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골목길에서 본 우리집 장미. 옆에 심은 감나무와 어울려 자란다.
골목길에서 본 우리집 장미. 옆에 심은 감나무와 어울려 자란다. ⓒ 이덕림
이달 중순 들어서 하루 대여섯 송이씩 봉오리를 열기 시작한 장미가 하순에 접어들면서부턴 한꺼번에 수십 송이씩 피어난다. 꽃말 그대로 '불타는 정열'이 5월의 투명한 햇살 속에 눈부시다. 지금이 우리집으로선 일년 중 가장 아름다운 때다.

집집마다 장미 한 두 그루씩은 다 있는 은평구 신사동 '봉산2길' 골목에서도 우리 집 담장을 두른 장미의 화사함은 단연 돋보인다. 괜한 자랑이 아니다.

"참 예쁘다. 어쩜 이렇게 예쁘지."

우리 집 앞을 지나가는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다. 우리 집 장미는 그만큼 팬이 많다. 여인네들은 거개가 꽃송이에 코를 대보고 간다. 장미가 칭찬을 들으면 내가 칭찬을 듣는 것처럼 흐뭇하다.

다 같은 빨간 장미인데 뭐 그리 특별한게 있을까 하고 생각할지 모르나 확실히 차별화된 아름다움이 있다. 화려한 크림슨 빛깔과 남달리 풍염한 꽃송이들이 다른 느낌이다.

산뜻한 붉은 빛깔의 갓 피어난 장미 꽃송이.
산뜻한 붉은 빛깔의 갓 피어난 장미 꽃송이. ⓒ 이덕림
갓 피어났을 때는 붉되 탁하지 않은 붉은 기운이 감돈다. 소녀의 뺨에 피어나는 홍조(紅潮) 같다고 할까. 만개한 뒤엔 점차 불타는 듯 강렬한 진홍으로 변한다. 부드러운 주단 같은 겹꽃잎들에서 붉다 못해 은은한 검은 빛이 배어 나온다. 물랭루주 무희(舞姬)의 농염한 이미지라고 할까.

'장미 울타리'는 아내와 나의 꿈이었다. 7년 전 집을 개축하면서 우리는 붉은 벽돌 담장을 가슴높이로 낮게 쌓는 대신 그 위에 장미덩굴을 올려 '장미 울타리'를 만들기로 했다. 방범순찰을 돌던 경찰관들이 담이 너무 낮지 않느냐고 걱정했지만 되레 염려없다고 안심을 시키면서까지 장미 울타리에 애착을 가졌다. 구파발 꽃시장에서 사다 심은 장미 두 그루에선 그새 튼실한 가지 10여 개가 뻗어나와 억센 가시를 갈기처럼 세운 채 담을 타고 꽃을 피웠다.

장미는 종류가 무척 많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따르면 1만5천 종이 넘는다. 우리 집 장미는 그랜디플로라(grandiflora)종이다. 아들가지에서 여러 갈래의 손자 가지가 뻗으면서 한 가지에 5~6송이가 동시에 피어나는 게 특징이다. 좀 비싼 값을 치르고 구한 것인만큼 심고 나서도 꾸준히 정성을 쏟았다. 해마다 새 흙으로 뿌리를 북돋워 주고, 꽃이 진 뒤엔 씨방이 더 자라기 전에 손자가지를 전지해 줬다. 불필요한 영양분의 손실을 막기 위해 나 나름대로 생각해낸 방법이다.

우리 뒷집 할머니네 노랑 장미.
우리 뒷집 할머니네 노랑 장미. ⓒ 이덕림
'정열의 꽃'은 향기 또한 신비롭고 황홀하다. 풍부하고도 고혹적인 냄새. 장미 에센스 오일 향수가 가인(佳人)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까닭일 것이다. 장미향은 마력을 지녔다고 한다. 회중시계 속으로 스며들면 시계바늘이 멈추고, 윤활유와 접촉하면 윤활유가 변질된다는 어릴 때 상식 책에서 읽은 얘기가 지금도 기억난다.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장미의 계절이 되면 으레 '장미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떠올린다.

장미, 순수한 모순? 시인의 깊은 시의(詩意)를 촌탁(忖度)하지 못해 부끄럽던 내게 법정(法頂) 스님의 짧은 글은 명쾌한 해답을 주었다. "흙속에 묻힌 한 줄기 나무에서 빛깔과 향기를 지닌 꽃이 피어난다는 것은, 이것이야말로 '순수한 모순'이다." 문학평론가의 해설만을 찾아 나섰던 나는 얼마나 '아둔한 모순'인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