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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4월 30일, 8박 9일의 비단길 답사 출발을 위해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밥벌이 때문에 여행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남편, 마누라를 대표로 보내는 눈빛에 설렘이 가득하다. 공항 리무진 버스표까지 끊어주며 많이 보고 많이 느끼는 여행이 되라며 창밖에서 다정한 손짓을 한다. 어느새 스무 해가 훌쩍 넘은 고단한 동행 길. 애를 삭이지 못해 서로 상처도 많이 주고받았지만 이런 날도 있다니. 힘들다고 고무신 거꾸로 신지 않길 정말 잘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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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숙성 천수, 맥적산 석굴

2시간 40분 걸려, 드디어 서안공항에 도착했다. 황사 때문일까? 약간 희뿌연 풍경 속에 드넓은 평원이 눈 아래 펼쳐진다. 27도의 초여름 날씨, 건조함 때문인지 신록 푸른 5월 초입의 싱그러움이 전혀 느껴지질 않는다.

중국의 정중앙에 위치했다는 서안. 천년고도 장안의 지금 이름으로 우리가 가고자 하는 비단길의 동쪽 기점인 지역이다. 섬서성 3500만 명 인구 중에 서안 인구는 650만 명이란다. 대기하고 있던 버스로 이동했다. 언변이 유창한 한 여성이 마이크를 잡았다.

김춘녀씨. 오대산에서 잔뼈가 굵었다는 그녀는 단단하게 다져진 내공이 어느 큰 스님 못지 않은 여걸 중 여걸로서 향후 9일간의 일정 동안 우리 일행 모두를 떡 주무르듯 자유자재로 갖고 놀던 정말로 통 큰 아가씨였다.

봄 여자 김춘녀를 통해 중국에 관한 간단한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서안은 13개 왕조의 수도로 7~9월까지의 한여름 날씨가 46도까지 올라가는 곳입니다. 섬서성 북쪽에서 날아오는 황사 때문에 수건을 쓰고 다녀야 되고 석회수 물 때문에 대부분 사람들의 치아가 누렇고 꺼멓답니다.

강우량은 600mm 정도이고 밀과 옥수수가 주요 농산품입니다. 중국은 한 가정 한 자녀만 인정하는 까닭에 서안 주민의 150만 명 정도가 호적에 못 오른 사람이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한 달에 5만원 정도를 받는 중국집 보조밖에 할 수 없고 잠자리도 의자에서 잘 수밖에 없는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지요.”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알아야 면장을 할 것 아닌가. 법사님 강의를 한자라도 놓칠세라 적고 또 적는다. 주나라에서 당나라 때까지의 수도 서안. 당연히 수많은 유적이 산재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안에서의 일정은 함양 박물관 답사가 끝이었다.

춘추전국 시대의 혼란기를 일거에 제압한 진나라 진시황. 서안 시내에서 30Km 떨어졌다는 함양은 진시황이 천하통일을 했던 진나라의 수도였다. 문자와 화폐 그리고 도량형을 통일시키고 수레바퀴가 다닐 수 있는 도로 폭을 정비했다는 위대한 황제 진시황. 그러나 통일천하는 고작 15년을 넘지 못했다.

30만 명의 고혈을 짜내 축조했다는 만리장성. 항우의 손에 불 질러져 무려 석 달 열흘을 불탔다는 아방궁 건립에는 70만 명의 인민이 동원됐다니 나라가 온전할 수 있었겠는가. 인간의 탐욕과 오만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역사가 설명해 주는 대목이었다.

석 달 열흘 불탔다는 아방궁터가 바로 함양 박물관 주변이란다. 공항에서 불과 25분밖에 안 걸리는 곳이었다. 춘추전국 시대의 유물과 진나라, 한나라 시대의 유물 전시관인 함양 박물관. 입장료가 중국 돈 20위안이었다.

박물관 초입에 청동 얼굴상이 눈에 띄었다. 진시황의 얼굴이었다. 넓적한 얼굴에 튀어나온 광대뼈. 거리를 다니다 흔히 만날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얼굴이었다. 한족과 유목인이 뒤섞여 이루어진 교역도시 서안에 진시황은 정작 한족이 아니었단다.

유목민 출신으로 중국을 천하 통일한 위대한 황제 진시황. 진시황은 철기문화를 도입해 무기를 만들고 농기계를 개발하였다. 박물관 곳곳에 그 때의 무기와 농기구, 생활용기들이 진열 돼 있었고 진나라 궁전의 격자무늬 벽돌도 눈에 띄었다.

함양 박물관에서 본  예쁜 꽃사슴
함양 박물관에서 본 예쁜 꽃사슴 ⓒ 조명자
꽃사슴 무늬가 너무나 아름다운 와당. 북처럼 생긴 비석 석고도 이채로웠지만 무엇보다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1965개의 채색 병마용기였다. 그 유명한 진시황릉 병마용을 서울 전시회 때 일부 보았지만 정작 서안 진시황릉 답사는 일정에서 제외돼 있었다.

꿩 대신 닭이라고 내게는 함양 주변에서 발견된 채색 병마용기을 보는 것만도 큰 횡재였다. 1974년, 우물을 파던 농부가 우연히 발견했다는 진시황 병마용 항. 줄 지어 늘어선 골에 나란히 서있는 병사의 키는 172cm에서 196cm까지 이르는 건장한 체구가 대부분이란다. 함양 박물관 도용은 한나라 때 것이라 진나라 도용 보다는 체구가 작은 편이었다.

총 8000여개에 달하는 병마도용. 얼굴 생김새가 제각각인 까닭은 서로 상대방의 얼굴을 보며 모형을 만들었기 때문이고, 모든 병사가 무표정인 까닭은 죄수가 만들었기 때문에 웃을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진시황이 인간 순장을 대체할 방법으로 만들었다는 도용. 이 병마용 항을 발견한 할아버지는 하루 수입이 우리나라 돈 100만원에 달하는 거부가 되었단다. 어디 이 할아버지뿐이랴. 중국은 조상 잘 둔 덕분에 진시황 병마용 항 입장료를 하루 2500만원씩 알토란 같이 챙긴단다.

함양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천수로 출발한 시간은 오후 3시 16분이었다. 비단길 시작, 하서회랑의 시작 천수의 맥적산 석굴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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