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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일 오후 광화문 열린시민공원에서 민족민주열사 희생자 추모제가 열렸다. 이소선 여사가 아들 전태일 열사의 영정을 끌어안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이놈아, 너 하늘나라에서 얼마나 컸는지, 얼마나 어른스러운지, 이 애비 에미는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단다. 오늘 너희들의 제삿날이라고 이렇게 애비 에미는 너의 웃는 모습이라도 보고싶어 왔다. 이 무심한 놈아, 어젯밤에 꿈에서라도 보여주지…."

11일 오후 6시 서울 광화문 열린공원에서 열린 '제16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에 참석한 100여명의 유족들은 가슴에 묻은 자식과 형제자매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추모제에 참석한 노동자, 학생 등 700여명도 숙연한 마음으로 민주·민족열사들을 추모했다.

지난 91년 노태우 정권 당시 백골단에 의해 숨진 강경대(당시 20세·명지대 경제학과 재학)씨의 부친 강민조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이사장은 "독재자들에게 자식을 빼앗기고 가족을 잃으면서 가슴 찢기는 아픔으로 살아왔다"며 고통의 세월을 되돌아보았다.

강 이사장은 "군사독재에 항거하다 산화한 자식들을 가슴에 묻고, 빨갱이 어머니 아버지로 둔갑시키는 정권의 그늘에서 민주세상, 통일의 세상이 열리기를 학수고대했다"며 "이제 우리들의 자식을 가슴 속에서 떨쳐내고 민족의 가슴에 묻고 역사에 묻어 너희들 죽음의 뜻과 정신이 세상의 빚이 되어 세상을 비추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날 추모제 제단에 전태일 열사를 비롯해 300여명의 영정이 진열된 가운데 분향 및 헌화가 시작되면서 유족들은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이소선(77) 여사는 아들 전태일 열사의 영정을 손으로 어루만졌다가 끌어안고 부비면서 "태일아, 이제 늙어서 니 곁으로 갈 때가 됐으니 조금만 기다려라, 태일아 너무 보고 싶구나"라고 말하며 흐느꼈다. 정경연(44·경남 마산시)씨는 오빠 정경식(대우중공업 노동자·88년 의문사)씨의 영정을 붙들고 "오빠 말 좀 해봐, 오빠가 사랑하던 여동생이 왔어, 오빠 보고 싶어"라며 그리워했다.

이날 유족 및 참석자들은 행사장 한쪽에 만들어놓은 서명 천에 "경대야, 너의 뜻대로 살아가마(강민조)", "장호야(90년 전대협 출범식 참가 도중 열차 추락사), 그립고 보고 싶구나, 니 곁으로 갈 때까지 잘 있어(엄마가)", "오늘 산자와 죽은 자 모두 모였다, 다시 부활하여 조국통일 광장에서 다시 모이자(안재구)"라는 글들을 남겼다.

한편 민족민주열사 합동문화제(추모제)는 서울 시청광장에서 열 계획이었다. 서울시청 앞은 이한열 열사 등의 노제가 열린 역사적인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시가 장소 사용을 불허하면서 광화문 열린공원에서 열리게 됐다. 유족·시민단체들은 이명박 시장에게 사과와 각성을 촉구하면서 서울광장 조례 국가인권위 진정 및 행정소송 등의 대응을 밝혔다.

▲ 11일 오후 광화문 열린시민공원에서 열린 민족민주열사 희생자 추모제에서 참석자들이 유가족들과 함께 고인 넋을 기리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오종렬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상임대표는 "조국분단과 숭미사대, 폭압과 수탈의 협력자, 후계자가 이 사회 주요 자리를 깔고 앉아 길을 막고 있어 추모제 역시 제 자리를 찾지 못했다"며 "민중과 민족의 행복을 위해 투쟁하고 단결하자"고 호소했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은 '이제는 다시 와'라는 제목의 추모시에서 "이제는 다시 와/ 저 거짓된 기념비를 부시라/ 그대들의 찢어진 함성엔 어느새/ 사기꾼들의 깃발이 나부끼고// 보라 저 위장한 근엄 뒤에/ 시커먼 음모를 부시라"면서 "벗이여 이제는 다시 와/ 그대들의 혁명적 바램을/ 굴비로 만드는 저 썩어문드러진 것들의/ 꾸며진 판을 부시라"고 일갈했다.

참가자들은 결의문을 통해 "역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눈물과 한숨과 고통과 그리움 속에서 살아가는 유가족들의 아픔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며 "국가폭력에 의한 죽음의 진상을 규명하고 열사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과 반민족 반민주 반인권의 과거를 청산하는 역사적 작업이 올바르고 철저하게 이루어지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들은 또한 과거사법과 민주화운동명예회복법 개정과 민주유공자법 제정, 그리고 민주묘역 조성을 촉구했다. 또한 국가보안법과 집시법 개정 등 반민주 악법 철폐와 테러방지법 제정을 반대했다. 특히 비정규직 차별철폐, 식량주권 사수, 장애인 차별철폐, 미국의 전쟁위협 분쇄 등을 위해 투쟁할 것을 결의했다.

이날 추모제 본 행사에 앞서 이목희 열린우리당 의원이 행사장을 방문했다. 그러자 민주노총 소속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법안 심사 과정에서 노동계와 상반된 입장을 보인 이 의원에게 야유를 보냈고 이 의원은 10여 분만에 자리를 떴다. 고진화 한나라당 의원과 김태년 열린우리당 의원은 추모제 끝까지 참석했다.

지난 3일 민족민주열사추모기간 선포식을 시작으로 시작된 '2005 님을 위한 행진곡(부제-민주주의는 달리고 있다)'은 ▲4일 광주전남 민족민주열사추모제 ▲5일 경기도 마석 모란민주묘역 '열사의 삶' 표석 제막식 ▲6일 부산울산경남 민족민주열사묘역 참배순례 ▲9일 천주교열사 합동추모제가 열렸다.

"내 아들이 왜 죽었는지 진실을 알게 해달라"
실종 10년만에 의문사로 나타난 박태순씨 유족들의 호소

▲ 추모제에 참석한 고 태순씨의 부친 박종진(71세.고진화 의원 왼쪽 아래 검은 양복)씨.
ⓒ오마이뉴스 남소연

11일 추모제 행사장에서 만난 박희순(45·여·유가협 사무국장)씨는 수많은 의문사를 놔둔 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해체시킨 정치권과 정부에 대해 항의했다.

박씨는 막내 동생 박태순(당시 26세)씨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오늘은 착한 내 동생이 너무 보고 싶다"면서 "동생의 죽음을 규명해 부모님의 원을 풀어달라"고 호소하며 눈자위를 붉혔다.

85년 3월 한신대 철학과에 입학한 후 반독재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에 투신했던 박태순씨. 그는 수원검찰청 점거농성(89년 5월)으로 1년6개월 복역하고 출감 이후 91년 2월 19일 군 입영영장의 수취를 거부하고 부천지역의 영세사업장에 노동자로 위장 취업했다.

86년 대학 재학부터 노동운동 지하서클에서 활동, 수원지역 노동운동 지하조직(일명 복씨조직)에서 함께 활동한 그는 병역기피 및 지하조직 활동으로 공안기관의 감시를 받았다. 그리고 92년 8월 29일 자신이 다니던 부천 공장에서 퇴근한 뒤 행방불명됐다가 10년여만에 의문사로 나타났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지난 2001년 2월 12일 박씨가 '92년 8월 29일 시흥역내 열차사고 사망자의 지문과 동일인으로 확인'하고 박씨의 죽음에 대한 조사를 계속했다. 당시 기무사는 박씨의 동료에게 '박태순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며 행방을 추궁했고, 수원경찰서는 박씨 조직의 동향을 파악하는 등 군과 경찰 공안기관이 이씨를 내사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박씨는 92년 10월 8일 경찰이 동생의 시신에서 지문이 발견되지 않아 행려사망자로 처리한 것에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의문사진상규명위가 동생을 찾을 수 있었던 근거는 지문뿐이었다. 결국 동생이라고 확신할 수 없어 통보를 받고도 미루었다가 무연고 납골당에 안치된 동생을 지난 2002년 경기도 마석모란공원 민주열사묘역에 안장했다.

추모제에 참석한 누나 박씨는 "10년 동안 동생을 찾았다. 혹시 '북한으로 넘어간 것 아니냐'고 추정도 했는데 동생 친구들이 그 쪽 노선은 아니라고 했다"며 "동생과 함께 운동했던 친구들이 부모님을 찾아왔지만 고통은 더 심했다, 어머님은 막내의 행불에 충격을 받고 오랫동안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고 가족의 고통을 털어놨다.

박씨는 "어머니 아버지에게 태순이는 아직도 스물여섯의 아들로 기억되고 있다, 아버지는 길을 가다가도 비슷한 젊은이를 보면 넋을 잃기도 한다"며 "유가족들은 가해자를 벌주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다만 진상규명을 통해 사실을 확인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 세상을 바랄 뿐"이라며 의문사 진상규명을 호소했다.

어머니 홍종유(70)씨는 "시신을 봤어야 죽었는지 살았는지 믿지, 쟤만 봤는데 어떻게 믿겠느냐"며 "착한 내 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왜 죽었는지 진실이라도 알게 해 달라"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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