러워져 있는 터라 이 책의 등장이 더욱 눈길을 끄는가 보다.

오는 가을에는 이 책이 일본어로도 출간될 예정이라는데, ‘조선 사발’을 ‘볼품없는 막사발’이라고 했던 일본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자못 궁금하다. 장삿속이 밝은 일본의 유수한 출판사들이 벌써부터 눈독을 들이고 있다니, 일본에서도 한국의 사기장 이야기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인가 보다.

회령유다기/신한균은 국내 최초로 회령유를 재현했다.
회령유다기/신한균은 국내 최초로 회령유를 재현했다. ⓒ 양산시민신문
책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선 사발들의 기구한 운명에 대한 사기장의 애정 어린 눈길을 만나게 된다. 535쪽이라는 만만찮은 분량이지만 특유의 ‘하오체’ 문장으로 마치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듯 글을 풀어나가기 때문에 읽기가 편하다. 일본으로 건너간 우리 사발들의 진기한 사진 400여 장도 손에서 책을 쉬이 놓지 못하게 한다.

분청다기 세트/신한균 작
분청다기 세트/신한균 작 ⓒ 양산시민신문
“전승도예는 한국인의 마음으로 만들어지고 한국인의 정서를 가득 담은 예술이기에 전승도예의 내면에는 한국인의 얼이 스며져 있고 보이지 않는 따뜻한 숨결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숨결과 얼은 전승도예의 앞날에 끊이지 않고 흘러가야 할 것입니다.”

책을 내긴 했지만, 사기장 신한균의 본업은 그릇 빚는 일. 생활 속에서 가까이 두고 사용하면서 사용자가 그 도자기의 참맛을 느끼고 거기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도자기를 만드는 것을 천부의 과제로 믿고 그는 또 다시 물레 앞에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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