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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에서 심샬 마을로 가는 길에 보이는 발랑구디 빙하와 설산
파수에서 심샬 마을로 가는 길에 보이는 발랑구디 빙하와 설산 ⓒ 김남희
낯선 곳에 대한, 그것도 멀고 깊은 산골에 대한 본능적인 매혹과 경계 사이에서 잠시 갈등하다가 결국 심샬로 가는 비정기적 지프에 올랐다.

같은 숙소에 머물던 호주인 커플 미쉘과 스티븐을 포함해 차 안의 승객은 10명. 동네 사람들이 영어를 하는 청년을 앞세워 이것저것 물어온다. 졸지에 공식 통역사가 되어버린 알리 무사(28)는 이 도로가 1987년부터 공사를 시작해 2003년말에 완공되었다고 알려준다.

아가칸 그룹과 파키스탄 정부, 일본 NGO의 지원으로 건설하기 시작한 도로는 노동력의 대부분을 동네 사람들의 무료봉사로 충당했다. 이 동네 청년들은 도시에 나가 공부를 하다가도 방학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와 몇 달씩 도로 공사장에 나가 일을 하고는 했다고 한다.

도로가 완공되기 전까지, 다시 말해 재작년까지, 이 동네 사람들은 가장 가까운 마을인 파수로 나오기 위해 산을 넘고 계곡을 건너 3박 4일을 걸어 다녔다고 한다. 옆 마을에 가기 위해 등짐을 지고 3박 4일을 걸어 다닌 사람들이 21세기에도 있다니...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은 심샬 마을. 봄을 준비하는 농부들이 밭을 갈고 있다.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은 심샬 마을. 봄을 준비하는 농부들이 밭을 갈고 있다. ⓒ 김남희
차는 가파른 협곡 사이를 가로지른다. 심샬 강을 따라 가는 57km의 길. 길이 뚫렸다고는 하지만 매끈한 포장도로가 아니라, 그저 길을 닦아 놓은 것에 불과해 산사태라도 나거나 비나 눈이 내리면 며칠씩 길이 끊어지기 일쑤다. 오늘도 작은 산사태가 여러 번 일어나는 바람에 멈춰 기다리거나, 남자들이 차에서 내려 돌을 치워야 하는 상황이 계속된다.

사막처럼 황량한 들판과 수만 년의 세월을 살아온 빙하, 설산과 아찔한 협곡…. 길 위에서 기대할 수 있는 풍경이 이 길에는 다 있다. 길이 품고 있는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창에서 눈을 떼기가 힘들다.

차가 윗동네에 손님을 내려주고 올 동안 우리는 강변에 서서 기다려야 한다. 바람은 불고, 해는 서산 너머로 지고 있어 몹시 춥다. 춥다며 한 할머니의 품으로 기어들어가니 기다렸다는 듯 할머니가 안아주신다. 내 언 손을 할머니의 따뜻한 손으로 녹여주시고, 옷자락을 힘껏 벌려 뜨겁게 안아주시는 할머니. 꼭 엄마 품처럼 포근하다.

양들을 끌고 나온 마을 여인. 뒤로 보이는 나무들이 땔감용으로 키우는 가시덤불이다.
양들을 끌고 나온 마을 여인. 뒤로 보이는 나무들이 땔감용으로 키우는 가시덤불이다. ⓒ 김남희
3시간 반 만에 심샬 마을에 도착하니 저녁 7시. 이 마을에 게스트 하우스는 없다. 우리는 차에서 만난 산악 가이드 알리 무사의 집으로 간다. 이제 두 돌을 넘긴 딸 샤하나, 부인 아지자(25), 어머니, 남동생 둘, 여동생 둘, 이렇게 삼대의 8명이 다 같이 살고 있는 집.

알리는 4남 4녀의 장남이다. 카라치에서 공부하던 18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학업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감자 농사를 지으며 트레킹 가이드를 하면서 대가족의 생계를 혼자서 책임졌다. 영민했던 덕에 영어와 일어를 빨리 익혔고, 그 덕에 스무 살에 일본인이 경영하는 여행사에 입사해 산악 가이드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8천 미터가 넘는 봉우리인 가셔브롬 II와 브로드 피크를 등정하기도 해, 흰 산에 오르는 게 꿈인 나를 부럽게 했다.

저녁을 먹고 나오니 하늘에 달과 별이 가득하다. 알리를 비롯한 식구들은 다 부엌에서 자고, 우리는 알리의 방에 잠자리를 마련해 담요를 너댓 장씩 덮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곳에서 선택은 두 가지이다. 추위로 동사하거나 담요의 무게에 짓눌려 질식사하거나. 온 집안의 담요가 다 우리에게 온 것 같아 식구들이 무얼 덮고 자는지 걱정이 된다.

유치원 아이들이 양지 바른 곳에 나란히 앉아 있다.
유치원 아이들이 양지 바른 곳에 나란히 앉아 있다. ⓒ 김남희
다음날 새벽, 6시에 알리가 우리를 깨운다. 미셸과 스티븐이 7시 차로 떠나는 덕분에 6시 반이라는 이른 시간에 아침을 먹었다. 아침 먹고, 미셸과 스티븐 배웅하고 난 후 알리와 동네 산책을 나섰다.

날은 화창하게 개었다. 며칠 만에 보는 파란 하늘인지 모르겠다. 우리의 산책은 5분을 넘기지 못하고 중단되곤 한다. 알리가 동네 사람들과 인사하고, 나를 소개하고, 차를 마시고 가라는 요청을 점잖게 거절하느라. 서로 손등에 입을 맞추며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정겹다.

동네 사람들은 내가 봄을 불러왔다며, 올 한 해 이 마을에 손님들이 많이 오고 좋은 일이 생길 징조라며 좋아한다. 내가 올해 이 마을의 첫 손님이란다. 그동안은 가끔씩 유럽과 일본의 트레커들이 이 외딴 마을을 찾곤 했는데, 9.11 테러 이후 외국인 관광객이 급격히 감소해 작년에는 겨우 다섯 명이 이 마을을 찾았다고 한다.

알리는 동네의 모든 것을 빠짐없이 소개시켜주느라 바쁘다. 학교마다 들어가서 선생님과 인사하고 아이들 공부하는 모습도 지켜봤다. 여긴 9학년, 10학년 과정이 없어서 '프리 클래스'를 개설해 무료로 수업을 해주고 있다. 그 곳에서는 한 여학생이 어린 아기를 안고 와 공부하고 있다.

학교 운동장에서 수업 받고 있는 어린이들.
학교 운동장에서 수업 받고 있는 어린이들. ⓒ 김남희
산책에서 돌아오니 외국인이 찾아왔다고 알리의 친척 여자들이 다 모여들었다. 알리의 누나가 서툰 영어로 내게 말한다.

"나는 내 평생을 이 동네에서 보냈는데, 자유롭게 여행 다니는 네가 너무 부러워."

마흔은 훌쩍 넘겨 보이는 그녀는 이제 겨우 서른에 네 아이의 엄마였고, 그녀가 접한 다른 세상은 단 한 번 다녀온 근처의 도시뿐이었다. 갑자기 내 삶이 부끄러워졌다.

이 산골에서 나고 자란다는 것. 그건 자연과의 혹독한 싸움, 문명과의 긴 고립을 의미한다. 2500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이곳에는 수도도, 전기도 없다. 빙하의 물을 끌어올려 수력발전을 하지만 얼음이 녹는 늦봄부터 초가을까지만 약한 전력이 비정기적으로 들어올 뿐이다. 영하 30도까지 떨어지는 이곳의 겨울은 모질고, 길어 1년의 절반이 겨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런 지독한 추위에도 불구하고 난방시설이라고는 취사를 겸해 부엌에 설치된 난로가 전부이다. 땔감을 구하기 힘든 탓에 이곳에서는 특이하게 땅의 일부를 개간해 가시덤불을 심고 키워 땔감으로 쓴다. 그래서 동네를 걷다 보면 파키스탄 전역에서 아무렇게나 자라던 가시나무들이 과일나무처럼 정성스럽게 열을 맞춰 심어져 관리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동네의 갓난아기들은 대부분 고질적인 감기와 폐질환을 앓고 있고, 여자들은 물을 길어오기 위해, 땔감을 마련하기 위해, 양들과 소에게서 우유와 치즈를 얻기 위해, 하루 종일 쉴 틈 없이 일해야 한다. 남자들의 삶이라고 다를 것도 없다. 그들 역시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척박한 땅에 감자를 심고, 양과 소를 끌고 먼 고원으로 몇 달씩 이동해야 한다.

부엌은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생활공간이다. 이곳에서 손님을 맞고, 식사를 하고, 잠을 잔다. 알리와 가족들이 차를 마시고 있다.
부엌은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생활공간이다. 이곳에서 손님을 맞고, 식사를 하고, 잠을 잔다. 알리와 가족들이 차를 마시고 있다. ⓒ 김남희
알리는 '심샬리'들이 파키스탄에서 가장 강인한 사람들이라며 자랑을 아끼지 않는다. 마을 자체가 해발고도 3000미터가 넘는 곳에 있고, 이들이 가축을 몰고 가는 곳이 4700미터의 파미르 고원이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자란 덕에 그들은 파키스탄 최고의 고산 포터로 꼽힌다. 인구 3000명이 안 되는 이 작은 마을에서 8000미터 정상에 오른 사람이 30명이 넘는다고 한다. 고산 포터로 네팔에 '셸파'가 있다면 파키스탄에는 '심샬리'가 있는 셈이다.

이 마을에는 공동체 농경문화가 고스란히 살아있다. 농사는 우리의 품앗이, 두레 식으로 진행되고, 마을 자체가 씨족사회에 가까워 모두가 일가친척이고, 마을의 모든 일은 공동의 논의를 거쳐 결정된다. 친인척간의 결혼은 고립된 이곳에서는 더욱 강력하게 남아있어 대부분의 결혼이 사촌 간에 이루어진다.

짜파티와 야채(역시 집에서 만드는 야채는 식당에서 사 먹는 것과는 맛을 비교할 수 없다)와 짜이로 점심을 먹고 다시 알리와 산책을 나갔다. 언덕에 올라가 주변을 둘러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더 걷고 싶었지만 발이 아파 더 이상 걸을 수가 없다. 그간 파수에서의 트레킹으로 내 발은 엉망이 되어있다. 아물기도 전에 새로 생기는 물집들과 곪아가는 물집으로 인해 걸을 때마다 발이 없다고 주문을 걸어야 하는 지경이었다.

짜파티, 매운 마살라 양념과 소금을 넣고 찌듯이 오래 볶은 감자와 푸성귀. 거의 매일 먹는 주식이라고 할 수 있다.
짜파티, 매운 마살라 양념과 소금을 넣고 찌듯이 오래 볶은 감자와 푸성귀. 거의 매일 먹는 주식이라고 할 수 있다. ⓒ 김남희
내 발을 본 알리가 물집을 짜자며 어머니께 소금을 탄 더운 물을 부탁한다. 더운 물을 가져온 알리의 어머니가 직접 내 발을 씻겨주신다. 아무리 내가 하겠다고 해도 만류하시더니, 정성껏 발가락 사이사이를 닦고, 상처를 어루만지며 소독을 해주신다. 세월에 삭은 삭정이처럼 마르고 주름진 손가락이, 아직은 탄력을 잃지 않은 내 발가락들 사이를 꼼꼼하게 더듬고 있다. 그 더운 손길이 서울의 하늘 아래 계실 엄마를 떠올리게 만든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의 가슴에는 얼마나 깊고 넓은 강이 흐르기에, 제 몸을 열어 낳은 자식이 아니라 해도 이렇게 품어줄 수 있는 물길이 있는 건지... 발을 씻고 나자 알리가 나무가시로 물집을 짰다. 그 사이 알리의 여동생이 내 양말을 들고 나가 빨아서 나뭇가지에 널었다.

언덕에 올라가 내려다보는 심샬 마을
언덕에 올라가 내려다보는 심샬 마을 ⓒ 김남희
우유를 넣고 끓인 차로 몸을 데운 후 방으로 돌아오는 길. 하늘엔 오늘도 별이 총총하다. 오늘도 담요의 무게에 신음하며 잠자리에 든다.

다음날 6시, 알리가 깨운다. 아침을 먹고 출발준비를 하는 내게 알리가 안 좋은 소식이 있다며 말을 꺼낸다. 오늘 파수로 나가는 동네 사람이 두 명밖에 없어서 지프차가 운행을 안 한단다. 이 기회에 집 짓는 일을 하겠다며 곤란한 얼굴을 하는 기사 이삭. 알리가 그 일을 대신 해주겠다고 제안하고, 1000루피에 차를 전세내기로 한 후에야 겨우 마을을 떠날 수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알리와 식구들이 길가에 서서 오래 손을 흔들고 있다.

아들과 함께 밭을 갈고 있는 여인, 밭을 갈다가 아이를 돌보는 여인. 나무판자 밑에 가시덤불을 매달아 밭을 간다.
아들과 함께 밭을 갈고 있는 여인, 밭을 갈다가 아이를 돌보는 여인. 나무판자 밑에 가시덤불을 매달아 밭을 간다. ⓒ 김남희
이렇게 들어가는 길도, 나오는 길도 어렵기만 한 외딴 마을 심샬. 느리게 봄이 오고 있던 그곳에서 보낸 2박 3일은 사람의 더운 정을 다시 한 번 품어본 따뜻한 나날이었다.

수도 시설이 없는 이 마을에서는 식사 때마다 이렇게 주전자에 물을 담아와 돌아가며 손을 씻는다.
수도 시설이 없는 이 마을에서는 식사 때마다 이렇게 주전자에 물을 담아와 돌아가며 손을 씻는다. ⓒ 김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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