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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땅이 받아줍디까> 책 겉그림
<그래, 땅이 받아줍디까> 책 겉그림 ⓒ 길
그렇게 해서 잘 삭힌 똥거름들은 봄철이 되면 소달구지에 실려 이곳저곳 팔려 나갔다. 집 주인이 자기 밭으로 몇 차례 싣고 가기도 했고, 또 이웃 집 밭으로도 두 세 차례 싣고 가기도 했다. 물론 똥이 귀한 까닭에 다른 집으로 싣고 갈 경우엔 그에 걸 맞는 일을 해야만 했다. 더욱이 그 똥을 싣고 가면 그 집에서는 으레 푸짐한 음식도 장만해서 대접해야만 했다. 가히 그 똥들이 귀한 손님이 된 셈이었다.

그런 거름 똥 이야기가 가물가물한데, 한승오님이 쓴 <그래, 땅이 받아 줍디까>(강, 2004)를 읽으니 더 새록새록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 같다. 마치 그 옛 시절이 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집에 들어서며 큰 소리로 아내를 불렀다. 나의 목소리에는 마치 귀한 손님이라도 모셔 온 듯한 다급함이 묻어났다. 아내도 똥이라는 소리에 마당으로 뛰쳐나왔다. … 시골 생활 일 년 만에 똥은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되었다. 똥과 나는 서로 멀리할 수 없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내년 거름으로 쓰려고 우리 가족의 똥도 차곡차곡 모으고 있다. 한푼 두푼 적금을 부어 나가듯…."(146쪽)

똥이 그토록 귀하다는 걸 알게 된 한승오님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도시에서 살았던 사람이다. 마흔이 되기 전까지는 적어도 도시에서 출판사를 운영하던 출판사 사장이었다. 당연히 똥도 밭도 논도 그리고 쌀 한 톨도 어떻게 만들어내는 것인지 전혀 몰랐던 사람이다. 그러다가 불현듯 마흔이 돼서 식구들과 함께 충남 홍성에 내려와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농촌 여러 집들 중에서 대나무가 우거진 집 한 채를 고르는 일 하며, 집 돌담에 꿈틀거리는 뱀을 잡아 죽이는 일 하며, 나무 때는 보일러와 기름 때는 보일러 두 가지를 모두를 돌리는 일 하며, 닭똥을 얻기 위해 양계장에 가서 하루 종일 품을 팔았던 일 하며, 가히 서툰 농사꾼으로서 거처야 할 그 힘든 일들을 하나하나 잘 헤쳐 나갔다.

"열 마지기 가까운 논에서 나온 쌀은 만만치 않은 양이어서 한두 집에 파는 것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전화통이 불이 날 만도 했다. … 하나하나 쌀 포대에 직접 주소를 써서 쌀을 부친 후, 나는 시험 결과를 기다리는 수험생처럼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날을 보내고 있었다."(233쪽)

홍성으로 옮겨 온 뒤 첫해 벼농사를 지어서 아는 사람들에게 너나 할 것 없이 전화를 돌렸던 일이다. 농약을 치지 않고 오로지 오리 농법으로 만든 순 햅쌀이라며, 자신이 쏟아 부은 온갖 정성과 손길이 쌀 한 톨 다 녹아나 있다며, 그는 당차게 자랑했다. 그 자신만만함 때문이었는지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 쌀을 기꺼이 주문해 주었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볍씨를 갈라내고, 겨우내 싹을 틔우고, 그걸 모판에 옮겨 심고, 어린 벼 잎이 벌레에 갉아 먹혀 쓰러지지 않도록 오리 떼들로 하여금 그 벼 잎들을 지키게 하고, 쨍쨍 내리 쬐는 여름철 햇볕에도 아랑곳없이 수많은 참새 떼들도 내쫓아야 하고, 그리고 가을 햇살도 마음껏 받아먹어 온전한 햅쌀로 탈바꿈하기까지 온갖 수고와 정성을 쏟아 부었는데, 그걸 알아주고 사 주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었겠는가.

그래서 마지막 주문 전화를 받는 그날 저녁, 나란히 머리를 맞대고 잠자리에 누운 그들 부부는 뿌듯한 가슴을 매만지며,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깊은 단잠에 빠져 들었지 않나 싶다. 모든 걱정과 염려를 한 시름 놓은 채….

이 세상에 가장 낮은 곳을 향하는 것은 흐르는 물이다. 그러나 그 물보다 더 낮은 것이 있단다. 그 흐르는 물보다 더 낮은 것, 그래서 그 물을 다 받아들이고, 그토록 깔끔하게 입던 옷들도 다 벗어던지고 맨 몸으로 들어가게 되는 곳, 그곳이 바로 논이라고 한다.

그래서 논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한승오님이 쓴 이 책을 읽다보면, 비록 농사를 짓지 않더라도 어떻게 사는 것이 낮고 겸손하게 사는 삶인지 어렴풋하게나마 배울 수 있지 않겠나 싶다.

그래, 땅이 받아줍디까

한승오 지음, 강(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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